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소 후 발굴해낸 이마 이치코의 단편집. 야오이와 판타지계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마 이치코의 초기 작품들이 대거 실려있다. 짧게는 4쪽 짜리 지면 메우기용 만화부터, 풋풋함이 물씬 느껴지는 데뷔작은 물론 장편으로 그려도 좋을 정도로 여운이 남는 만화까지 통일성은 없지만 다양성은 넘쳐난다. 넓게 보면 <이마 이치코 걸작 단편집>이라고 해서 2000년대 초반에 대원에서 연속 출간한 단편집 중 첫 번째 작품집이기도 하다. 전부 10편이 실려있는데,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보여왔던 그녀 작품들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집을 내기까지 제법 갈등을 했었나보다. '그리운 망신의 추억'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후기에 따르면, 작가가 이미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은 후에 이 작품집을 내게 된 터라 새삼 자신의 초기작을 단행본 형태로 묶어낸다는 게 창피해서 "가능하다면 땅이라도 파서 깊이 묻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원래 작가들이란 자신의 초기작을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법이니까. 오죽하면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이란 책까지 나오겠는가. 다행히 이마 이치코는 "여기서 망신을 잘 견딘다면 그 대가로 인세가 들어오게 된다"는 재치있는 대사를 치며, 각 작품에 대한 간단한 해설을 덧붙인다. 팬으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
개인적으로는 '마이 뷰티풀 그린 팰리스'라는 그녀의 데뷔작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이마 이치코 특유의 경쾌한 BL 분위기가 데뷔작에서 이미 결정되었구나 싶어 놀랐다. 동성간의 야릇한 감정에 대해 지분거리지 않고 산뜻하게 처리하는 진행방식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어쩌다 이 문제를 리얼리티 측면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사람은 바보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 과연 이치코 사마는 독자를 자신만의 세계로 데려가는 능력이 출중하다. 멋져!
2011/05/01 작성, 알라딘에 옮겨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