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총 페이지수가 겨우 150쪽 남짓한 얇은 하드커버의 책이다. 그럼에도 한장한장을 넘기는 속도가 생각만큼 빠르지가 않다. 술렁술렁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에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연애와 결혼, 사랑에 대한 수 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조금 복잡해지는 책이었다.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모를 이야기는 아주 담담하고 관조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스펙터클하고 적극적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은 '이랬다 저랬다'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지조없이 흔들렸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결혼이란 거 한번 해볼만 한 거구나!'하다가도 '결혼같은 거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은데?' 로 바뀌는 것. 그도 그럴것이 이야기속의 화자는 결혼한 지 3년이 채 안되는 여자로, 결혼한 여자의 조금 씁쓸한 고독함과 기질적으로 자유로운 열정사이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주말은 특별한 것이다. 그녀의 모든 에너지는 주말에 거의 소모될 정도라고 하니 그녀의 '주말'이 어떤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결혼하기 전에야 남편과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 날은 모두 주말 같았겠지만 결혼 후에는 그렇지 않다. 결혼은 연애가 일상이 되는 거니까. 회사에 다니는 남편의 생활은 규칙적이다. 평일에는 퇴근 후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기 일쑤이므로 당연히 그들이 무언가를 같이 하는 날은 주말이 되는 것이다. 사실은 주말 내내 잠만 자거나, 할인 매장에 가는 정도라 해도 결혼 후,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연애할 때와는 다른 특별한 어떤 것을 느끼게 하나보다. 그것이 결혼의 묘미일까? 그렇게 매일매일이 주말같은 인생이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러면 산산조각날 인생이란 걸 어렴풋이 느끼는 여자. 그녀를 보며 나도 결혼한 여자의 일상을 잠시 꿈꾸어 보게 된다.

작품해설을 맡은 '이노우에 아레노'는 이 책을 두고 위험한 책이라고 했다. 이유는,
한창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증오를 생각하고,
증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사랑의 기억을 추억하고,
혼자인 사람은 둘이 되고 싶어하고,
둘인 사람은 혼자가 되고 싶어할 테니까.

라고 적고 있다. (p.138)
이 말에 무척 공감한다. 책을 읽는 동안 지조없이 흔들리는 마음속에 한 번씩 떠올렸던 것들이기 때문에.
내 경우 결국은 사랑의 추억을 기억하고, 둘이 되고 싶어하는 쪽이므로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든다.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느낀 것들을 햇빛 쨍쨍한 오후처럼 나른하게, 혹은 별빛 가득한 밤처럼 감성적으로 써낸 글들이다. 나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 그럼에도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맞춰주는 것이 아닌, 상대방의 생활패턴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 평범한 일상이 시시해보이기는 커녕, 행복해보여 부럽기까지 한 걸 보니 아무래도 나 요즘 사랑이 하고 싶나보다.



덧) 1. 다섯 번째 이야기 「밥ごはん」에서 여행을 가겠다는 여자의 말에 "그럼, 밥은?" 이라고 대꾸한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 떨어진다. T^T 아아, 이것이 결혼한 남자의 실체인가, 싶은 생각이 확- 드는 것이..-물론 그 한 단면 만으로 섣불리 판단하면 안되겠지만- 정 떨어지는 건 사실. 하다 못해 "그럼, 나는?"이라고 했다면 차라리 괜찮았을텐데...

2. 아- 이것도 직업병 비스무리한 건가; 책 읽다가 맞춤법 오류나 오타가 눈에 띄면 아주 찜찜하다. -ㅁ-

"당신도 내 생각해야 ." -->p.49

이 경우 '당신도 내 생각해야 .'가 맞다.
혹시 여태껏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해서 책까지 뒤져봤으나 역시 '돼'가 맞다.
흐음.. 교열상의 실수일까나? - _-
내가 읽은 건 초판 1쇄라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이 이후로도 계속 저 상태인건 아니겠지? (헉-)
아아- 비교해보고 싶어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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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25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이세요. ㅋㅋ

다소 2006-05-2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흐흐- 병이죠^^;
 
연애시대 1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만 보면 아주 로맨틱하고 근사한 -사실은 보는 사람 닭살 돋아 죽을 것 같은- 연애사가 줄줄 흘러나올 것 같다. 살랑살랑 바람부는 봄날에 애인 팔짱끼고 길 걸어가다가 '나 잡아봐라~'할 것 같은 이런 제목이라니.. 스르륵 훑어보고 흥, 하고 콧방귀나 껴주려고 했으나 이거이거, 내용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 담담하게 혹은 살짝 흥분한 채, 친구에게 이야기 하듯 들려주는 두 남녀의 이야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존재와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1년 3개월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돌아온 싱글'이 된 두 남녀는 이혼 후에도 가끔씩(아니 자주) 만난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결혼한 호텔에서 결혼기념일마다 보내주는 50% 할인권이 아까워서 그 날 하루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만났었다. 그 호텔 스테이크가 아주 일품이라나. 아니 그깟 스테이크가 뭐라고 이혼한 부부가 다시 만나나 싶지만 사실 그런건 무시할 수 없는 일상중에 하나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50%나 되는 할인권은 그냥 썩혀버리기엔 굉장히 아까운 거니까. 그 후, 그들이 예전에 자주 가던 가게에서 마주치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물건을 돌려주려고 만난다거나 혹은 자잘한 용무로 만나는 횟수가 늘다보니 그들은 어느새 '친구'라는 새로운 관계에 놓여있다. 말로는 친구관계라 하나 아직 털어내지 못한 지난 날의 오해와 응어리는 그들을 솔직하지 못하게 만든다. 자존심 때문에 표현도 못하고 서로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으르렁 거리기 일쑤인 그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생기길 응원하며 서로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주기에 이른다. 그렇게 두사람은 각자의 연애를 하는듯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은 그들의 지난 날을 돌이키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고만다. 처음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결심하고, 신혼을 즐기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들은 추억에 젖는다.

현재 방송중인,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동명 드라마에는 '헤어지고 시작된 이상한 연애'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헤어지고 시작된 연애라니..다소 역설적인 이 부제는 이 작품을 단 한마디로 정의하는 최상의 카피다. 게다가 그 헤어짐조차 연인사이에 으레 있을 수 있는 평범한 헤어짐이 아니다. 이혼이다. 결혼을 한 부부의 헤어짐. 서류상 고스란히 흔적을 남기는 이혼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그 헤어짐 후, 그들은 연애를 시작한다.(본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지만...) 헤어짐의 이유야 당사자가 아닌 이상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문제겠지만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여태 연애의 끝은 결혼이라 생각했던 나의 사고방식에 적게나마 변화가 왔달까. 연애의 끝은 결혼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 전환점을 맞이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아직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라 아직 결혼을 할 계획도, 할 마음도 없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진지하게 생각할 것 같다. 연애에 있어서나 결혼에 있어서나 중요한 건 관계를 지속하는 힘. 사소한 오해나 실망감을 얼마나 빨리 응어리 지지않게 풀 수 있느냐가 지속성의 관건이리라. 속으로 삭이는것만이 능사는 아니니 가끔은 큰 소리를 치고 울부짖으며 풀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달까.

아, 그리고 중요한 것!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직 빛바랜 핑크빛의 그 어떤 감정이 손톱만큼이라도 남아있다면, 그 (혹은 그녀에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정리한답시고 또다른 혼란속에 빠지는 꼴일테니...

아직 2권이 나오지 않은 관계로 제대로 된 감상은 힘들겠지만 일단은 독특한 설정과 전개가 마음에 든다. 각자의 입장에서 풀어쓰는 구성도 그들 나름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좋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드라마보다는 밋밋한 원작이다. 자고로 원작보다 나은 영상은 드물다는데, 이건 그만큼 드라마 제작진의 연출이라든가 극본이 훌륭하단 말이겠지. 게다가 1권보다 드라마의 진행이 빠르다니, 너무해. 2권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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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아마 고2 때였을 것이다.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을 읽고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소설이었는데, 하병무의 <남자의 향기>와 더불어 친구들 사이에 대인기였다. 건조하리만치 담담한 문체나 강약고저가 거의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스토리는 전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금세 지루해 할 법도 한데, 나는 손에 잡은 책을 덮을 수가 없어 밤을 샜던 기억이다. 책을 다 읽었을 땐, 멍하게 한 30분을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스토리가 소설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개성, 문체, 분위기, 호흡 등 소설의 매력을 결정짓는 것은 수 십 가지였다. 그리고 난 난생 처음으로 소설을 읽는 것 만이 아닌, 직접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통속적인 이야기를 특별하게, 낯선 소재를 친근감 있게, 자신만의 개성과 문체를 가지고 남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는 생각만 하다가 접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그런 생각 -이야기(소설)를 써보고 싶다는- 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소설 창작에 대해 공부해보기로 했다. 마침 내가 읽으려고 적어둔 책 목록에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가 있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제목은 물론이요, 슬쩍 훑어본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읽으려고 찜 해둔건데 마침 잘 됐다 싶어 당장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소설 쓰기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와 마인드,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우선 첫 부분에는 '이야기'가 삶에 미치는 중요성을 간략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설파하고 있는데 이 일곱 장 남짓한 프롤로그 부분이 너무나 가슴깊이 와 닿아서 나는 금세 책 속에 빠져들었다. 저자는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고 뭉뚱그려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기본적인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좀 더 친절하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는데, 그 방법 중 하나로 '느리게 읽기'를 권한다. 정보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함이라면 속독이 좋을 지 모르나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속독은 그다지 권할 만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꼼꼼하게 천천히,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심지어 문장 부호 하나에 집중하는 책 읽기를 통해 그 소설을 쓴 작가를 만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소설을 쓰는 방법을 직접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든다. 짧은 감상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분석 내지 비평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이 방법은 꽤 유효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좋은 글을 꼼꼼히 읽는 것은 그저 이해만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일 것이다. 그에 따른 결과도 다를 것이고.

이 밖에도 책은 발상에서 설계, 인물 설정, 좋은 문장에 이르기까지 소설 창작의 방법적 측면을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다. 몇몇 소설들의 문장을 인용하는 세심함은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기본적으로 소설가로서의 자세와 마인드가 가장 중요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그 현상은 환영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기본 중의 기본인)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독자는 싫고 바로 작가가 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심지어 소설 창작의 방법을 몇 개월 학원 다녀서 딸 수 있는 자격증 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더 심각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소설 쓰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고, 방법이 아니라 태도이다.'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소설가로서의 자세(의식)가 소설쓰기(기술)에 앞서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어쩌면 진부하고 고리타분 할 지도 모르지만 소설 창작에 입문한지 얼마 안된 사람이라면, 혹은 아직도 소설 창작에 있어 많이 헤매고 있다면, 이 책은 앞으로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저자가 소설가로서 얼마나 커다란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지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소설쓰기'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어려워 보여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한번 쯤 도전해 보고 싶은 투지가 생겼달까. 동기부여에도 한 몫하다니, 이 책 어쩌면 단순한 창작론 그 이상의 책일지도 모르겠다.


덧) 내가 별 하나를 뺀 것은 순전히 독자로서의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좋은 내용이 고작 170여 페이지라니... 좀 더 많이 알려주어도 좋은데 말야; 하긴 중요한 건 다 알려주었으니 여기서 더 덧붙이는 건 오히려 페이지 수 늘리기 밖에 안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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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혹시나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이 낯선 이들에게 일본 영화 <비밀>의 원작 소설가라고 부연 설명을 덧붙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하고 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비밀>외에도 <게임의 이름은 유괴> <호숫가 살인사건> <레몬 : 分身>등의 작품을 썼는데,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상당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유명 작가다. (거기에는 출중한 외모도 한 몫 한다는 소문이다. 미중년 소설가라나 어쨌다나.. 하긴 사진으로만 봐도 알 수 있긴 하더라;) 어쨌거나 그런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단연 <백야행>일 것이다. 이 책은 에도가와 람포상,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을 휩쓴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완성시킨 작품이라고 소개글은 설명하고 있다. 명성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 굳이 저런 광고 카피가 없었어도 나는 이 책을 읽었겠지만, 다 읽고난 지금은 저 정도의 카피로는 모자란다고 하고 싶을 만큼 이 책이 주는 여운에 젖어 있다.

<백야행>은 아주 긴 이야기다. 총 3권으로 나누어져있는 만큼 책의 두께도 만만치 않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그 내용이다. <백야행>은 19년이란 세월을 간직한 '서사'다. 그 긴 세월만큼 소설속에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펼쳐지고 독자인 나는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화자는 담담하게 혹은 숨가쁘게 두 주인공, 료지와 유키호를 쫓는다. 그리고 나는... 좀 더 필사적으로 그들을 쫓는다. '하얀 어둠속을 걷는다'는 '백야행'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내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미 심정적으로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범인은 일찌감치 눈치챈 상황에서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유'와 '관계'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끈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정말 단숨에 읽어내려갔지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쾌하지 않다. 이야기의 전말도 알았고 그들의 관계도 알았지만 끝내 료지와 유키호의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년이란 세월동안 집요하게 그들을 찾아 헤매는 사사가키 형사는 '대포새우와 문절망둥이'이야기를 한다. 공생관계에 놓여진 대포새우와 문절망둥이처럼 료지와 유키호도 서로에게서 태양을 구하려 했겠지? 그러나 그 태양은 결코 낮에 뜨는 진정한 태양이 될 수 없었기에, 언제나 밤을 하얗게 비추는 가짜 태양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비추는 자신은 서로에게 그림자처럼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니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나는 애처롭고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인 것을.

나는 앞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을 것 같다. 작년 말에 읽은 <레몬 : 分身>이 이 작가에 대한 흥미를 부추겼다면 <백야행>은 홀딱 반하게 하기에 충분한 소설인 것이다. 스토리 전개에 있어 막힘이 전혀 없는데다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디테일한 묘사가 참으로 매력적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멋드러진 그 필력이 존경스럽다. 올해 초, 히가시노 게이고는 또 다른 작품 -용의자 X의 헌신- 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지. 항간에, 그가 발표하는 작품마다 히트를 친다는 소문이 돈다더니 이건 아예 쐐기를 박는 소식이 아닌가. 이변이 없다면 내가 올해 읽은 미스터리 소설중에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인생을 훔친 여자>와 함께 최고의 소설로 꼽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4개인 이유는?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별 하나를 뺀 것은 순전히 출판사와 역자 탓이다. -_-+
전체적인 번역은 (몇군데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나무랄 데가 없는편이다. 내용 이해에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고, 억지스럽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친절하지는 못하다. 이 정도의 장편을 번역,기획,출판하면 작품에 얽힌 뒷 이야기나 역자 후기 같은게 실리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작품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끝이다. 그런것들이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섭섭하달까. 게다가 이 책은 1997년 1월 부터 1999년 1월까지 문학잡지에 연재되던 연작단편으로, 그것을 모아 손질하여 만든 장편인데 번역본에는 그에 관한 하등의 설명이 없다. 그런 간단한 설명만 있었어도 이 소설의 구성이 왜 이런지 쉽게 납득이 갈텐데...

그래, 그런 것 쯤이야 눈 감아 줄 수 있다. 그런건 말 그대로 출판사의 배려지, 필수 사항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 외에도 심각하다면 심각한 번역적 오류가 세 군데나 눈에 띈다.(갖고 있는 원서와 직접 비교해보았으니 확실하다.)

1) 내용 중 유키호가 'R&A' 혹은 'R&B'라는 부티크를 개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R&A' 혹은 'R&B'라는 가게 이름이 원작에는 'R&Y'라고 나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R&A'나 'R&B'라고 하면 가게 이름이 왜 그런지 쉽게 유추할 수 없지만 'R&Y'라고 하면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의미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바로 료지와 유키호의 영문 이니셜이다. 그것을 유추하게 되면 유키호를 보는 독자의 시각이나 소설 전체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 일본어도 아니고 원작에 버젓이 영문으로 나오는 것을 번역본에서 'R&A' 'R&B'로 쓰다니...아마 교정상의 실수겠지만 독자로서는 영 마음이 편치 않다. 게다가 처음에는 'R&A'였다가 나중에는 'R&B'로 바뀌자 1호점, 2호점에 따라 가게 이름이 바뀌는 줄 알았다는 독자도 있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다.-_-;

2) 중권 259쪽 15째 줄을 보면,

"저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56년인데요."

라는 대사가 나온다.
책을 읽다가 이 부분땜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모른다. 이야기의 시작이 1973년경인데, 어떻게 5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가 있느냐 말이지. 태어나지도 않았을텐데; 이것도 원서와 비교를 해보았는데, 이럴수가! 원서에도 56년이라고 되어 있는게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거지?'하고 곰곰히 생각해봤더니 세상에, 그건 아직 황실이 존재하는 일본에서 사용하는, 그 나라 고유의 연호였던 것이다. 즉, 56년이란 말은 쇼와昭和 56년을 뜻하는 것. (서기로 고치면 1981년이 된다.) 연호사용이 자연스러운 일본인들이야, 앞에 굳이 '쇼와昭和'를 붙이지 않아도 금방 알겠지만, 외국인인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의 연호 체계를 모르는 이상) 그걸 알리 만무하다. 원서에 아무리 달랑 '56년'만 나와있어도, 번역하는 사람이 조금만 센스를 발휘해 주었더라면 서기로 고쳐서 번역할 수 있었을텐데... 참 아쉬운 부분이다.

3) 중권 275쪽 밑에서 5,6째 줄에,

"(생략) 가까이 가면 힘이 방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오로라처럼?"

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건 원작과 굳이 비교해보지 않아도 오역이라는 걸 알았다.
위의 대사를 미루어보아 분명 '오로라Aurora'가 아닌 '오오라Aura'(혹은 아우라) 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작에는 'オーラ'(Aura)라고 되어 있었다.
'오로라Aurora'와 '오오라Aura'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에휴;


뭐, 이러저러한 이유로 하여 별 하나를 뺐긴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별 5개를 꽉 채워 주고 싶은 책인 것은 변함없다. 혹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이런 것들을 꼭 수정, 보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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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신기루 2006-08-1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재밌는 책을 이제서야 읽었네요;; 그래도 밤새서 읽었어요ㅋ
'공생관계에 놓여진 대포새우와 문절망둥이처럼 료지와 유키호도 서로에게서 태양을 구하려 했겠지? 그러나 그 태양은 결코 낮에 뜨는 진정한 태양이 될 수 없었기에, 언제나 밤을 하얗게 비추는 가짜 태양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비추는 자신은 서로에게 그림자처럼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니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나는 애처롭고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인 것을.'
이 부분 정말 감동, 동감이예요 T-T
(이 말 하려고 댓글 쓰는 중.. ^-^;;)
심각한 번역 오류 1번은 정말 화가 나고 2번은 저도 의아했으나 대충 짐작했고 3번은 모르고 그냥 넘어갔네요 아 민망;;
리뷰에 감동받아서 'Thanks to' 날리고 갑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읽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소장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거든요^-^)

다소 2006-08-1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푸른신기루님!!^^
땡스투 날려주시다니 감사해요. 헤헤~
밤 새서 읽으시다니..^^ 그 기분 알 것 같아요. 저도 이 책 읽을때, 완전히 빠져들어서 봤거든요.. 하하. 개정판이 새로 나와주길 바라는데... 별로 기대는 안해요.ㅠㅠ(그래도 쪼꼼~ 희망을!!)

미미달 2007-08-07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정말 꼼꼼하신걸요?
오로라의 경우도 읽으면서 아우라가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그랬군요. -ㅇ-

다소 2007-08-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말고도 일서번역본 중에 '오오라'를 '오로라'로 번역해놓은 책을 종종 봐요.
어감이 좀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의미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만큼 좀 신경 써주면 좋겠는데...ㅠ 참 안타까워요.;

니나 2009-01-06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 R&Y와 R&A/B의 의미는 너무나 다른 거잖아요!!! 럴수 럴수 이럴수가!!!
덕분에 쪼금 더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그런 것이었군요. 후아-
 
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모로 모범적이고 반듯하게 보이는 아이에게도 나름대로의 고민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감수성 예민한 10대라면? 그 고민때문에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뚱뚱한 에바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살'이 콤플렉스다. 보여지는 모습에 자신을 잃은 에바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싫고 어울려 잡담하는 것도 싫다. 몰래 만들어 놓은 '자기 구석'에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만 머릿속은 늘 복잡하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이 쓰이고, 나만의 친구라 생각했던 카롤라가 다른 아이와 웃고 떠드는게 싫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귀는 더욱 쫑긋해져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괜히 비약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집에가면 아빠는 늘 권위적이고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군소리 없이 맞춰준다. 동생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에바는 그 모든 것이 싫다. 그렇게 팽배해진 열등감과 불만은 점점 에바를 구석으로 몰아 넣는다.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건 순간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버터를 잔뜩 바른 마지막 식빵 하나를 입속에 구겨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음식을 탐하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에바는 깜짝 놀란다. 먹는 동안 한없이 기뻤던 마음이 이내 우울해져서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이런 자신이 싫다. 끊임없이 결심하고, 금세 허물어뜨리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누군가가 '의지박약'이라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란 말이야. 배부른 속이 불편해진다.

외모 콤플렉스에서 오는 강도 높은 스트레스, 그로 인한 자학이 정점에 다다를 때쯤 에바는 미헬이라는 한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결국 그와의 있었던 일들이 에바의 내적 문제를 털어버리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고를 전환하게 해주는 버튼 역할이랄까. 자신이 뚱뚱해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친구 카롤라, 자신과는 다른 세상 사람 같았던 아이들, 사사건건 자신을 구속하려는 아빠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에바는 소통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저 눈으로만 보고 판단했던 것들을 직접 피부로 경험하면서 점점 웃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남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었던 것들보다, 나만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에바. 알고보니 자신은 뚱뚱한 에바가 아니라 조금 통통한 에바였고, 외톨이가 아니라 좋은 친구를 가진 행복한 소녀였던 것이다. 이제 에바는 옷을 살 때마다 친구와 함께 즐겁게 쇼핑을 할 것이고, 어두운색 옷이 아니라 밝은 색 옷을 입게 될 것이다. 우울하거나 힘이 들 때마다 엄마가 주신 초콜릿을 씁쓸하게 녹여먹는게 아니라 초콜릿 그 자체의 달콤함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의 전환은 눈에 낀 커다란 눈곱을 떼어내는 기분이다. 갑갑하고 흐릿하니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세상을 깨끗한 시야에 담아내는 기분. 사실 손으로 스윽 한번 문지르면 없어질 것을, 방법을 모른탓에 눈곱을 붙이고 살았던 건지도 모른다. 성장소설은 이래서 좋다. 알고보면 싱겁거나 유치한 고민들을 같이 고민해주고 생각을 환기시킬 수 있게 해 주니까. 이것은 타장르에는 없는 독특한 즐거움이다. 10대들의 고민을 일련의 사건을 통해 들여다 보는 것은 다시 한번 그 때로 돌아가볼 수 있는 '타임머신'같아서 좋다. 책을 읽다보면 나의 그 시절이 생각나서 슬며시 웃게되는데, 이것은 아마 이미 경험한 자로서 내보이는 여유같은 것이겠지? 한번쯤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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