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책을 읽는 방법 중에는 어떤 한 가지 주제를 잡고 이와 관련된 책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어나가는 방법과 어떤 한 사람을 읽어나가는 방법, 즉 한 글쓴이의 책을 모두 읽어나가는 방법이 있다. 이 책은 독서클럽 인문/사회 1기(지금은 <e-멋진 책세계>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08.11월의 인물로 "서경식" 선생님을 정하고 읽어가는 중에 처음 읽게 된 책이다. 기본적으로 인물을 읽어갈 때도 오래된 책부터 읽어나가면서 글쓴이의 생각과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정석'이기 대문에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게 되었다. 하지만 "서경식"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부담되는 일이었다. e-멋진 책세계로 바뀐 이후 첫 시작을 여는 인물이기도 했지만 독서클럽 인문/사회 2기 분의 메일에는 서경식 선생님의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을 읽고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보다는 젊은이의 호기심과 호승심이 나를 이끌었다. 아직 젊어서 겁이 없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단점이 있는 나는 아무리 내용이 거슬러도 담담히 이 책, 혹은 서경식 선생님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서경식 선생님을 완전히 이해/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 책은 200여쪽 정도로 얇은데다가 책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저 서양미술에 대한 에세이 정도로 보이지 않던가? 그러나 이 책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미술 에세이가 아니었다. 이 책의 제목인 [나의 서양미술순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나"와 "서양미술"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글쓴이 서경식 선생님의 개인적 체험이 많이 소개되어 있으며 불행한 가족사와 접점이 있는 책형도나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있다. 그래서 였을까? 이 책을 읽다보면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가 떠오르고 서경식 선생님의 두 형님과 가족이 겪어야만 했던 아픔이 온전히 나에게도 전달되는 것 같았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를 바로 자신의 형이라고 부른 것(p.60)이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리고 고야의 '모래에 묻히는 개'는 바로 자신이라고 표현(p.110)하는 것은 바로 서경식 자신, 즉 "나"를 서양미술을 통해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압권은 바로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Christ showing his wound)]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두 손의 손가락들을 오른편 옆구리의 상처 속에 집어넣어 그것을 확 열어 보이고 있는 모습이다. 글쎄…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이 책이 바로 [상처를 보여주는 서경식]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 곳곳에 담겨있는 서승, 서준식 형님의 고초와 부모님의 침략자의 나라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과연 그리스도와 서경식 선생님은 이렇게 상처를 보여줌을써 무엇을 알리고자 했던 것인가? 어쨌든 서경식 선생님의 첫 책은 나에게는 그저 무난가헤 다가왔다. 아무리 남의 아픔에 민감한 사람이라도 남의 고통을 그대로 자신이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감정이 메마른 나의 마음을 감싸고 있는 AT필드를 뚫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저 서경식 선생님의 책을 읽고 있으면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희망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역사 앞에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을 다하고 계신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올 뿐이다. 자 이제 다음에 읽을 책은 [소년의 눈물]인데 과연 나에게 어떻게 이 책은 다가올지 기대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