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시간들을 혼자서 즐기며 보내고 있다. 이건 고독이고, 저건 외로움인가 하는 생각 자체도 없다. 나는 그저 물리적 실체적 타인과 같이 있는 것이 싫고, 혼자 있는 것이 지나치게 좋을 뿐.
출퇴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집 안을 돌본다. 그리고 충분한 수면.
천억은 없지만, 백억도 없지만, 아니 십억도 없지만, 나는 내 통장잔고가 충분히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내 소비규모를 보면 지금 있는 현금만으로도 20년은 살 수 있을 거 같다. 작년(2024)부터는 명품도 의류 소비도 줄였기에 연말정산 소득공제를 받을 항목마저도 없었다. 나는 서민계의 유재석(유재석은 대부분의 소비를 경비처리하지 않고 다 세금으로 낸다고 함)!!!
혼자 밥 먹고, 혼자 책 읽고, 혼자 영화 보고, 혼자, 혼자, 뭐든지 혼자 하는 나날들을 보내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의 내가 된다.
지금의 나?
그러니까 타인과 대화를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운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 설 명절로 인해서 마주한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심각한 속물 세속인) 여동생의 남편과 대화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간신히 정상 수치로 만든 나의 건강 수치가 나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동생의 남편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지방 비하, 지방대 비하를 한다. 우리 동네 1등이었던 나는 속으로 '야 인마 니가 그러든지 말든지 너보다 내가 더 똑똑하고 공부 잘했어.'라고 생각한다(이 나이에 아직도 고딩 때 성적 운운한다는 게 얼마나 유치하고 치졸한 일인지). 여동생의 남편과 성적이 비슷했던 그의 친구가 합격(특별전형)한 시험에 나도 합격(일반전형)했기 때문에 여동생의 남편은 지방대를 무시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 친구는 일이 너무 힘들어 중간에 도피성 휴직을 했다. 반면 나는 유유자적 근속 중인 것이다.
여동생의 남편과 대화를 하면 언제나 등장하는 그의 친구들의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들의 친구들은 대부분 집 안 좋고, 학벌 좋고(부모, 조부모마저도 학벌이 좋으며), 연봉은 기본 5억이고, 천억의 자산 등등. 여의도 금융회사, 변호사, 의사 그리고 서울대 어쩌고. 그러면 나는 속으로 '그렇게 잘난 친구들을 병풍 두르듯 에워싼 너는 왜 지방, 지방대 출신 내 여동생과 결혼해서 나랑 마주 보고 대화하고 있니? 그렇게 잘난 니가??' 라고 한심하게 생각한다. 남동생과 나는 속으로 '뭔데? 열폭이가. 한심하다 한심해.' 하고 만다.
여동생의 남편과의 대화 주제는 헌법재판소였다. 나는 헌재 판사들의 위험과 권위에 대해서 블랙코미디적 관점에서 썰을 풀었고, 제부는 (니가 잘 모르나 본데 실세는 검사야 하는 식으로) 검사들의 기소권에 대해서 판에 박힌 얘기를 너는 잘 모르니 내가 A부터 Z까지 설명해 줄게 하면서 길고 긴 얘기를 했고, 나는 내란범 김용현의 개소리를 경청하는 헌법재판소 판사 같은 자세로(그래 니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나뿐이지?) 경청해 주었다.
이 대화를 하면서 다시금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깨달았다. 사실 여동생의 남편은 잘못이 없다. 그는 널리고 널린 평범한(신분상승, 돈, 인맥, 학벌, 특권, 낙오자 하대) 서울 사람일 뿐이다. 그 자신도 인정했듯 서울이라는 우물 속에 있으면 시야가 좁아진 서울 사람일 뿐. 반면 나는 혼자 있음으로 인해서 시야가 넓어졌달까, 달라졌달까. 소설 <삼체>에 비유하면 남들이 3차원 속에 있을 때 4차원을 경험해 버린 인물들처럼. 숫자에 비유하면 다들 실수의 세상에서 살 때, 혼자 허수까지 생각하는(이런 자화자찬ㅋㅋ). 아무튼 나는 세속의 셈법으로 살지 않고 있고, 이 내란 정국도 정치보다는 빌드업이 잘 된 수미상관적 이야기로써 즐기기 때문에 같은 당을 지지하고, 같은 당을 싫어하는 여동생의 남편과도 대화가 통하지는 않는다.
타인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혼자 있게 된 건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다보니 남들과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게 된 건지, 둘 다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인맥 자랑, 지인 자랑, 친구 많음이 곧 자존감인 동생의 남편보다는 친구가 거의 없는, 인맥 자체가 없는 내가 더 낫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