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누군가와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혹은 "OO랑 닮았다는 말 듣지 않아요?"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그 OO란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연예인이나 언론인이 대부분인데, 그런 말을 들을때면 기분이 묘해지곤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예쁜 연예인을 닮았다라는 말이 한편으론 칭찬의 의도일 수 있으나, 가끔은 '나'보다 '누군가와 닮은 사람'이라는 것에 중점을 둬버리면 괜히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하니까 말이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말도 간혹 그렇게 기분이 묘해지는데, 만약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난다면 그 느낌은 어떨까? 얼굴뿐 아니라 체격도 키도 목소리도 같다면? 예전에 일이 몹시 바쁠때면 '내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라며 투덜투덜 하곤했었는데, 진지하게 그런 상황을 상상해본다면 어쩐지 조금 무서워진다. 만약 정말로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다면...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진짜라는 거지? 나라는 존재가 유일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나서의 혼란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일본 영화 <비밀>의 원작가로, 내년 1월에 일본에서 드라마로 방영예정인 <백야행白夜行>의 작가라는 것 정도. 일본 추리소설계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을 빼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 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손이 간 이유는 아마 <분신分身>이라는 제목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릴때, '도플갱어'를 겪은 사람은 그 이후로 원인도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당시의 나에게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와 똑같은 분신을 만나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이내 따라붙는 그런식으로 죽고 싶진 않다는 두려움. 딱 아이다운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읽은 <레몬>은 의외로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었다. 두 주인공 마리코와 후타바가 각 장마다 서로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이었는데, 추리소설답게 빠르게 이어지는 스토리는 쉽사리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책이 처음 쓰여진 시기(1993)를 생각하면 뒷내용은 이미 충분히 상상이 감에도 이런 류의 내용은 언제나 흥미를 유발시킨다. 게다가 현재 전국민의 최대 관심사인 '황우석 사건'과도 연관이 있으니 더 그럴수 밖에. (나는 이제 책속에서 '줄기세포'와 '난자'라는 단어만 봐도 '황우석 교수'가 떠오르니 이건 완전 자동. 다른 사람도 그러려나;;) 

소설이 출간된지 이미 12년이나 지난 탓인지, 아니면 널리 보급된 인터넷과 미디어의 영향으로 '배아복제'니 '난자추출' 및 '체외수정'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지니고 있는 탓인지 소설속의 배경이 되는 것들이 새롭지는 않다. 특히 작금의 사태를 비추어 볼때 오히려 독자쪽이 아는게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 그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더 늘어난 상태에서 봐서 오히려 조금 더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특히 모성(母性)에 대한 부분은 새로운 느낌으로 눈물샘을 자극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진취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려던 여자도 생물적 본능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지만 '엄마'란 존재는 정녕 위대하다. 여자로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인 그녀들이지만 어머니라는 지위앞에는 언제나 강하고 대범하고 너그럽다. 존경합니다 어머니!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 참 마음에 들어버렸다. '인류를 위해, 더 나아가 미래를 위해서'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과학을 이용하지 말라고 책은 말하고 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도 된다는 식의 말은 군사독재 정권때나 통했던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소수'의 입장이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당신은 절대다수의 울타리안에 속해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속단하지 말라. 언제 울타리 밖으로 내쳐질지 모르는 일이다. 책 속 문구중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집단은 광기를 만든다'는 말. 광기를 열정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 착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또 다른 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출판사의 의도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시대상황과 묘하게 맞물려 읽는 재미가 남달랐던 작품이다. 어렵지 않은 책이고 위에서 말했듯, 나(인간)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 한번쯤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덧) <레몬>을 읽기전에 간단한 표지선정 투표를 한적이 있다. 4가지 표지중에서 투표하는 것이라 재미삼아 했었는데, 내가 고른것이 메인이 되어 내심 기분이 좋았다. <레몬>의 원제가 <분신分身>임을 감안하면 표지에서나마 원제의 느낌을 충실히 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은 사람이야 <레몬>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겠지만, 사실 추리소설의 제목이 <레몬>이라니 뭔가 겉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 분신이 '분신자살焚身自殺'의 의미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이유로 원제를 그대로 옮겨오지 못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못내 아쉬울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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