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도 나는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나 역시 가끔 국립중앙박물관 등을 통해 여러 한국 옛 그림을 보아 왔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수 많은 평품을 보면서도 전혀 마음에 와닿는 무언가가 없었다. 그저 멋진 그림이네 딱 이정도 생각 밖에는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은 후에 비로소 옛 그림을 어떻게 읽을 수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만큼 그 책은 우리 문화 안내서로는 최고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오주석의 책을 찾아보기 시작하였고 그 중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책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다. 이 책에는 9명의 화가의 12개의 옛 그림이 담겨 있는데 처음 옛 그림을 만나는 사람이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많은 그림과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는 책이다. 순서대로 김명국의 <달마상>,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윤두서의 <자화상>,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윤두서의 <진단타려도>, 김정희의 <세한도>, 김시의 <동자견려도>, 김홍도의 <씨름>과 <무동>, 이인상의 <설송도>,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담겨 있다.

 

 일단 김명국의 <달마상>에서는 흑색 외에 '색이 없는 이유'에 대해 글쓴이는 설명한다. 불가에서 색(色)은 존재를 가리키고 사물의 존재적 속성의 대명사인 색깔은 정신의 흐름이 치열하게 나타난 달마상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면 수묵화는 채색화가 완숙 단계에 접어든 이후 나타난 것으로 무채색을 통해 순수하고 검소한 내면의 정신적 깊이를 색이 주는 선입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볼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기존에 화려한 원색이 아닌 수묵화가 동양에서 발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색깔을 내는 염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나라가 흰색을 사랑하게 된 이유도 염료가 없기 때문이지 실생활에서 때가 많이 타는 흰색을 많이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주석 선생은 이와 다르게 해석하는데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안견의 명작 <몽유도원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몽유도원도에 대해 아는 것은 오직 안평 대군의 꿈에 나타난 도원을 안견이 그린 그림인데 현재 일본에 있다는 것 정도만 국사 시간을 통해 알고 있었다. 국사 책에 나온 몽유도원도 그림은 너무 작고 흐릿하여 '이것이 왜 이렇게 명작이라고 칭송받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하였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몽유도원도에는 서양의 일점투시도법과 다른 동양의 삼원법, 즉, 고원법(깍아지른 높은 산을 아래서 위로 쳐다본 시각), 심원법(엇비슷한 높이에서 뒷산을 깊게 비껴 본 시각), 평원법(높은 곳에서 아래 쪽은 폭 넓게 조망한 시각)이 골고루 담겼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다만 글쓴이는 "서양의 일점투시는 일견 과학적인 듯 보이지만 카메라 앵글처럼 포용력이 부족한 관찰 방식이며… 동양의 고차원적 인본주의, 즉 회화적으로는 삼원법에 의해서만 충분히 표현된다."라고 이야기한다.(p.81) 이런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사대주의 혹은 서양중심주의도 문제지만 우리 것만 최고라고 여기는 태도 역시 역겹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윤두서의 <자화상>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흔히 이 그림은 극사실로 그려졌지만 귀, 목, 상체도 없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충격적이라고 부를만큼 지나치게 강하고 날카롭기만 했던 느낌을 받게 되었으나 실제 옛 사진 속의 모습에는 유탄(柳炭)으로 상체가 그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미완성작으로 남겨진 이유는 이 후 표구상이 표구하는 과정에서 그림을 문지르다가 지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윤두서의 모습은 얼굴만 남은 강하고 날카로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인자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었다.

 

 이어서 유명한 김정희의 <세한도>를 살펴보자. 사실 세한도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어왔다. 즉, 작품 속의 집은 그 오른편이 보이는데 둥근 창문을 통해 본 벽의 두께가 어째서 왼편에서 바라본 모양으로 되어 있는지와 지붕은 뒤로 갈수록 줄어들어 원근법을 쓴 듯 한데 아래벽은 오히려 뒤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져 역원근법에 가까우며 지붕의 오른편 시선도 앞쪽에 비해 뒤쪽이 훨씬 가파르니 오류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글쓴이는 추사는 <세한도>에 집을 그린 것이 아니라 집으로 상징되는 자기 자신을 그린 것으로 그래서 창이 보이는 전면은 반듯하고, 역원근으로 넓어지는 벽은 듬직하며, 가파른 지붕선은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옛 그림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p.171) 물론 마음으로 보야야 하는 것도 맞지만 뭔가 궁색한 변명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한 글쓴이는 동양 옛 그림을 읽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예로부터 그림 감상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고 하였는바 화첩을 만들어 보관하여 그림 한복판에 세로로 접은 금이 생긴 것이므로 옛 글 읽듯이 즉, 서양처럼 좌상(左上)에서 우하(右下)로 볼 것이 아니라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로 읽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그림을 볼 때에는 오른편으로 돌게 하는 것이 올바른 그림 감상법이라고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이는 굉장히 좋은 정보이다. 이렇게 감상하지 않으면 글쓴이가 지적한대로 예컨대 김홍도의 <주상관매도>를 볼 때 시선이 탁 막히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은 워낙 잘 알려져 있고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라는 책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만 글쓴이가 이야기 하는 '옛 그림 보는 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까 한다. 글쓴이는 옛 그림 보는 방법으로 첫째 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자주 보아야 하며 둘째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는 것을 통해 작품 내용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뜯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물론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실제 박물관 가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고 실제로 묘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옛 그림을 제대로 보기는 요원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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