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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쳐까지
마크 애론슨 지음, 장석봉 옮김 / 이후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골랐을 때 솔직히 내 마음은 반반이었다.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반, 그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반이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 내 마음은 몹시 흥분해 있다. 그렇다, 만족도, 불만족도 아니고 흥분해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도발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방가르드, 그렇다. 전위라고는 하지만 이리 닳고 닳아 효용성을 잃은 말이다. 저자의 말대로 요즈음 세상에 전위 아닌 게 어디 있는가? 모두가 전위인 세상에 따로 전위라는 말을 쓰는 것은 바보짓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요즈음의 전위가 진정한 전위인가? 현란한 광고, 아름다운 뮤직 비디오, 그러한 이 시대의 전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세상의 찰라성에 대해 의미를 던져준다고 할 수 있겠다. 잠시 잠깐의 의미,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는 의미가 이 세상의 전부라는 의미.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으로 우리 이전의 시대가 몸을 바쳐가며 싸워왔던 전위의 의미와 같은 값을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위에는 도발, 그리고 전복의 의미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 정부에 투항한 게릴라가 더 이상 게릴라가 아닌 것처럼 시대의 원하는 바를 따르는 전위, 전복하지 못하는 전위라면 더 이상 전위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위의 의미를 망친 최초의 예술가는 앤디 워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모든 잘못을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이용하여 표현했을 뿐이다. 예술이란 사실 그렇다. 쓸모없는 것, 그러니 그것을 좀 쓸모있게 이용했다고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씁쓸한 일이다. 진정한 전위란 과연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 이 시대에 전위가 필요한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요구하는 자들은 누구인지. 현란한 판타지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진정한 판타지는 없다. 전위, 우리에겐 아직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