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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1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힘에서 구하소서.

- 시편 22장 20절





우리는 모두 악(惡)이다


- 돈 위슬로 《개의 힘》-





사람은 누구나 악(惡)을 꿈꾼다. 악은 누구에게나, 또 어디에서나 도사리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의 흉악한 범죄를 신문에서 보게 될 때, 의외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명망 높고 존경 받는 사람들이 어느 날 임신한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식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일삼거나 혹은 알고 보니 뒷세계와 손을 잡고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한다. 사람의 마음이 본래 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그 ‘악’이라는 것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굳이 강력범죄까지 가지 않아도 가볍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 아닐까. 잔소리 많은 직장상사가 아끼는 차를 볼 때마다 못으로 긁어주고 싶고, 걸핏하면 애인 자랑을 늘어놓는 친구의 연애가 잘 안 풀렸으면 좋겠고, 시험 기간이 닥칠 때마다 교무실에서 시험지를 한 번 훔쳐볼까 하고 상상하는 그런 마음. 누구나 ‘악’은 있고, 더러는 그 ‘악’에 매력을 느끼며, ‘악’에 기어이 굴복하기도 한다. 악은 언제나 교묘하게 우리 마음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뒤흔든다. 악, 우리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악(惡).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악’을 두고 성경에서는, 또 돈 위슬로는 이렇게 명명했다.

‘개의 힘’.




「악은 추진력이 있어서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었다. 물리학의 법칙이다. 잠들어 있는 동안은 계속 잠들어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고 있는 몸은 계속 움직이려고 했다.

뭔가가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 2권 p.124





#

<개의 힘>의 주된 주제는 ‘멕시코 마약 전쟁’이다. 이야기는 1975년부터 시작되어 2003년까지 28년간을 다루고 있다. 결코 짧다고만은 볼 수 없는 이 긴 시기는 멕시코와 미국, 또 주변 나라들간의 복잡한 정세가 가히 정점에 올랐던 때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크게 두 맥락으로 나뉜다. 베트남 전쟁을 겪고 멕시코에 파견된 마약단속원 아트 캘러, 한때는 그의 친구였던 아단 바레라와 삼촌인 ‘티오’ 미겔 앙헬 바레라 등으로 대표되는 바레라 가문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멕시코. 그리고 아일랜드 로드에서 자라나 이탈리아계 치미노 조직에 다리 한쪽을 담그게 되는 아일랜드 저격수 션 칼란, 그 주변에 있는 동료들과 그를 끊임없이 종용하는 살 스카키 등으로 소란스러운 뉴욕 등 미국 등지.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나, 같은 사건과 같은 인연들을 공유하며 28년간 벌어진 멕시코 마약 전쟁을 미국과 멕시코의 시점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트는 바레라와 대립하고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마약의 재료들이 어떻게 재배되고 또 어떤 루트로 국경을 넘는지에 대해서 보여주고, 칼란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임무들을 통해 그 마약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난 그 카드로 게임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 1권 p.58



사실 <개의 힘>은 그다지 새로운 스타일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이런 류의, 그러니까 말하자면 암흑가에 정치가 끼어들고 암투와 갖은 모략들이 판치며 글을 읽는 내내 뇌 한쪽에서는 동류의 영화를 통해 답습되어 있는 총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좀 더 눈치가 빠르면 엔딩까지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범죄 소설을 너무나 많이 읽어왔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무엇이 있었고, 그 두 나라가 어떤 것을 교환했으며 그 결과로 어떤 것을 두 나라가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이 사건을 전부 조사하지 않더라도 예측이 가능하다. 두 나라간의 거대한 마약 시장을 통해 오간 것은 돈과 무기 뿐만이 아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냉전의 시대였고, 미국은 자신들과 국경이 딱 맞붙은 멕시코에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이념이 끼어드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고 (쉽게 말해 소련의 ‘끄나풀’이 발밑에 놓이는 게 싫었던 거다.) 그를 막기 위해 미국은 멕시코를 상대로 무엇이건, 정말 어떤 일이건 했다. (이 정도는 우리가 당사자가 아니어도,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우리도 비슷한 시대적 요구에 희생당한 과거가 있으니까.) 



「“당신들 세금이 이런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 2권 p.474



미국의 입장에선 참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멕시코 정세는 불안했고 (그렇다. 불안했다.) 이 말은 즉 어떤 것이건 종용하고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패한 경찰은 돈만 찔러주면 상대가 미국이건 멕시코의 갱이건 가리지 않고 충성을 다했고, 일급살인자가 국경을 넘는 데에 수많은 도움을 보태주며 심심하면 형식적인 행사에 불과한 마약 단속을 잠깐 벌이기도 했다. 언론은 묻을 것은 묻어버리고 보일 것만 보이는 데에 능했으며, ‘진보’를 부르짖던 정치인들이 암살당하는 것이 대단치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뭔가’ 있었고, 그 흐름을 위해 어떤 거대한 ‘힘’이 투입되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어두운’ 세력들이 현장의 일선에서 이 일을 진행했을 것이라는 것. 따라서 이야기 자체는 신선한 것도, 새롭지도, 또 놀랍고 대단한 폭로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되는 걸까.

아니, 왜 한 순간도 지겹지가 않은 걸까. 어쩌면 이렇게 ‘더럽게’ 재미있는 걸까.




「‘이제 하느님과 나 사이에 단층선이 생겨버렸군.’」 - 1권 p.358



# # #


다 아는 빤한 이야기, 아니, 정정하겠다. 다 알지만 여태껏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던’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뭘까. 그건 어디까지나 작가의 힘이다. 작가인 돈 위슬로는 이미 범죄 및 미스터리 장단편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 등으로 꾸준히 이름을 알려온 사람이다. (보면서 내내 영화로 보고 싶다, 자꾸만 영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그랬다.) 그런데 이 작가, 알고 보면 상당히 심상찮은 이력을 가지고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 로드 아일랜드에서 자랐고, 아프리카 역사를 전공한 후에는 영화관 관리자를 했으며, 결정적으로 뉴욕과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사설 탐정이었단다. 탐정이라니, 세상에. 역시 이런 ‘폭로’에 가까운 디테일한 이야기는 100퍼센트 상상으로만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경험은 돈 위슬로가 전업작가로 활동하며 상당수의 영화 시나리오를 작업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덕분에 그는 언제나 ‘리얼하며 디테일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트 켈러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분명한 진리가 있다. 전쟁에서는 좋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 2권 p.545



<개의 힘>도 다르지 않다. 총 2권, 결코 얇다고 할 수 없을 두터운 두께의 긴 이야기 속에서도 독자가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야기의 ‘리얼함’에 있다. 읽고 있노라면 대체 어디부터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부터 어디가 허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또 사족이지만, 나는 일부러 개의 힘에서 다뤄지는 사건들에 대해 리서치를 하지 않았다. 칼란이 진짜 인물이라면, 그래서 사진 한 조각이라도 존재한다면 나는 좌절할지도 모른다. 칼란에 대한 나의 환상을 부수지 말아 달라.)



「“젠장, 여러분은 공식적으로는 회사의 방침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우리와 공놀이를 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트럼펫이 울리면, 우리는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지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1권 p.237



<개의 힘>에는 우리마저도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유명한 우루과이 라운드, 또 멕시코시티의 대지진 등이 그것이다. 정치가들이 암살당하고, 수사관이 실종되며 언론에 ‘보도’되던 사건들 역시 모두 팩트다. 돈 위슬로는 그 모든 팩트에 절묘한 상상들을 끼워 넣었다. 언론에서는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 실제 그 정치가를 암살한 세력이라든가 혹은 멕시코와 미국간의 마약 커넥션을 종용했던 인물들의 이름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비어있는 괄호를 채워주듯 등장한다. 그것이 작가의 ‘상상’인지, 혹은 정말 ‘폭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팩트와 픽션이 얽히는데도 놀랍도록 ‘진짜’ 같다는 사실이다. 적절하게 허구가 추가된 팩트, 판타지가 철저하게 제거된 픽션은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서 기능하게 만든다. 멕시코 마약 전쟁에 대해 굳이 알지 못해도, 또 두 나라간의 커넥션에 대해서 알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읽는 데엔 전혀 무리가 없다. 아니, 이 글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억지’ 판타지가 전혀 없다. 그것은 돈 위슬로가 각각의 인물에 대해 충분히 ‘심리’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총이 있을 것이네.”

“저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 상관없어. 신은 자네를 믿거든.”」  

- 1권 p.106




바레라 가문에 대해 기이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아트의 행동도, 또 그토록 냉철하게 일처리를 하면서 한 신부의 죽음으로 고뇌하고 고민하는 칼란의 행동도 이해가지 않는 구석이 없다. 후안 신부와 완벽한 우정을 나누었던 노라, 아픈 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이며 그토록 냉정한 사업가인데도 노라의 문제로는 평정을 깔끔하게 잃어버리는 아단, 아트에게 선의로 다가가 그 입장을 이용하고 어이없는 사건들로 무너지는 티오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몰살당한 가족들의 모습에 실수를 인정하고 괴로워하는 아트도, 또 후안 신부의 죽음 앞에서 소위 ‘멘탈이 붕괴’되어 폐인처럼 지내던 칼란의 태도도, 말씀 따위 개나 주고 저 사람들을 도울 돈과 수단을 강구하라며 욕을 아낌없이 퍼붓는 후안 신부의 태도도, 감금된 상황에서도 예전에 만났던 그 따뜻한 ‘갈색 눈’을 잊지 않고 마음을 주게 되는 노라의 태도도 너무도 인간적이다. 이런 시대에서, 누군가를 숱하게 배신하고 죽이며 사지에 내몰고도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아파한다는 것. 그토록 인정사정 없는 갱이었어도 죽어가는 순간에 제발 형이 나를 죽여달라고 간청하는 라울도, 세상을 호령하다 여자 하나로 어이없이 붙잡혀버린 티오도, 그럼에도 그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고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 티오의 마음도 나는 모두 이해한다. 


그리고 끝끝내 그것에 대해서 인정하며 수용하게 된다. 

우리 마음 속, 어디에나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악(惡), ‘개의 힘’에 관하여.





# # #


사람은 누구나 선하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악하다.


그게 참 아이러니다. 사람 하나 쏴 죽이는 데엔 저렇게나 인정사정이 없으면서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 너무나 좋은 아빠이거나, 혹은 한 여자에 대한 순정으로 가슴 태우는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완벽하게 ‘감정’이 없는, 흔히 말해 ‘사이코패스’로 보이는 인물은 여기에 없다. (심지어 살 스카키도 인간적이다. 베트콩을 죽이는 것을 신의 ‘소명’으로 여기는 그의 광신적인 신앙도 오히려 너무나도 나약한 인물이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하다. ‘신’을 믿는 것으로 자신을 지켜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토록 원하는 신의 품에 안긴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아단과 티오가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꽃을 보내고 집을 마련해주는 태도는 이전까지의 사건들과 맞물려 아이러니하며, 그래서 웃기고, 또 그래서 서글프기까지 하다. 저런 사람들도 호감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아끼는 여자가 다칠까봐 마음을 태우며 조바심을 낸다. 그 점이 우리와 같다. 아니, 어쩌면 그냥 ‘우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삶이 고통을 뜻한다면, 삶은 나쁜 것이리라.

만약 죽음이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면, 죽음은 좋은 것이리라.」 - 1권 p.305




사람은 누구나 선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악을 꿈꾼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해진다고 했던가. 또한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그토록 악해질 수도 있는 모양이다. 나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내 주변을 지킨다는 것. 악은 그 틈을 비집어 우리를 종용한다. <개의 힘>은 그런 것이다.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고 흔드는 그 모든 힘. 그 모든 악.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 번은 올 수 밖에 없는, 너무나도 평범히 만날 수밖에 없는 그 공정하고도 공평한 악, 개의 힘.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모든 '현재', 그 모든 순간 그 자체처럼.





「남자는 현재에 살아. 지금 먹고, 지금 마시고, 지금 눕지. 남자는 다음 끼니도, 다음 술도, 다음 잠자리도 생각하지 않아. 그냥 ‘지금’ 행복한 거지. 여자는 내일을 살아. 이 우둔한 아일랜드 놈아, 좀 알아둬.」 


- 1권 p.407








+ 몇주간 업무 때문에 책 읽을 시간도 없다보니 이제야 겨우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파트장님께 감사 감사 또 감사 T_T 다음 신간리뷰 때엔 이보다는 좀 더 여유롭기를 바라면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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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과 나는 수많은 '끌림'들의 연속이다
- 세라 워터스 <끌림>-




때때로, 사소한 것들이 삶에 생채기를 낸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인생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해는 뜨고, 뜨는 해의 궤적을 따라 당신은 그저 그런 일상 속을 걸어왔을 것이다. 무료한 삶이었다. 늘 가는 곳에 가고, 늘 만나던 사람을 만난다. 항상 새로운 화제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래봐야 전날 봤던 드라마나 야구 경기의 승패, 인터넷을 한바탕 휩쓸고 간 검색어에 대한 이야기, 혹은 최근 이슈가 되는 게임이라든가 일상적인 안부나 인사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누구는 오늘 이혼을 했다더라, 그 드라마는 갈수록 스토리가 이상해진다, 어제도 내 팀은 연패를 끊는 데에 실패했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어제 먹은 파스타는 별로였지, 누구 컴백한다더라, 그래서 너 레벨은 몇이나 찍었냐? 같은 식의. 

어제 만난 사람들과 토시만 조금 달라진 이야기를 또 나누고, 끼니가 되면 밥을 먹고 일을 하며, 때가 되면 잠이 든다. 아마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중 대부분의 날들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그렇게 1주일이 가고 한달이 가며, 1년이 흐르고, 인생이 간다. 

그러다가 문득, 전혀 새로운 것이 가슴을 찔러오는 때가 있다.

어제와 같은 햇살이 오늘은 어딘지 달라진 듯한 그런 기분. 괜한 데서 콧노래가 나고, 연신 터지는 웃음이 주체가 되지 않는 그런 날. 늘 만나는 직장 동료의 물빠진 염색 머리가 오늘은 굉장히 예뻐 보이고, 식사 후에 사무실에서 코를 골아가며 주무시는 부장님도 너그럽게 이해가 가는 그런 순간. 늘어졌던 일상은 어느 순간 변주가 되고, 하루종일 괜히 마음을 설레고 들뜨게 한다. 살다 보면 한 번은 만나는 그런 때, 그런 순간.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당신은 당신 삶을 마구 대해왔어요. 
하지만 이제 제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그래도 그것과 싸울 건가요?
/ p.392



누구나 사랑을 한다. 사랑이란 화두는 언제나 평범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사랑은 평범하지 않다.

세라 워터스의 <끌림>은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
빅토리아 시대, 영국 런던의 밀뱅크.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ㄴ런던 밀뱅크, 테이트 브린튼. 옛날 이 자리에 밀뱅크 교도소가 있었다. (사진 출처 : geograph)


2년 전 아버지를 잃은 마거릿은 평범한, 그러나 평범치 못한 여성이다. 남자를 위해 불편한 드레스 속에 제 몸을 구겨넣는 것보다 오래 된 도서관과 박물관을 떠돌며 책을 읽고 연구를 하는 것을 좋아하고, 혼기를 이미 넘겼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다. 남동생 스티븐은 마거릿의 오랜 친구인 헬런과 결혼했고, 곧 시집을 가는 여동생 프리실라는 집안 곳곳을 헤집으며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다. 온 집안이 프리실라의 결혼으로 들썩거리는 때에 마거릿은 집이 아닌 다른 곳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근교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밀뱅크 교도소였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셜록 홈즈와 왓슨의 이야기로 낯이 익을 밀뱅크 교도소는 런던에서도 가장 험악한 교도소로 이름이 높았다. 보통 성인 남자들도 방문을 꺼릴 그곳에 마거릿은 학문적 호기심을 느끼고 방문한다. 교도소에서는 런던의 '숙녀'인 마거릿이 찾아와 여죄수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그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거릿은 자신의 학문적 호기심, 또 교도소에서 거는 기대감으로 밀뱅크 교도소의 어두운 복도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홀로 어두운 감옥에 웅크리고 앉아 제비꽃을 움켜쥐고 있던, 너무나도 가련한 여인, 셀리나 도스.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꽃을 한 송이 쥐고 있었다. 줄기가 시들어 가는 제비꽃이었다. 
내가 지켜보는동안, 그녀는 꽃을 입에 대고 숨을 불었으며, 그러자 보라색 꽃잎들이 파르르 떨더니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p.45)


셀리나는 독특한 여자다. 그녀는 마거릿이 보아왔던, 그러나 그녀 스스로 별로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들과는 완전히 극적으로 달랐다. 우선 (아마도 귀족일) 마거릿 자신의 신분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으며, 가난하고, 가냘프며, 영혼과 대화하는 '영매'였다. 

그녀가 감옥에 들어오게 된 계기도 독특하다. 본인의 주장을 빌리자면 영혼을 부르던 강신회 중에 영혼으로 인해 '사고'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불확실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보통 사람들은 그녀에게 사기와 폭력죄를 적용시켜 차가운 밀뱅크의 감옥 속에 집어 넣었다. 셀리나는 밀뱅크 내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부류의 수감수였다. 외부와 편지를 주고 받는 대신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영혼 친구들이 준 제비꽃 같은 선물들을 보듬으며 가장 모범적으로 수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마거릿과 만났다. 마거릿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혼돈, 그리고 강렬한 <끌림>을 함께 만나게 된다. 셀리나는 그때 제비꽃을 쥐고 있었다. 이런 감옥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제 막 방금 꽃밭에서 따낸 듯한 생기 넘치는 제비꽃.

마거릿 프라이어의 인생은 그때부터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던 삶이, 그저 건조하게 흘러가던 하루가 일순 생기를 띠며 변화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밀뱅크에 가고,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설렘을 느끼며, 기어이 잡을 수도 없이 셀리나 도스를 향해서 끌려가기 시작한다. 매일 약을 먹지 않고는 잠들 수 없던 2년의 악몽은 용해 되고, 셀리나에 대한 호기심이 그 빈자리를 가득 채워나간다. 

강렬하게 흔들리고 끌려가며, 기어이 사랑이 된다.
시작은 그저 제비꽃이었을 뿐이었는데도.





+
<끌림>의 내용과 설정에 대해서 이런저런 곳에서 말이 많다. 두 주인공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사건과 간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으로 말하자면) 두 주인공들이 '여자'라는 데서 상당한 애로사항이 꽃피는 모양이다. 여자와 여자, 또 남자와 남자. 즉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느 시대이건 간에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불편하게 한다. (예전보다 상당히 융통성있고 탄력적인 시대가 된 지금에도 그렇다. '다수'의 감상은.) 이런 류의 이야기를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백합이라고 일컫던가. 

<끌림>은 분명 연애 소설이다. 그러나 또한, 단순히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라 워터스는 <끌림> 속에 수많은 '관계'들을 풀어놓았다. 사람과 사람, 주인공과 주인공의 연애 이상의 관계들이 글 속에서 촘촘하게 드러난다. 


마거릿과 셀리나의 관계는 일차적으로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말미로 흐를수록 마거릿 혼자만의 일방적인 관계가 되어간다. 마거릿은 셀리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지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적극성을 가지게 된다. 셀리나에 대한 생각으로 일기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그녀에 대해 알기 위해 예전 같으면 관심을 줄 생각도 못했을 영매협회 같은 곳에 찾아가는가 하면 나아가 그녀를 위해 '스스로' 수많은 계획들을 세우고 착실하게 준비해나간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셀리나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영혼을 통해 꽃 등의 선물을 보내지만 그런 행동은 적극적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셀리나가 보내는 선물, 또 마거릿에게 들려주는 위안의 말들을 모두 '마거릿이 원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과 상대와 기분을 주고 받는 것은 다르다. 따져보면 셀리나는 어떤 것도 마거릿과 적극적으로 주고 받지 않는다. 때문에 뒤로 갈수록 마거릿의 사랑은 점점 더 일방통행이 되어가고, 결국 마거릿은 자신의 그 '일방적인 사랑' 속에 갇혀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착각'이라고 한다. 
내가 주는 이 마음을 그 사람도 주고 있을 거라는 착각. 내가 이만큼 사랑하면 당연히 저쪽도 나를 사랑해줄 거라는 착각. 나 혼자만의 마음이 아닐 거라는, 그래서 다소 서글픈 그런 착각.

마거릿이 셀리나에게 끌려가는 이유 또한 흥미롭다. 앞서도 말했듯, 마거릿이 셀리나에 주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제비꽃ㅡ그것도 몹시 생기가 도는ㅡ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셀리나와 제비꽃을 만나기 전까지도 마거릿은 수많은 죄수들을 만났고, 밀뱅크와 그녀들에게 공통적으로 '죽어있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마거릿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감상이기도 하다. 스스로 삶을 한 번 끊으려고 했었고, 자살시도 이후 극적으로 살아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거릿은 살아있지만 죽어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 죽은 아버지를 계속 그리워하고 그 로켓을 목에 걸고 다닌다는 것, 불편한 드레스로 자신을 꾸미지도 않고 좋아하는 장소는 공기가 멈춰 있는 오래된 도서관과 박물관들이다. 이런 것들로 작가는 마거릿의 마음이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것을 다양한 상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아마 마거릿이 밀뱅크를 방문하게 되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리적인 이유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어있는 자신의 삶의 연장이라 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랬는데, 그 죽어있던 밀뱅크에서 '살아있는' 셀리나 도스를 만났다. 생기 넘치는 제비꽃, 그 풍경에서도 청초하고 아름다운 셀리나 도스. 감옥에 들어오며 잘라냈던 셀리나 도스의 머리칼은 여전히 탐스럽고 아름답다. 게다가 셀리나는 영매, 즉 '죽어있는' 혼을 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살아있는 세상' 속으로 옮겨주는 존재다. 마거릿은 실제로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부러워했다. 즉, 그녀의 '생기', '살아있음' 자체에 끌려간 것이다. 죽은 자가 산 자에 미련을 가지듯, 죽음이 삶을 그리워하듯.

이것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과도 닮아있다. 자아, 그리고 자존감을 찾는다는 것. 
여기에는 작가가 왜 하필 빅토리아 시대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할듯 싶다.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했던 1837년부터 1901년까지의 시기가 빅토리아 시대다. 이 시기에 영국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전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의 절정기였고, 덕분에 대영제국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때이기도 했다. 이때의 런던은 하루하루가 달랐다. 자본이 발달했고, 계급이 아닌 '돈'에 의해서 사람들의 서열이 구분되던 시기였다. 돈을 버는 것은 주로 남자들의 몫이었고, 그 때문에 이 시대는 또한 영국 역사상 여성에게 '가장 보수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여성들은 열심히 일하는 남성들을 위해 '불편한 드레스에 몸을 구겨넣는' 것 외에는 할 일도, 역할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많은 여성작가들이 활동하기도 했으나 사회의 주류층은 언제나 남성이었다. 여왕이 집권하던 시대였음에도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보다도 훨씬 보수적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마거릿과 셀리나는 상당히 흥미로운 존재들이다. 런던의 '숙녀'이면서도 마거릿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동생인 프리실라, 또 친구인 헬런은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숙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여자는 예쁘게 자신을 가꾸고 있다가 때가 되면 시집을 가는 것이 이 시대의 풍토였고, 혼기를 훌쩍 넘긴 마거릿은 집안의 골치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마거릿이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사회상을 배반한다면, 셀리나는 그 시대의 종교적 가치관과 과학적인 태도를 전면 부정하는 존재다. 카톨릭을 바탕으로 한 영국국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는 영국에서 '영혼'이란 것은 존재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서구적 가치관에서는 윤회도, 영혼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삶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가게 되고 그 이후는 없다. 그런 가치관 속에서 '영혼'을 불러오는 영매라는 존재는 절대로 사회에서 인정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셀리나를 찾는다. 이는 마거릿의 마음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2년 전에 떠난 아버지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그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마거릿에게 '죽은 영혼'을 다시 불러주는 셀리나는 자신이 갈 수 없는 세계와 연결해주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셀리나는 마거릿을 위해 아버지의 영혼을 불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거릿의 입장에서는 셀리나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돌려주는 존재였다. 셀리나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마거릿에게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을 되돌려준다. 로켓,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자신의 머리카락, 마거릿이 잃어버린 젊음과 과거의 시간들, 그리하여 결국 잃어버린 '자존감'까지도. 마거릿에게 셀리나는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한 자신의 조각, 그 자체는 아니었을런지.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수많은 '나'를 발견한다.
하긴, 따지고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당신의 안에 있는 '나'에게 매료된다.

그토록 숱한 끌림들이 사랑이 된다.
당신이 사랑이 된다.






+
세상 모든 인연은 필연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가 첫눈에 이 마음에 다가와 꽂혔다면, 거기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사소한 습관과 흔적들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난 사람의 작은 흉터를 보고 어릴 때 아끼던 강아지가 내 손에 입힌 상처를 떠올릴 수도 있고, 곁을 스쳐가는 여자의 가방 색깔에서 그 사람이 좋아하던 것들을 떠올릴 수도 있는 일이다. 낯선 여자에게서 떠나버린 그의 향기를 느낀다면, 우린 그 여자가 밉기보다 그 남자가 생각나서 가슴이 괴로울 것이다. 당신의 사소한 습관에서 나, 또는 나의 과거를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끌려간다는 것. 그때부터 우연은 우연이 아니게 된다.
 
나와 당신의 끌림 또한 필연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어떤 호기심에 이끌려 이 글을 열었는가. 여러 계기가 있을 것이다. 그저 지나가다가, 혹은 관심을 가지고 열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건 언제나 계기는 사소하다. 어쩌면 내가 당신의 안에 있는 과거의 어떤 것을 건드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고, 나는 내 글을 읽어줄 당신을 상상하며 일요일 오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다. 이 모든 증거들이 <끌림>이다. 마거릿이 셀리나에게 느낀 끌림. 마거릿이 헬런에게 가졌던 끌림,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끌림, 어머니를 차마 떠나지도 못하는 그 끌림도 모두 필연이다. 수많은 곳에서 우리는 <끌림>을 느낀다. 밀뱅크 교도소 내에서 교도관들이 죄수에게, 죄수가 교도관에게, 교도관이 죄수에게, 죄수가 죄수에게, 혹은 영매가 영혼에게, 영혼이 영매에게, 영매를 보는 손님에게, 그녀를 돌보는 하녀에게도 <끌림>은 존재한다. 그것이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세상 모든 관계는 <끌림> 위에 세워진다.

당신과 나의 인연 또한 끌림이다.
우리는 수많은 끌림들의 연속이다.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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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5월도 저물고 벌써 6월입니다. 6월의 첫주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일년 중 가장 해가 길다는 이 6월, 벌써부터 더위에 지쳐서 이 여름을 어떻게 날까 걱정이 막막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ㅠㅠ..

 달라진 수은주만큼 하루도 부쩍 길어졌습니다.

 이 길고 긴 여름날, 내 마음의 건강을 다독여줄 비타민 하나 복용해보는 건 어떨까요?

 벌써부터 기가 딱~ 질리는 여름을 건강하게 나게 해줄 필승 비법, 이번 달 신간 비타민 3편을 투여합니다 :)

 



2012년 6월,

여름날 소설 신간 비타민 셋


 # 1. 은희경 <태연한 인생>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저서, 문체, 서사 구조, 글의 색감 같은 것은 사족에 불과합니다. 은희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딱 이름 세 글자면 충분할 겁니다. 은희경, 문단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성실한 작가로 잘 알려져있는 그녀가 또 한 번 깊고 풍성한 사색을 한보따리 글줄로 엮어 돌아왔습니다.


은희경의 글은 언제나 쉽습니다. 쉼없이 읽히고 간결하게 던집니다. 때로는 글이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읽혀 고생하며 썼을 작가에게 미안하기까지 합니다. 은희경의 소설은 그게 전부입니다. 많은 것들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대신 말하고, 느끼게 하는 것. 그게 전부지만, 그것이 또한 은희경이 가진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았을까요. 모두가 은희경의 글을 좋아하는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실망하지도 않을 겁니다. 은희경은 그런 소설가입니다.



 # 2. 혼다 테쓰야 <스트로베리 나이트>


 신간페이퍼에 이 책을 골라넣은 계기는 간단합니다. 제목에 끌렸고, 표지에 꽂힌 덕입니다. 제목만 보아서는 어쩐지 달콤한 순정 소설 같고, 표지만 보아서는 몽환적인 느낌의 잔혹동화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토록 예쁘장한 얼굴에 속아서는 곤란합니다. 이 책은 살인사건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 동명의 일본드라마를 통해서 먼저 만나본 분도 계실 테지만요. 


작가인 혼다 테쓰야는 상당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했고, 록밴드 활동을 하다가 소설가가 되었답니다. 2002년 제2회 무 전기소설대상 우수상으로 데뷔하더니 그 다음 해에는 또 호러 서스펜스 대상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시시각각 달라진 인생의 모습만큼 혼다 테쓰야는 장르를 가리지 않습니다. 전기소설, 호러, 추리, 청춘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구사하는 것도 대단한데 내는 책마다 밀리언셀러라니. 소설을 전공했던 입장에서 재능을 타고난다는 말은 인정하지 않지만 확실히 천재는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인 스트로베리 나이트를 기대하게 되는 것은 혼다 테쓰야가 경찰들에게 인정 받은 경찰소설가이기 때문입니다. 현업 형사들마저 감탄하게 했다는 그의 소설을 올 여름엔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 3 . 조너선 프랜즌 <인생수정>


오늘. 한 일간지에 조너선 프랜즌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비둘기가 찍혀있던 묘한 표지가 먼저 떠오르는 <프리덤>으로 한국 서점가를 휩쓸었던 때부터 꼭 1년 후, 그는 소탈한 모습의 기사 사진과 함께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를 꼽으라고 하면, 세 손가락 안에는 그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1년 전미도서상과 제임스 테이트 블랙 메모리얼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프랜즌은 명실공히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타임지에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실렸으니 그 인기와 열풍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꽤 의미있는 소설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인생수정>은 조너선에게 앞서 말한 그 수많은, 이름을 다 말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상들을 안겨주고 그를 대작가로 올려놓은 분수령이 된 작품입니다. 프랜즌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서 문화를 말하고 세계를 말합니다. 프랜즌은 이 글을 쓰기 위해 9년을 쏟아부었다고 하는데요. 그 의미있는 작품을 이제 만날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보는 이의 숨을 콱 막히게 만드는 프랜즌표 거대한 세계가 시작된 지점일 테니까요.


아, 깜박 잊고 말하지 않았는데 오늘 그 기사의 표제는 이와 같습니다. 

'21세기 톨스토이, 항우울제 문학으로 세상을 구원하다.' (*기사 링크)



 # 4. 아이작 아시모프 <영원의 끝>


아이작 아시모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우주'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가 만든 세계는 언제나 우주 속에, 또 과학 속에 있었습니다. 그저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에 불과했던 '우주'를 '이야기'로 만들고 '꿈'으로 만들어준 사람. 수많은 이에게 '우주'를 알려주었던 SF의 아버지, 아이작 아시모프의 장편소설 <영원의 끝>이 우리 곁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영원의 끝>은 이미 출간된지 반 세기가 넘었고, 두 번이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영원'이라는 말로 유추할 수 있듯, 이 책은 시간여행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추격장면은 마치 현대의 추리물처럼 읽힌다ㅡ고 출판사 서평에서 추천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책이 정말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재미있는 사건이나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영원'이라는 개념, 그 개념이 붕괴되고 혼란을 겪으며 '나'를 재확인하게 하는 성찰의 과정.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은 언제나 그런 식입니다. SF라 쓰고 철학이라 읽고 싶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에 뭔가를 묵직하게 남겨놓습니다. 때문일까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로 인해 과학에 뛰어들어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새 소설을 만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소설은 출간되지 않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의 세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게 참 묘합니다. 읽은 글을 다시 읽어도 새롭고, 글을 읽고 가지는 감상도 언제나 다릅니다. 늘 다른 생각들을 가슴에 남겨주는 그의 글은 묘하고 신기합니다. 아시모프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계속 팽창하고 성장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우주처럼. 







+

이번에도 일에 쫓기며 틈틈이 고르다보니 또 네 편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어째 사족이 많아진 듯한 기분이네요. 역시나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ㅠㅠ

그래도 좋아하는 글 이야기를 실컷 할 수 있어서 참 기쁩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또 이런 좋은 기회 주신 분들에게도 참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더위 조심하시구요^^/

조만간 이번 달 신간 리뷰 들고 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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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2-06-05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달찬님. 소설 파트장 헤르메스입니다. 신간 추천 페이퍼 너무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6월의 신간이네요. 신간추천페이퍼는 사실 한 달 전 것, 그러니까 지금은 5월의 신간들을 추천해야 하거든요. 파트장의 임무중 하나가 신간 추천 집계를 하는 것인데 6월의 신간이면 달찬님이 정성스럽게 작성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반영 못하게 되어서 그것이 안타까워 이렇게 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첫 댓글이 이런 글이라 왠지 죄송스럽네요. 파트장이라서 그런지 이런데서도 왠지 책임감을 느끼는군요. 널리 이해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번에 작성하셨던 신간 추천이 5월 것이니 이번의 집계에 그대로 사용해도 될까요?

괴도R 2012-06-05 09:19   좋아요 0 | URL
앗 전혀 몰랐어요 ㅠ ㅠ 무조건 신간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었네요ㅠㅠ 저야 지난 달 써주셔도 상관 없지만 저 때문에 괜히 파트장님이 수고로우신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네요ㅠㅠ 무튼 전 괜찮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달에는 꼭 주의해서 쓰도록 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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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인 일정으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보내다가 첫 미션부터 큰일날 뻔.

어쨌거나, 제대로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에 알라딘 신간평가단 11기, 소설 파트에서 활동하게 된 달찬이라고 합니다 :)


하루가 다르게 수은주는 올라가고, 여름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5월ㅡ

유난히 행사도 많은 가정의 달 5월에는 어떤 소설들이 새롭게 찾아왔을까요?





2012년 5월, 

여름처럼 찾아온 4권의 신간 소설 이야기



 # 1. 알랭 드 보통, 정이현 <사랑의 기초>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와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만난다면? 한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젊은은 남녀 작가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만났습니다. 사랑에 대해 가볍고 유쾌한 성찰로 우리에게 늘 큰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철학소설가, 알랭 드 보통. 그리고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의 작품으로 젊은 층의 큰 공감대를 얻어냈던 정이현. 이미 '사랑'에 관해서는 정평이 나 있는 두 작가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써내렸다는 장편입니다. 알랭 드 보통과 정이현은 어떤 사랑, 또 어떻게 다른 시선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츠지 모토나리와 에쿠니 카오리가 연애하는 기분으로 써내렸다는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가슴을 뜨겁게 해줄 연애 소설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 2. 메도루마 슌 <물방울>


메도루마 슌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른 유명한 일본 소설가들의 이름에 비한다면, 이 작가의 작품은 다소 생소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수상한 아쿠타가와 상의 무게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묻혀있던 고전도 기가 막히게 뽑아내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92번째 소설은 바로 이 책입니다. 메도루마 슌이 아쿠타가와상 수상했던 표제작 <물방울>을 비롯하여 <바람 소리> <오키나와 북 리뷰>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직 메도루마 슌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작가, 제목을 참 예쁘게 뽑아내는 것 같습니다. 예쁜 제목만큼 문체 역시 색채감이 창 풍성하다고 하는데요. 무엇보다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지는 오키나와의 풍경이 이 소설이 가진 최고의 매력이라고 합니다. 한 권을 읽고 나면 오키나와의 말간 하늘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그런 소설이 되지 않을까요. 이 역시도 이번 달 기대 소설 중 하나입니다 :)



  # 3. 모리스 르블랑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


흔히들 추리 소설은 사람을 타고 취향을 타는 장르 문학으로 분류를 합니다. 하지만 취향도 아니고 굳이 추리소설을 즐기는 것이 아니어도 뤼팽, 즉 흔히들 말하는 '루팡'에 대해선 많이들 알고 있을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추리소설을 가끔 즐겨보는 저에게도 이 이름은 너무나 낯이 익고 대단합니다. 

세계 모든 괴도들의 아버지, 괴도 전설의 창시자! 아르센 뤼팽의 새로운 시리즈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더 이상 읽을 뤼팽 시리즈가 없어서 읽던 책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울고 있던 매니아들에겐 정말 희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원작자인 모리스 르블랑이 발표하지 않았던 유작이라고 하는데요. 무엇보다 팬들을 설레게 하는 것은 이것이 뤼팽 시리즈의 유일무이한 '로맨스'라는 사실입니다. 아르센 뤼팽의 이름으로 만나는 마지막 모험, 또 마지막 사랑. 서서히 달아오르는 이 5월에는 이 멋진 괴도 손님과 함께 오후를 보내보는 게 어떨까요:) 역시 이번 달 신간 기대작입니다.



  # 4. 조정래 <외면하는 벽>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쪽이 묵직해지는 이 작품들은 모두 조정래씨의 소설입니다. 수많은 명작들을 창작한 조정래 소설가는 문학계의 거성이나 거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듯 싶은데요. 이토록 대단한 대작가에게도 문장 하나하나에 쩔쩔매고 땀을 빼던 습작생, 또 청년 작가 시절이 있었을 겁니다.

<외면하는 벽>은 작가 조정래의 청년 시절 소설들을 모아둔 작품집입니다. 이미 1999년에 조정래 문학전집에서 <마술의 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이 이번에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전 작품들의 옷을 갈아 입히고 문장을 다듬어서 다시 읽는다는 것은 새 작품을 읽는 재미 못지 않습니다. 똑같은 글이지만 세상에 나왔던 70년대, 또 소설집으로 출간된 90년대 세기말은 분명히 다른 느낌으로 읽혔을 겁니다. 2012년에 새롭게 개정되어 나오는 <외면하는 벽>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종이는 낡아도 작품의 가치는 변하지 않고, 좋은 문장은 시대와 상관없이 독자의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때 느낀 그 감동을 기대하며, 이번 달 신간 기대작에 올려봅니다.





나름대로 글을 꼼꼼하게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어떻게 읽혀졌는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닥치는대로 읽고 닥치는대로 책을 사서 모으는 재주 밖에는 없는 사람입니다. 혼자서 들춰보던 책장을 이렇게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정말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

지금까지 달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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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제정신 - 우리는 늘 착각 속에 산다
허태균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착각에 대한 유쾌한 즐거움. 가식 없고 빤하지 않은 심리학 에세이는 언제나 유쾌하다. 일상적인 '착각'들을 심리적인 해석으로 풀어냈다. 내가 착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착각이다. 하지만 착각은 신이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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