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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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는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오해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내가 득도를 논하기엔 식견이 매우 부족한, 속세의 보통 사람인 탓일 것이다. 흔히 보았기 때문에, 혹은 과거에 이러이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턴도 '반드시' 이럴 것이라는 오해를 했다가 '아! 내가 잘못 알았구나!'라는 자기반성과 오류수정의 과정을 나는 빈번하게 반복하고 있다. 9년을 연애하고 이제는 나와 같은 주민등록등본을 떼는 사이가 된 한 남자의 행동이나 발언에 이따금 흠칫 놀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익숙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런 것을 인지심리학에서는 메타인지라고 부른단다.

편혜영이 나에게 그런 소설가다. 나는 이 책을 속아서 샀다. 다 읽고 난 후에야 나는 속았음을 깨달았다. 아.
나는 부족한 식견으로 이 소설가에 대해 그토록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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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 가든>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담이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에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지만 유달리 슬래셔, 고어에 약하다. 전혀 그런 장르가 아닌 헐리웃 액션 영화에서 살갗이 베이는 장면이 가볍게만 다뤄져도 똑바로 보지를 못해 눈을 돌려버린다. 편혜영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나의 이 상처에 대한 이입과 두려움이 단지 눈에 보이는 영상에만 한정된다고 생각했었다.
<아오이 가든>을 읽고 며칠동안 잠을 못 잤었다. 내가 좀비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에 내던져진 것 같았고, 더러운 토끼 우리 안에 갇혀버린 것 같아 수시로 살갗이 근질 거린 탓이다. 그때부터 편견이 강하게 생겼다. 아,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이만한 그로테스크를 구사하는 작가가 등장했구나. 이렇게 텍스트만으로도 살갗이 도려지는 느낌, 이렇게 숨이 막힐 것 같은 밀도감을 주도면밀하게 써나가는 작가가 나타났구나. 구구절절 잡담이 너무 길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곡성>이 이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곡성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편혜영의 문장들을 떠올렸다.
이제 <홀>을 세 번쯤 읽고 난 후에야 나는 이런 나를 반성한다. 나는 이제까지 편혜영 소설의 날선 문장들에 갇혀 그 늪 같은 서사를 미처 보지 못 했다. <홀>을 읽고 난 후에야 나는 작가의 이야기를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아오이 가든이 얼마나 수많은 인간사의 고통과 모순을 은유하고 있는 절묘한 서사인지를, 외려 최근작인 <홀>을 읽고 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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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은 불편한 소설이다. 이제까지 읽은 편혜영의 소설들은 문장이 (너무나 그로테스크 해서) 불편하다는 느낌이었는데 <홀>은 서사가 불편했다. 기억에 아마 <몬순> 때부터 이 서사의 불편함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외려 <홀>은 읽기에 불편하지는 않다. 문장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혀 한 번씩 손에서 내려놓고 숨을 돌려야만 했던 전작들에 비해 <홀>은 술술 잘도 넘어간다.
게다가 절반을 지나 클라이막스 직전까지도 이 '불편함'은 상당히 단순한 편이다. 주인공인 오기에게 이입해 장모와 아내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그 두 여성이 어째 퍽 불편하고 껄끄럽게 느껴진다. 특히나 장모의 행동은 기행의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오기는 저렇게 사고로 다쳐서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는데 저래도 되는 것인지 불편함을 억누를 길이 없다. 독자마저도 주인공인 오기의 시점으로 주변 상황을 둘러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절정을 지나 책의 말미에 다다렀을 때 나는 오랜만에 뒷통수를 시큰하게 후려맞는 기분을 느꼈다. 속았구나. 그것도 아주 제대로 속았구나. 오기한테 속았고, 장모한테 속았고, 무엇보다 작가한테 속았다. 불편함이 오기의 주변이 아닌 오기 자신에게로 향하던 그 시점, 그 대목의 선득함을 무엇에 비견할 수 있을까.
인정한다. 나는 속았다. 속아서 이 책을 샀고, 마지막 직전까지 계속 속고 있었다. 된통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나는 알게 됐다. 와.
편혜영은 정말로 대단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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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비밀독서단 작가특집편에 나온 윤태호 만화가가 이 책을 추천했다. 아마 얼핏 훑어본 <홀>의 리뷰가 이렇게나 많은 것도 그 덕이 아닐까 싶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묻어두겠지만, 나는 윤태호가 느낀 그 감정이 아마 <홀>의 주인공인 오기의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오기의 앞선 태도들이 전부 '변명'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이 깊은 구멍, 즉 홀 속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편혜영의 전작들이 버거웠던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다. 속아도 기분 좋은 그런 책이다. 잘 썼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재미있다. 소설은 재미있는 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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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벌써 세 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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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별
코랄리 빅포드 스미스 지음, 최상희 옮김 / 사계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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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화는 예뻐야한다. 다른 책이라면 이런 말을 않겠지만 감화를 주는 서사,보다도 예쁜 게 좋다. 동화책을 달리 그림책이라 부르겠는가. 동화는 절반의 이야기, 그리고 절반의 그림이 함께 채워가는 것이라 예쁘면 예쁠수록 좋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여우와 별>에 대해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이 동화책은 예쁘다. 고로 좋은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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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이 책을 표지 때문에 샀다. 역시 예뻐서 그랬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나처럼 기왕 책을 사는 김에 사은품을 받기 위해 5만원 하한선을 채우던 중에 딱 4천원이 모자라서 '적당한 책이 없을까'하던 차에 이 책이 단박에 눈에 띄었던 것이다. (사족이지만 예쁜 표지는 이래서 중요하다.) 책을 받은 후에야 이 책이 동화였음을 알았다. 표지는 내가 급히 스크롤을 내리다 충동적으로 질렀던 그 순간보다도 직접 보았을 때 훨씬 더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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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어느 숲에 여우가 살고 있고, 여우가 사라진 별을 그리워하며 밤숲을 헤매는 것이 전부다. 이것 또한 동화로서 얼마나 좋은 서사인가. 가뜩이나 복잡한 생각을 더욱 더 하기 싫은 (개인적으로 참 큰일이다, 생각을 좀 하고 살아야 하는데) 내 정돈되지 못한 인생에 쉼표 하나를 찍어주는 책이었다. "자, 이제는 이쯤에서 한 템포 쉬자" 라는 것처럼 쿡 찍어준 쉼표의 타이밍도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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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차 말하지만, 이 책은 예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 책이다. 다시 말한다. 이 책은 예쁘다. 직접 보면 더 예쁘다. 판형이 좀 애매하긴 하지만 책장에 한 권쯤 덩그러니 꽂혀 있어도 전혀 무리를 주지 않는 두께다.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대화가 사라지고 어색해진 순간 "이 동화 참 예쁘지 않아?" 하면서 한 번쯤 은근슬쩍 펼쳐보이기에 그만인 책이란 소리다. 적어도 TV를 틀어놓고 이미 두세 번은 본 예능 재방을 한 마디 말도 없이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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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말하지만 역시 이 책은 예쁘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예쁜 책이 분명히 더 있을 테지만 (아마도 수없이 많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내게 준 그 예쁜 감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이 덜 예뻐지는 것도 아니다. 표지에 속아서 한 번쯤은 사도 좋을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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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버린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482
이이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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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좋았느냐 묻는다면 읽는내내 빼곡하게 붙은 북마크용 포스트잇과 수없이 연필을 들고 그었던 밑줄들로 설명할 수 있을 듯 하다. 매우 '힙'했다. 무리 없는 시어들이 낯설어지는 순간의 재미를 충분히 느꼈다. 좋은 시였고, 좋은 시집이었고, 좋은 시인이었다. 그래서 시인에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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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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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은 도처에 있다. 無라는 말이 붙는 색이면서 동시에 모든 빛이 합쳐지면 백색이 된다는 것이 나는 늘 재미있다. 


한강의 문장은 늘 섬세하고 예민하다. 한강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흰 색을 떠올렸는데, 그 <흰>것을 얘기하는 책을 냈단다. 당장 주문하고 받아본 책은 우선 들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다. 내지가 다소 두꺼운 감이 없지 않아 편히 술술 넘길 페이지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히 만져가며 읽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든다. 한강의 문장은 매만질 때 특히 그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눈으로 읽기보다 손으로 쓰며 만져봐야 그 말들이 가진 질감과 묻혀있던 함의들이 촉각으로 살아난다. 그래서 나는 한강의 책을 읽을 때면 늘 글을 '만진다'는 기분이 든다.


이 책은 사실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니다. 하얀 것들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 하얀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창작인 것 같기도 하고, 작가 본인의 자전적 고백을 담은 에세이인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시 같기도 하다. 도통 모르겠다. 한강의 글은 늘 시인지 소설인지 수필인지, 약간 아리송해지는 그 지점에서 '한강다움'이 생기는 듯 하다. 한강이라서 소설집이었다. 한강다운 소설이었다.


짧고, 편하고, 그래서 금세 읽었다. 책장을 덮고 한참동안 <흰>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더러워지기 쉬운 색, 그만큼 청결히 세탁하기 쉬운 색, 우리 눈이 식별하는 태양의 진짜 색, 도처에 있는 색, 성스러운 색. 우리는 하얀 강보에 싸여 세상에 태어나 하얀 수의에 싸여 땅에 눕는다. 

하얀 것들은 삶이다. 누런 때가 빠질 때까지 한 번 푹 삶아보고 싶은 삶이 그렇게 참 <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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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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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사족이지만 하루키의 저서 중 보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학생 시절부터 용돈을 쪼개가며 한권 두권 사모았던 절반의 콜렉션은 나처럼 하루키를 좋아하며 하루키의 문장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면서 완전해졌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혹은 해변의 카프카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은 이제 솔직히 잊어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이 보이면 별 고민과 망설임도 없이 우선은 사고 본다. 일종의 타성인 것 같지만 그래도 실망한 적은 딱히 없다. 아, 그래서 대가는 대가구나, 라는 생각을 나는 이번에도 했다.

+
사실 그의 소설은 취향을 많이 탄다. 나와 나의 반려는 모두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작품의 취향이 극명하게 갈린다. 다 사서 읽기는 하지만 괜찮았다, 나쁘진 않았다 선에서 그치는 소설도 많다. (예로 나는 아직 여자없는 남자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다 읽지 못했다.) 하지만 에세이에 한해서는 이견이 없다. 어떤 때엔 소설보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더 좋아보이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내 안에 쑤셔 넣기가 벅찰 때, 사는 게 정신이 없어서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기가 힘겨울 때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
하루키는 소설만큼 좋은 에세이를 쓴다. 소설과 에세이를 다 잘 쓰기는 퍽 어려운 일이다. 소설에 대한 기대로 에세이를 사서 펼쳐봤다가 자신의 필력과 감성 과잉에 젖어 글이 난잡해지는 경우를 나는 더러 봤었다. (대체적으로 소설가가 쓰는 에세이의 절반 이상이 그렇다. 물론 나는 그런 에세이도 싫어하진 않는다. 좋아하지도 않을 뿐이지.) 하루키는 꾸밈이 별로 없다. 유려한 문장을 뽐낸다거나, 혹은 자신의 경험을 과장되게 치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는 늘 사소하다. 낯선 이국의 경험을 탐미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스케일이 좀 째째해보일 수도 있겠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여행지 TOP 10> 같은 타이틀이 하루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 곳에 있건 그는 조깅을 하고, 렌트카를 타고 여행지를 돌면서 보았던 풍경보다도 렌트카를 빌리던 당시의 사소한 에피소드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화려한 경험보다는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식당 주인과의 추억, 여행지 곳곳을 어슬렁거리는 개나 고양이 (말과 양도 있었다)에 대한 이야기에 하루키는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문장은 담담하고, 때문에 꼭 옆집 아저씨가 여름 밤에 우리집 평상에 앉아 뻘쭘함을 이기고자 괜히 부채를 펄럭이며 늘어놓는 사설처럼 수다스럽다. 그래도 정신이 사납지는 않다. 하기야,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에세이니 오죽하겠는가.

+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거의 모두 빠짐없이 읽었다. 첫 문단과 같은 이유에서다. 여행을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하기엔 제약이 많았던 십대 시절부터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통해 여행하는 방법을 배웠다. 숙소를 잡고, 자주 걷고, 자주 말을 걸고, 자주 발견하고, 자주 사소해지고, 무리하지 않고. 그러다 우연히 좋은 식당을 발견해 맛있는 식사를 하는 일. 먹는 것과 듣는 일에 하루키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여행은 그래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전체적인 평을 객관적으로 얘기하자면 사실 새롭지는 않다. 내가 하루키를 그만큼 오래 본 탓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정직하게 별은 세 개만 줬다) 하루키가 여태 써왔던 여행 에세이와 딱히 다르지도 않고, 몇몇 지역은 어쩐지 예전에 이런 글을 읽어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스와 보스턴 여행이 특히 그렇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왜냐면 하루키는 이미 이전에 이 지역에서의 일상을 에세이로 썼기 때문에.) 그래도 하루키의 에세이이기 때문에 부담은 없고, 언제나 그래왔듯 중박은 친다. 다 읽으면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낯선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진다. 이 에세이는 딱 그 정도다.

+
라오스에는 절과 승려와 개가 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라오스를 찾아간다면 나는 또 하루키가 보았던 것들과 다른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걸 알게 하는 책이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처럼 각자의 여행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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