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
크누트 함순 지음, 우종길 옮김 / 창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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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 번역이 되어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축복이었다. 폴 오스터의 산문집을 읽기 전까지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다. 막상 책을 읽으니 너무나도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그는 도대체 왜 굶는 것일까? 왜 도시 구석구석을 헤매며 거지처럼 살면서도 글을 쓰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일까? 어떤 종류의 책은 읽는 이를 부끄럽게 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읽는 내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때문에 밥을 먹고 사는가 하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번역의 오류, 편집의 오류가 눈에 들어 오지만 그런 사소한 잘못보다는 이 책 자체가 있다는 것이 더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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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쳐까지
마크 애론슨 지음, 장석봉 옮김 / 이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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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골랐을 때 솔직히 내 마음은 반반이었다.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반, 그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반이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 내 마음은 몹시 흥분해 있다. 그렇다, 만족도, 불만족도 아니고 흥분해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도발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방가르드, 그렇다. 전위라고는 하지만 이리 닳고 닳아 효용성을 잃은 말이다. 저자의 말대로 요즈음 세상에 전위 아닌 게 어디 있는가? 모두가 전위인 세상에 따로 전위라는 말을 쓰는 것은 바보짓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요즈음의 전위가 진정한 전위인가? 현란한 광고, 아름다운 뮤직 비디오, 그러한 이 시대의 전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세상의 찰라성에 대해 의미를 던져준다고 할 수 있겠다. 잠시 잠깐의 의미,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는 의미가 이 세상의 전부라는 의미.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으로 우리 이전의 시대가 몸을 바쳐가며 싸워왔던 전위의 의미와 같은 값을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위에는 도발, 그리고 전복의 의미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 정부에 투항한 게릴라가 더 이상 게릴라가 아닌 것처럼 시대의 원하는 바를 따르는 전위, 전복하지 못하는 전위라면 더 이상 전위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위의 의미를 망친 최초의 예술가는 앤디 워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모든 잘못을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이용하여 표현했을 뿐이다. 예술이란 사실 그렇다. 쓸모없는 것, 그러니 그것을 좀 쓸모있게 이용했다고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씁쓸한 일이다. 진정한 전위란 과연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 이 시대에 전위가 필요한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요구하는 자들은 누구인지. 현란한 판타지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진정한 판타지는 없다. 전위, 우리에겐 아직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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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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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때 폴 오스터라는 이름만으로도 책을 사던 시절이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새 소설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마존에 들러 번역되지 않은 영어책들까지 모두 사던 때가 있었다. 미스터 버티고, 리바이어던 등등. 그의 소설들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한 인간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보여주면서도 마법적인 환상성과 삶의 비의를 놓치지 않는 그의 재능에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폐허의 도시>는 좀 묘하다. 그의 다른 소설들과 맞닿아 있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 소설의 설정은 지극히 폴 오스트적이다. 가상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도시가 등장하고 그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 등장한다(우연의 음악이 생각나는군).

하지만 거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의 전작들과는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좀 조작된 냄새가 짙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까 글의 번역된 순서대로 볼 오스터의 소설적 이력을 작성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폴 오스터의 앞날을 예고해주는 일종의 시금석과도 같다. 탐정 소설에 탐닉해 있던 그는 이 소설을 계기로 완변하게 자신의 길을 찾은 듯하다. 부럽다. 자기만의 색채를 지닌다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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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이삭줍기 3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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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분명 어릴 때 잃었던 이야기다.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 돈을 벌지만 결국 그림자 때문에 고민한다는 이야기. 하도 어릴 때 읽어서 결말이 어떠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게 책을 읽다 마지막을 보는 순간 약간의 허무함이 느껴졌다. 이 이야기의 결론이 정말 이러했던가? 한 마디로 아쉬웠다.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다 맥이 풀리는 기분. 결론을 어떻게 내느냐는 작가의 마음이겠지만 그래도 스릴러, 혹은 공포 영화가 갑자기 교훈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맥이 풀린다. 아무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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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야기 - 위대한 8인의 꿈
노만 F. 캔터 지음, 이종경 외 옮김 / 새물결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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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세 이야기가 좀 더 빨리 나왔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각광을 받았을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여러 미시사 책 때문에 이 책은 별로 돋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미시사를 다룬 책은 아니다. 다만 형식이 유사하다는 것뿐, 내용 상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내가 보기엔 토론 교재로 유용할 것 같다. 대립적인 두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그렇다. 중세라는 넓은 시기에서 이렇듯 정교하게 각 인간의 입장 차이를 잘 정리한 저자의 능력은 굉장하다. 하지만 역시 그 과정에서 저자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기독교적 관점과 페미니즘적인 관점을 너무 많이 고려한 것 같다. 기독교적인 관점은 그러하다해도 페미니즘적인 부분들은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훌륭하신 분이니 맞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토론 중심으로 논쟁을 유발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감은 있다. 제목 또한 중세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중세 논쟁이 더 걸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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