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친구와 만나서 커피나 한잔하려고 시내에 갔다가 민족대이동을 몸소 느꼈다. 세뱃돈 받고 좋아서 뛰쳐나온 꼬꼬마부터 잔소리와 집안일에서 탈출을 감행한 어른들까지, 시내 한복판은 무슨 아이돌 팬사인회가 열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길을 걷다 감히 방향을 틀라치면 앞, 뒤, 옆사람과 한번쯤은 부딪혀야했다. 커피숍은 또 어떤가. 대형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부터 소규모 개인 커피숍까지 단 둘이 앉을 자리 조차 없을 만큼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 와중에 폰케이스를 바꾸고, 필름을 붙이고, 음반가게에 들러서 벼르고 있던 CD 하나를 샀다. 바로 대세 <겨울왕국>의 사운드 트랙이다. 



OST코너에서 <겨울왕국> 디럭스 에디션을 골라 카운터로 가고 있는데, 홀점원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손님 잠깐만요."했다. "아, 겨울왕국은 카운터에 많으니 계산하실때 달라고 하시면 줄거에요. 이건 전시용으로 놔둔거라..."하면서 CD를 달라고 했다. 과연 대세는 대세군. 본래 음반가게나 책가게나 대세는 카운터에 쌓아두는 법이지. 사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겨울왕국>은 <변호인>과 더불어 올 겨울 최고 대세 영화가 되었다. 나 역시 개봉하자마자 보고, 연휴에 3D로 한번씩 더 보았으니 확실히 대세에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영화나 드라마의 사운드트랙을 많이 사모으는 편인데, 디즈니에서 간만에 대작 하나 터뜨려주었으니 나로선 기쁠 수 밖에. 최근 각종 차트를 휩쓸고 있는 엘사의 테마곡 'Let it go'를 위시하여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Love is an open door',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등 영화내내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곡들을 CD로 들을 생각을 하니 왠지 설렜다. 이걸 CD로 들으려고 일부러 음원사이트에서 음원을 다운받지도 않았다. 어차피 살건데 음원으로 다운 받으면 감흥이 떨어지니까. 몇 백원이지만 이중결제해야하니 돈이 아깝기도 했고.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CDP를 꺼냈다. 몇백장의 CD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집에 쓸만한 홈오디오 시스템 하나 없다는 게 좀 슬프지만, 어쨌든 나에겐 CDP가 있으니까 뭐. 내가 갖고 있는 CDP는 파나소닉과 소니 두개인데, 간만에 꺼내보니 파나소닉은 고장이 났는지 새 건전지를 넣어도 작동이 안 되고, 소니는 충전건전지의 +극 부분이 약간 녹슬었긴 했지만 완충하니 제대로 작동했다. 소니 CDP를 라인인 케이블로 아이폰 독스피커에 연결해서 크게 들었는데, 꽤 쓸만했다. 아무래도 CDP라 출력이 약해서 독스피커의 볼륨을 엄청 올려야했지만 말이다.



소니 D-NE730



위 CDP는 2007년인가 'CDP들이 멸종위기'라는 카더라 소식에 혹시나 해서 하나 사둔 거다. 파나소닉 CDP가 있긴 하지만, 고장나면 어쩌나 싶어서 사둔 건데, 나름 선견지명이었나보다. 실제로 파나소닉은 고장이 났고, 이건 그나마 최신모델(...)이라 그런지 아직 쌩쌩하니까. 당시 병행수입된 제품을 사서 7~8만원 정도 가격으로 제법 싸게 샀던 기억인데, 지금 검색해보니까 무려 45만원이나 한다. (헐- 그돈이면 야마하 오디오도사겠다.;;;;) 속물스럽지만 가격이 그만큼 뻥튀기되니까 갑자기 내 CDP가 사랑스러워진다.


<겨울왕국>을 몇 번 돌려듣고나니 그동안 소홀했던 다른 사운드트랙에도 눈이 갔다. 그래서 'Love Affair'와 'Anastasia', 'Titanic', 'A lot like love'를 차례로 들었다. 실체가 없는 mp3 음원과 동그란 형태를 가진 CD의 음원은 같은 음악이라도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LP도, 카세트 테이프도 그 느낌이 다르다. 음질의 좋고 나쁨을 떠나 향유하는 방식이 다르므로, 받아들이는 느낌도 달라지는 것이다. 칙칙지지직 튀는 LP에는 디지털 매체에는 없는 아날로그의 향수가 있고, 늘어진 테이프에는 어리고 서투른 시절이 숨겨져있다. 디지털로의 전환을 알렸지만, 이제는 천천히 그리고 확연하게 구시대 매체로 귀속되어가는 CD에는 나름대로의 세련됨과 과도기의 추억이 함께 묻어있다. 그래서 CD는 디지털인데도 묘하게 아날로그적이다. 아마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물리적으로 소장할 수 있는 마지막 매체가 아닐까. mp3는 CD를 갈아끼우거나 앨범 속지를 들여다보며 가사를 곱씹을 수 있지는 않으니까. 점점 발매되는 CD의 양이 줄어들고, 음원쪽으로 기울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난 CD가 오래오래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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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노무직 2014-02-0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계셨군요!!

근데 다소님은 뭐하는 분이세요??
오래 알고지내면서도 전혀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네요..

다소 2014-02-04 12:34   좋아요 0 | URL
온지 얼마 안 됐어요. 정착할지 안 할지도 모르지만...아마 할 듯.
제가 포스트에서 제 얘기 안하던가요? (최근엔 안 했나..;ㅎㅎ) 그냥..꼬맹이들 가르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