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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이제는 제법 밤바람이 서늘한 가을입니다 :)

본격적인 독서의 계절을 맞아 즐거운 마음으로 두 권의 책 추천합니다.



2012년 9월,

가을날 신간 비타민, 둘




하루                                                       

박성원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 2012-08-08


그물코처럼 촘촘히 짜인 세상에서 완벽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가 나 자신의 상실에 관한 문제여도 마찬가지라는 주제로 쓰인 박성원 작가의 신작 소설집은 이전 작품집에서 펼쳤던 작품세계의 ‘일상’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작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에서 SF적인 상상력과 낯설게 바라본 일상의 모습에 주목했던 작가는 이번 작품집에서 평범한 일상의 이면에 숨은 진실들을 간파해냅니다. 등장인물이 ‘어느 날’이라는 불특정한 일상의 한 지점에서 무언가를 잃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덩달아 상실하게 되는 작가 특유의 이야기는 여전히 강한 흡인력을 가집니다.


박성원 작가는 전형적인 예술가형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알려졌지만 일상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평가는 작가가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서 애쓰는 탐구자적 측면과 낯선 시선 때문에 생겨났다고 보입니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얼룩’은 2010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시선 속에서 일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며 전작들 보다 일상적인 시선에 정박해 그 이면을 바라보고 현실과 재구성합니다. 시작도 끝도 불분명한 기묘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정말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박성원 작가의 신작 소설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클레이튼 로슨 (지은이) | 장경현 (옮긴이)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08-28


인식이라는 것은 밀실과도 같아서 어떤 생각도 사방의 벽에 가로막혀 버립니다. 이런 벽 속에 갇힌 독자를 탈출시키는 것이 바로 마술사의 역할이지요. 그 유명한 셜록 홈즈에서 앨러리 퀸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의 마술사들은 수많은 방 속에서 독자를 탈출시켜왔는데요. 이번 작품에는 진짜 마술사가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한다는군요. 마술사이자 아마추어 탐정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희생자부터 용의자, 그리고 탐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이 마술사로 구성되어서 한바탕 난장판을 벌일 모양입니다. 밀실살인이라는 추리소설의 클리셰 속에서 밀실트릭의 전문가들인 마술사들이 어떤 장난질을 칠지가 이 소설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은 역대 10대 걸작 밀실 미스테리 소설로 꼽힌다고 하는데요. 일러스트레이터에서 잡지 편집장/편집인을 거친데다 미국추리작가협회의 창립 멤버이자 영국추리작가협회의 멤버로 활동한 작가 클레이튼 로슨은 프로 마술가로도 왕성하고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 묘한 이력을 바탕으로 마술사 탐정 그레이트 멀리니 시리즈를 창조했고 이 작품은 시리즈의 첫 작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과연 진짜 마술사는 어떤 마술로 인식의 단단한 벽을 날려버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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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을 스치는 바람〉
 
 

 
모든 변화는 글에서 시작되었다.  / 1권, 213쪽
 

이따금, 나는 한 섬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난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섬을 떠올리고, 그 섬을 이야기한다.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섬을 찾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섬을 위해 노력하고, 그 섬을 알리고 그 섬을 노래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고 관심을 주는 데도 그 섬의 이름은 외롭다. 바다에 저 홀로 떠 있는 섬이라 이름마저 외로운 그 섬, 독도(獨島). 

 
2년 전, 나는 독도에 간 일이 있다. 나에게 외로울 ‘독’의 한자를 처음으로 읽고 쓰게 해주었던 동해의 그 작은 섬에 갔던 것은 순전히 일 때문이었다. 새벽 3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한숨도 편히 자지 못한 채로 묵호, 울릉도, 또 독도까지 달려가는 제법 힘겨운 여정이었다. 공장 같은 식당에서 기계처럼 밥을 먹고, 울렁울렁 울렁대는 울릉도의 험한 바다를 뚫고, 나를 맞던 갈매기들에게 인사하며 독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유난히도 독했던 멀미약에 일행들 모두가 잠에 빠진 그 시간, 난 선실에서 행여 언제 나타날지 모를 그 섬의 첫 모습을 숨죽여 기다렸다. 파도는 높았지만 날은 맑았고, 선창은 이윽고 기다리던 그 섬의 모습을 내게 드러냈다.
거기에 있었다. 홀로 고고히 찬란하던 그 섬. 나는 그곳에서 고작 30분의 입도 시간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그 찬연한 고요함을 만났다. 깊고 푸른 동해에 감싸인 채, 세상 그 어떤 어둠에도 먹히지 않던 그 푸르디푸른 섬. 그래서 괜히 울컥했던, 괜스레 짠했던, 그리고 어쩐지 참 미안했던 그 작지만 아름다웠던 섬.
 
그때, 나는 어떤 시인에 대해 생각했다.
 
그 섬을 닮은 시인이 있었다. 망망대해와 다름없던 시대를 부유하면서도 저 홀로 고고하던, 저 홀로 찬란히 푸르던 그런 시인.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헤던 그런 시인. 무에 그리 부끄러웠는지 시시때때로 마음의 볼을 붉히던 시인은 그 별을 다 헤지도 못하고 떠났다. 그리 하염없이 세던 별들을 한아름 남겨둔 채로. 
시대는 그를 히라누마 도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윤동주라 기억한다. 우리 가슴에 수많은 별을 남겼던,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 


이 책은 그 시인에 대한 이야기다.
 
 
“네 시가 조선어건 일본어건 상관없어. 그건 조선어나 일본어가 아니라 너 자신의 언어니까.” / 1권, 272쪽
 
 
우리는 윤동주를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윤동주에 대해 잘 모른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서시〉,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를 낭송해본 기억이 있을 테다. 우린 그의 시를 읽었고, 그의 시를 배웠다. 하지만 우리는 윤동주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 연희전문학교를 나왔던 그가 어떻게 일본으로 넘어갔고, 어떤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는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육사나 이상의 마지막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더욱.
우리가 그의 시를 아는만큼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윤동주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추측’과 ‘소문’으로만 존재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해방까지 반년을 남겨놓고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병을 얻었다더라, 강제 노역이 고되 죽었다더라, 고문을 당했다더라 등 그의 죽음에 대해선 수많은 추측들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많이 따라 다녔던 소문은 ‘생체실험’, 즉 ‘마루타’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정체 모를 주사를 맞고 심신이 쇠약해져 죽었다는 것. 그것은 이제 정설이다. 하지만 윤동주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연유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윤동주는 대체 왜 생체실험의 대상자로 지목되었고,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에 역사가 주는 정보는 단편적이고 허술하다. 
역사의 빈 틈에 의문을 가질 때,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다. 이를 두고 팩션(Faction)이라 하던가. 비어있는 틈새를 메우며 토대를 세우고 이야기는 새롭게 태어난다. 기존에 주어져 있는 단편적인 정보를 토대로 서사가 세워지며, 마침내 이야기는 사라져버린 윤동주의 생애 마지막 1년을 복원해낸다. 
 
 
증오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국가와 체제는 책을 두려워했고 책과 불화했다. 책 때문에 나라는 망하고 군주는 쫓겨났으며 귀족들은 망명했다. / 1권, 63쪽
 
 
이야기는 히라누마 도주, 즉 윤동주를 관찰하는 일본인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교토대 문과부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징집된 와타나베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배속 되고, 소장의 직접 지시로 선임 간수였던 스기야마 도잔의 살해 사건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살해된 스기야마는 형무소로 전달되는 모든 문서, 죄수들의 서간 전반 등을 조사하던 검열관이었고 동시에 모든 조선죄수들이 치를 떨던 폭력 간수이기도 했다. 와타나베는 스기야마가 남긴 압수물 등을 조사하며 그의 죽음 주변에 존재하는 조선인 죄수들 몇몇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최치수는 조선인 죄수들 사이의 실질적 보스다. 그러나 와타나베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런 살인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저 허약하고 파리해보이는 조선인 죄수였다. 수인 번호 645번, 히라누마 도주. 조선 이름 윤동주. 스기야마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시를 쓴 그는 시인이었다.
 
 
“이름은 한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은 상징이에요. 한 사람의 얼굴과 눈빛과 몸집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기억과 꿈과 그리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담겨 있죠. 하나의 단어가 수많은 느낌을 담고, 한 줄의 문장이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요.” / 1권 , 218쪽
 
 
와타나베는 히라누마를 향해 완강히 저항한다. 총 2권에 이르는 짧지 않은 분량의 글이 진행되는 내내 와타나베는 버티고, 저항하고, 끝내 무너지며 굴복한다. 첫 순간부터 와타나베는 히라누마를 격렬히 경계하지만 몇 겹으로 쌓아올렸던 방벽은 우스울 정도로 간단히 무너진다. 경계하고 감시하던 입장에 있던 와타나베는 스기야마의 죽음을 조사하고, 히라누마 도주를 알아가면서 점점 그와의 대화에 심취 되고 끌려간다. 와타나베는 조선인 죄수들이 부르는 〈히브리 노예의 합창〉을 듣고 싶다는 히라누마를 위해 의무조치 일정을 바꿔주고, 그를 히라누마 도주가 아닌 ‘윤동주’로 부르며, 끝내 스러진 그의 죽음에 아파하고 자책한다. 자신이 되짚어가던 스기야마 도잔처럼 와타나베 역시 불가항력처럼 윤동주에 매료되며 그에게 감화된다. 

윤동주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폭력을 쓴 것도, 회유책을 쓴 것도 아니었다. 겉으로는 치료를 가장하면서 실상은 그 몸에 피가 아닌 식염수를 주사하는 생체 실험을 하는 그런 거짓도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제국을 위해서, 혹은 이 시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도 없었다. 그는 시를 썼고, 책을 읽었으며, 이따금은 연을 날렸다. 그는 그저 시인이었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든 활자는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은 바이러스처럼 읽는 사람을 감염시킨다. 독서는 치명적인 중독이고 문장의 세례를 받은 자는 평생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2권, P. 65
 
 
이따금 사소한 것들이 많은 것들을 바꿀 때가 있다. 변화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아무 것도 아닐 글, 아무 것도 아닐 노래. 하지만 〈히브리 노예의 합창〉은 노래를 부르던 조선인 죄수들의 가슴에 잊지 못할 것들을 새겨넣었고, 윤동주의 시구는 그를 감시하며 지켜보던 일본인 간수의 마음까지 감화시킨다. 
따지고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언제나 한 줄의 글이다. 와타나베를 전쟁으로 내몰았던 것도, 윤동주를 이 차가운 후쿠오카 형무소에 밀어 넣었던 것도 글이었다. 하지만 와타나베에게 잊었던 유년을 되돌이켜 주었던 것도, 폭력간수였던 스기야마가 피아노를 조율하고 시를 쓰게 했던 것도,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윤동주를 지켜냈던 것도 결국엔 글이었다. 고작 글 몇 자, 고작 글 한 줄. 그 글로 글 속의 수많은 이들은 절망을 이겨낸다. 누구나 절망 앞에서는 똑같은 것처럼, 글로 절망을 견뎌내는 데에도 계급과 국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간수도 죄수도, 또 전쟁을 일으킨 자도 침략을 당하는 자도 똑같이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그 절망을 견뎌낼 희망을 간절하게 소원한다. 
스기야마, 와타나베, 또 윤동주. 세 사람은 어쩌면 모두 같은 상처를 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안긴 생채기, 시대가 삭제했던 마음들. 그래서 그들은 읽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다. 시대는 그들에게 사소한 인사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하도록 봉해버렸다. 아침 노을을 보면서도, 불어가는 실바람을 느끼면서도,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면서도 좋다는 말 한 마디 못하던 시대. 새의 지저귐을 노래하지 못하고, 사랑의 기쁨을 나눌 수 없던 시절. 그래서, 그들에겐 ‘글’이 필요했다. 사랑해줄, 꿈꿔줄, 위로를 건네주며 이 헐벗은 영혼들을 매만져줄 그런 ‘글’.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 썼다 해도 그것은 기법적 의미의 ‘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별을 헤아렸다. 밤이 지새도록 헤아리고 또 헤아린 별들은 이윽고 모든 상처 위에 쏟아졌다. 간수들의 상처에, 죄수들의 상처에 찬란히 쏟아지던 별. 그 별. 그가 그토록 온 마음을 다해 헤아렸던 별, 그 별, 고요히 빛나던 그 처연한 별.
 
그리고 그는 별이 되었다. 시가 되었다.
 


 
나는 그를 잃어야 하는 것이 분했다. 그를 잃어야 할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였다. 나는 친구를 잃어야 하겠지만 조선인 죄수들은 현명한 동료를, 간수장은 용서를 빌 대상을, 간수들은 온화한 모범수를 잃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조선인들은 위대한 스승을 잃을 것이고, 태어나지 않은 일본인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증언할 지식인을 잃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순결한 시인을 잃어야 할 것이다. / 2권, 240쪽 

 
 
시대가 변했다. 윤동주가 떠난 때로부터 벌써 근 1세기가 흘렀고, 그 사이 우리는 광복을 맞았다.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나라가 반 토막이 났고, 절반이 된 국토에서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고, 터널보다 컴컴했던 시절을 견뎌내며 밀레니엄을 넘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름조차 생소한 동방의 작은 나라였던 우린 그 사이에 올림픽과 월드컵을 열었고, 세계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시끄럽다. 내 땅, 내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당연한 내 나라 섬을 두고 옆 나라에선 연일 분쟁을 걸어오고 이제 곧 재판소에 보낼 거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과거청산도 뭐 하나 이뤄진 것이 없다. 사형을 기다리던 전범들은 종신형으로 감형되거나, 그마저도 흐지부지 되었고 자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숨을 거두고는 제 나라 사당에 이름을 걸어두고 신으로 대접받는다. 당연히 존재하는 역사적인 증거들과 피해자들을 두고도, ‘위안부는 자발적 징용의 증거였다’며 오리발을 내민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제법 시선이 달라지긴 했다. 자기 나라의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부끄러워하는 교수들의 모임이 생겨나고, 정신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초대 받아 아픔을 함께 노래하는 일본 밴드가 있으며, 이 나라에 아무 연고가 없으면서도 독도 활동에 조용히 도움을 보태는 일본인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보다 사소하게, 조용히, 그러나 조금씩 세상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당장 오늘 내일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10년 뒤가 될지, 100년 뒤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런 날도 올 것이다. 그때의 고통에 더 이상 아파하는 사람이 없게 되는 그런 날. 
 
그날을 위해 바다 위의 외로운 섬은 오늘도 고요히 바람을 맞는다. 그처럼 푸르렀던 시인처럼 고요히 그 바람을 안고 있을 것이다. 
그 바람을, 하늘을, 별을. 그리하여 이윽고 시(詩)를. 
별을 스치는 수많은 바람들을. 
우리의 염원들을.

 
 
싸움에서 이겼으니 이 연은 네가 가져도 좋아. 하지만 우리는 또 새 연을 만들 거란다. 내일 너의 푸른 연과 맞서기 위해서지. 우린 어쩌면 내일은 너의 푸른 연을 가질 수 있을 거야. 내일은 우리가 이길 거니까. 어쩌면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 2권,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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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을 위하여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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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많았던 〈N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때는 분명, 모두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를 희생해도 좋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p.65)
 
 
사랑에도 신호는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랑을 하게 되는 순간, 사랑에 빠지는 그 모든 순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더러는 사랑을 병에도 비유하던데, 그렇다면 사랑에도 징후가 있는 걸까. 징후가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한때 내 주변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주었다면, 또 사랑해주었다면 그것을 그때 알아차릴 수 있었기를. 그런다고 해서 없던 애인이 생기거나, 지금 있는 애인과 헤어지게 되는 것도 아니면서 가끔은 그런 것들을 상상하고 바랄 때가 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었던 사실을 내가 조금 더 알 수 있었더라면. 저 사람의 마음을 내가 알았더라면. ‘사랑’이란 감정에 좀 더 확실한 징후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그토록 많은 것들을 스쳐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맺어지지 않는 사랑은 언제나 아쉽다. 그것이 나의 경험이건, 또 다른 사람의 일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서도 우리는 엇갈리는 사랑에 아쉬움을 느낀다. 어떻게 보아도 사랑인데 맺어지지 않는 연인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나도 한 번은 그런 경험이 있었을지 모른다. 누군가를 짝사랑해본 적도 있었고, 그 사람과 행복한 때를 꿈꿔보기도 했고, 그러다 마음을 접겠노라 다짐하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사랑에 있는대로 끙끙대며 아파했을 그런 날들. 그때라면 누구라도 마음으로 기원하게 된다. 저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건 다 해줄 텐데, 저 하늘의 별도 따줄 수 있을 텐데. 저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아주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그때는 있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었던 그때. 
여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 N들이 있다. N을 위하여, N에게 바치는 그 모든 것들. 이것은 N의 사랑이다. N의 인생이다. N이다.
 
 
“…공유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상대의 죄를 절반 짊어지는 거야. 아무도, 그러니까 상대도 모르게 죄를 떠안고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 (p.154)


 
'N을 위하여'는 그 제목에 걸맞게 수많은 N들의 이야기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이름 속엔 모두 공통적으로 N이 들어간다. 스기시타 노조미, 안도 노조미, 니시자키 마사토, 나루세 신지. 또 노구치 다카히로, 노구치 나오코. 게다가 들장미 하우스의 주인인 노하라 할아버지까지. 이 N들은 저마다 서로와 조금씩 관련이 있으며, 크고 작게 서로를 향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들장미 하우스의 주민인 스기시타 노조미, 안도 노조미, 니시자키 마사토와 노하라 할아버지. 스기시타의 동창인 나루세, 안도의 직장 상사인 노구치, 그의 부인인 나오코. 
 
N은 N을 사랑한다. 허나 이 모든 관계는 일방적이다. 소설의 첫 시작이 일방적인 ‘진술’의 형식이듯, 그들의 관계 역시 그렇다. 이토록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어떤 N은 죽었고, 어떤 N은 죽였으며, 어떤 N은 묵인하고, 또 어떤 N은 거짓말을 하며 모른 척을 한다. 그리고 소설 속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N을 위한’ 것들이다. N을 위해 그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거나, 혹은 그 죄를 대신 뒤집어 쓰지만 끝까지 누구도 말은 하지 않는다. N이 N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은.
 

행위와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한 쌍인 것일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뒤늦게 이유를 늘어놓아 봐야 사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동기다, 경위다, 이유다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p.247)


 

작가의 말처럼, 이 글은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이며 동시에 N들의 사소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사랑을 대전제로 말하고는 있으나, 그 속에는 N들이 이 세계를 대하는 모든 방식들이 담겨 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스기시타는 누구보다 자립심이 강하지만 높은 곳으로 올려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장기를 배우는 것으로 자신의 의존적인 부분을 드러낸다.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안도는 스스로 그녀를 ‘높은 곳으로’ 올려줄 수 있는 입장임에도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노구치를 경멸하고, 스기시타의 우울했던 십대 시절에 유일한 희망이 되었던 나루세는 남들 다 부러워하는 명문대를 다니면서도 면접에 족족 실패하며 인생의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니시자키는 ‘스스로’ 글을 쓰기 위해 부자들의 높다란 상아탑에서 ‘들장미 하우스’로 내려왔고, 모든 걸 다 가지고도 ‘뭔가를 가지고 싶어하는’ 스기시타에게 질투를 느끼던 나오코는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는 남편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고급 맨션에서 성공적인 삶과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노구치는 부하에게 장기를 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거기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보장되어 있는데도 들장미 하우스를 오래도록 지키며 떠나지 않는 노하라 할아버지까지. 
 
 
성공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5퍼센트의 재능과 95퍼센트의 노력, 갈고닦은 능력을 무기로 어떤 상황에서도 정면 돌파한다. 능력이 부족한 주위의 인간들은 모두 자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발판이며, 노력을 아끼지 않는 자만이 그 발판을 자유롭게 조종하면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런 인간이 되고 싶었다. (p.146)
 

 
N들이 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답답하다 못해 미련스럽기까지 하다. 대체 왜,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나은 대안들이 많았는데도 N들은 고집스럽게 그 자리를 지켜낸다. 
나루세, 또 안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스기시타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구원이었던 나루세에게 가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을 ‘높은 곳으로 올려줄’ 안도의 손도 잡지 않았던 스기시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올곧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 모습은 나오코의 태도와도 상당히 유사하다. 자신에게 ‘위안’이 되었던 니시자키의 손을 결코 잡아주지 않고 끝내 위험한 결말에 이르고야 말았던 나오코. 스기시타는 나오코의 모습에서 평생에 걸쳐 벗어나고 싶어했던 자신의 ‘엄마’를 수시로 떠올린다. 그러나 N으로서 N을 사랑하는 스기시타는 놀랍도록 나오코와 또 자신의 엄마와 유사하다. 집에서 도망쳤지만 결국 자신이 쓴 소설 속 ‘새’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니시자키도. 
 
 
문학의 세계가 필요 없는 게 아니다. 가공의 세계에 빠져들 만큼 마음이 한가롭지 않을 뿐이다. 책을 읽어 본들 배는 불러지지 않는다. 눈앞에 책 더미가 쌓여 있다 한들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냉장고 안에 먹을거리가 충분했으면 좋겠다.
(p.216)

 
 
그리하여 자신의 N을 위해, N은 선택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N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위해 선택한 것 뿐이다. 모든 N들은 모든 N에 의해 행위한다. 때문에 N은 N이며, 너는 나이고, 나는 당신이다. 내가 사는 이 세계가 나이고, 내가 이 세계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이너스끼리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면 플러스가 된다는 것은 마이너스 인간만이 알 수 있다. (p.282)
 

 
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N의 이야기이며, 그것은 또한 인생이기도 하다. 온전히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 가능하기는 할까. N에게는 N이 있고, 그것은 우리의 인생과도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인간이란 타인 없이 살아갈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타인을 갈망한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 내가 사랑해줄 사람.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혹은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혹은 증오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우리는 모두 N이다. 살아가며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한 우리는 N이며, 우리는 N을 위해 살아간다. 때문에 이 글은 인생이 된다. 우리에겐 이미 N이 있기에. 우리 또한 누군가의 N이므로.
 
우리는 오늘도 살아간다. 어떻게든 살아는 간다.
나를 위하여, 당신을 위하여, N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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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이토록 불편한 식사, <디너>










불행은 늘 함께할 누군가를 찾는다. 불행은 결코 침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혼자 있을 때의 그 기분 나쁜 침묵을. (p.13)




사랑은 옳다. 적어도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배워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 ‘아낌없는 애정’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 누가 부정적인 평가를 할까. 우리는 살아가며, 사랑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또 그 외에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먼 나라의 아이들에게도 우리는 이따금 사랑을 느끼고 연민을 가진다. 

사랑은 언제나 옳다. 그러나 이따금 그 옳고도 바람직한, 누구에게나 당연한 자연스러운 감정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할 때가 있다.


우리가 사랑에 눈이 멀었을 때, 사랑은 ‘독’이 된다.

독성을 띤 사랑은 더 이상 바람직하게 권장되어야 할 인류보편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때때로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전혀 관계없는 이의 목숨을 ‘충동적으로’ 앗아갈 정도로.



불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은 ㅡ 자연의 폭력이든 인간의 폭력이든 상관없이 ㅡ 도저히 참을수 없을 것이다.



글은 주인공인 파울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어디에서나 봤음직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가장. 그것이 파울의 표면적인 모습이다. 전직 학교 선생님,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하나 있고 세 사람이 꾸려가는 가정은 겉으로 보아서는 문제가 없다. 다음 수상 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는 세르게의 동생이며, 형님에게 다소 껄끄러움을 가지고는 있으나 형님 부부와 함께 프랑스로 바캉스를 다녀오고 여유가 있을 때면 고급레스토랑에서 사적인 식사를 즐기기도 한다. 굳이 네덜란드가 아니어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가장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을 위해 아들의 핸드폰을 뒤져가며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다. 


파울도, 또 형님 부부도, 또 아내도, 아들도 겉으로 보아서는 어떤 문제도 없다. 음식이 가격의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나 정치가인 형님의 겉치레에는 모자람이 없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파울은 형님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한다. 이 또한 전형적인 풍경이다. 아내와 함께 형님 부부를 기다리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가져온 지배인은 불필요할 정도의 설명을 덧붙이며 요리를 소개한다.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가 차례대로 나오며 독특하게도 책의 각 챕터 역시 코스로 이뤄져 있다.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 소화제, 팁. 지난 바캉스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섞어가며, 작품은 식사의 흐름을 따라 진행된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 디너,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잘 차려진 음식도, 지배인의 설명도, 형님의 태도나 형수님의 눈물 번진 얼굴도, 또 아내의 태도도 모두 어딘지 모르게 2프로씩 부족하다.


불편함을 느낀 순간, 음식은 식도에 탁 걸려든다. 먹은 것들이 죄다 얹힌 기분. 아무리 물을 마시고 소화제를 먹어도 깨끗이 밀려들어가지 않는 찜찜함, 그 불편함. 말 그대로 소화불량.


<디너>는 그런 글이다. 식도를 다 넘어가지지도 못한 채 탁 걸려버린 음식물, 위장을 내내 불편하게 만드는 소화불량 같은 그런 글. 그 불편함을 느낀 순간, 즐거웠던 식사 자리는 부조리의 장으로 변모한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때문에 제대로 씹어 삼킬 수 없는 껄끄러운 <디너>처럼.




정말로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것은 바로 그 비밀이었다. 

둘이서만 알고 있는 비밀. 망각은 일찍 시작할수록 효과가 큰 법이다. (p.179)




우스개소리지만, 먹을 땐 개도 건드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식사 자리에서는 잔소리도 삼가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불편한 자리들을 만나게 된다. 친척 어른들, 애인의 부모님, 혹은 회사 사장님이나 전공 교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는 언제나 불편하다. 그런 식사는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다. 아무리 비싼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고 식사가 끝나면 필연처럼 체증이 찾아온다. 


그래서, <디너>에선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말 저녁에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각자의 아이들이 ‘사건’을 일으켰고, 그들은 그 사건의 수습에 대해 대책을 나눠보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허나 누구도 대놓고 그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대세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대처해야하는 세르게부터 그의 부인, 또 파울 자신과 현명한 아내마저도 이 부분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이 없다. 아이들이 저지른 사건의 크기가 상당한데도, 그들은 지배인의 불필요한 설명을 들으며 음식을 소개 받고 애피타이저와 메인 코스를 고르고 있을 뿐이다. 말을 할 때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는 지배인의 습관이 거슬리는 파울은 기실 그것이 신경쓰이는 것이 아닐 테다. 걱정되는 것은 아들인 미헬의 문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아이들을 꾸짖지 않는다. 파울에게도 비밀에 부친 채 아내는 사건을 숨기기에 바쁘고, 이는 형수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숨기고, 가리며, 상대의 아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내 아이의 죄를 덜기에 바쁘다. 모두가 알지만 말하지 않는 아이의 ‘비밀’을 있는 힘껏 숨기고 감춘다. 그리고 그 비밀이 핀치에 몰렸을 때, 그들은 끝내 ‘선택’을 한다. 내 아이를 위한, 아니, 내 아이만을 위한.



본래 사랑이란 내리 사랑이라 했던가. 부모가 자식을 미쁘게 여기며 보듬는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사랑에 눈이 멀 때 우리는 불편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에 대한 기사들이 연일 터져 나오는 이때,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가해자인 아이보다도 그 아이 부모의 태도다. 우리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든가, 그쪽에서 잘못을 했다라든가, 혹은 우리 아이는 무조건 착하다는 식의 발언들. 물론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나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당신의 자식이 치기 어린 실수들을 저지를 때마다 세상을 향해 기꺼이 머리를 굽혀주지 않으셨던가. 그것은 존경 받아 마땅한 고귀하고도 고결한 마음이다. 


그러나 자식을 위한다는 말로 그 모든 과오를 덮기 시작할 때, 혹은 그 모든 책임을 미루기 시작할 때, 그리하여 내 ‘자식만’ 생각하며 그 외의 어떤 것들은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릴 때, 애정은 눈이 멀고 이윽고 ‘독’이 된다. 잠깐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ATM 기기 안에 웅크려 잠들었다 어린 십대들의 발길질에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노숙자를 죽인, 그 치명적인 독처럼.







+ 너무너무 늦어버려서 염치없는 리뷰입니다.. 여느 때보다 치열한 여름을 보내는 중인지라 리뷰 한 번 쓰는 것도 여의치가 않네요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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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무더워진 날씨에, 휴가 때문에 업무는 더 정신이 없고

때문에 다 읽은 책 리뷰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으른 달찬입니다 ㅜ_ㅜ

그래도 무더위를 한풀 꺾어주는 시원한 신간들이 쏟아지는 이 계절,

비타민 같은 좋은 소설들을 추천해봅니다 :)

 

 

2012년 8월,

여름날 소설 신간 비타민 둘

 

 

 

 

 

 

 백영옥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누구나 살아가며 한 번은 만나고, 한 번은 겪고, 또 한 번은 상처 받게 되는 공통의 화제가 있다면 그건 대체 뭘까요? 아마도 연애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누구나 한 번은 사랑하고, 누구나 한 번은 사랑에 상처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때문일까요. 연애는 우리와 가장 가깝고도 흔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쉽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백영옥은 누구에게나 쉽지만 또 누구에게나 어려운 연애 이야기를 굉장히 잘 쓰는 작가입니다. 데뷔작부터 '연애'라는 화두를 언제나 안고 갔던 그녀가 이번에 새로운 장편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연애. 그것도 '실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작인 <아주 보통의 연애>를 만났을 때, 나는 설렘을 느꼈습니다. 지금보다 어렸던 날들에 만났던 서툰 사랑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요. 그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실연'입니다. 이번엔 또 어떤 연애가 이 속에 담겨 있을까요. 이 책을 보면 또 어떤 사랑에 빠지게 될까요. 또 한 번 사랑에 빠질 준비를 하며, 나는 이 특별한 모임을 기다립니다. 이번 달 가장 기대되는 소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입니다.

 

  좡쉬칭 <북경에서 도둑으로 살아가기>

 

가끔, 하고 싶은 말을 돌려 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살아가며 우리는 많은 말들을 감추고, 한 바퀴를 빙 돌린 말들로 겨우 속내를 꺼내놓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해서는 안 될 말도 많은 세상. 삶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점점 더 하고 싶은 말들을 참으며 살아갑니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빙 돌리면 은유가 되고, 소설가가 하고 싶은 말을 빙 돌리면 풍자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 하고 싶었던 말들을 또 한 바퀴 빙 돌려준 소설가가 있습니다.

좡쉬칭이라는 소설가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신간 목록에서 나를 붙들었던 것은 유독 눈에 들어왔던 독특한 이 제목이었습니다. 북경에서 도둑으로 살아간다? 북경에서 도둑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인생일까? 그런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어 결국 보관함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이 작품, 역시나 부조리한 사회에 던지는 불편한 블랙 유머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북경에서 도둑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도둑은 도둑이지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도둑. 더 한 도둑들이 넘쳐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진짜' 도둑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이번 달, 또 한 번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봅니다.

 

 

 

 

 

 

 

+

날은 덥고, 업무는 많고, 좀처럼 의욕은 나지 않는 요즘입니다.

변명처럼 리뷰를 미뤄놓고 페이퍼 역시 마지막 날에나 올리고 있는 이 게으름에 괜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으로 신청한 것이 아닐 텐데, 분명 열심히 즐기고 싶어 한 신간평가단일 텐데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것만 같아 죄송한 마음 뿐이네요 ㅠ ㅠ 얼른 바쁜 날들이 지나가고 밀린 리뷰도, 또 남은 리뷰도 열심을 다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무더위 속에 건강 조심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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