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 할수록 더 넓게 여행하게 된다. 카스카이스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느끼는 피로는 마치 그 짧은 시간 동안 네다섯 개 나라의 시골과 같은 도시 풍경들을 모두 지나가며 받는 피로와 같다.

지나치는 모든 집들, 오두막집, 하얗게 회칠한 고요한 외딴집 - 이 모든 집들이 그 순간에는 마치 처음에는 살아 있는 것처럼 행복하게 느껴지다가, 곧 지루해지고 나중에는 피곤하게 느껴진다. 저 집들은 이제 생각에서 내버려두고 그곳에 살았던 그 시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몰려오는 것이다. 이렇듯 나의 모든 여행은 커다란 기쁨, 지독한 권태, 셀 수 없이 많은 가짜 그리움의 즐겁고도 고통스러운 수집인 것이다. 

<여행하면 할수록 더 넓게 여행하게 된다 / 이명의 탄생 / 페르난두 페소아>


점점 더 여행이 싫어진다. 이번 연휴에도 공항에 몰린 여행객 관련 뉴스를 보면서 '여행이 그렇게 좋은가?' 하는 생각을 했고, 팟캐스트 오지은 임이랑의 무슨얘기 ep42. 연말결산 에피소드에서도 오지은과 임이랑은 어찌 저리도 여행을 좋아할까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 위에 인용한 글을 읽고, 내가 왜 여행에서 지루함을 느끼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왜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지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여행을 지루하게 여기는 이유는 매일매일 나 자신을 변주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었다. 매일 나 자신을 변주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옷, 액세서리(특히 귀걸이. 귀걸이는 작긴 하지만 작은 만큼 또 분실의 위험이 크고, 분실의 위험이 있기에 명심하고 짐을 싸려고 하다 보면 정신 에너지가 많이 사용됨), 가방, 신발의 변화를 의미한다. 나는 일상이라는 반복 속에서 소소하게 의생활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인데, 여행에서는 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만큼의 변화를 주기 위한 여행짐(옷, 가방, 액세서리)을 짊어지고 다닐 여력이 이젠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조카를 보러 서울에 다녀왔다. 짐을 줄이기 위해서 갈아입을 양말, 속옷만 챙겼다. 나흘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귀걸이를 끼고, 같은 가방을 들고, 같은 신발을 신었더니 매일 새로운 장소에 가고, 서울에만 있는 맛집들을 두루 갔는데도 불구하고 그날이 그날 같고 지루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귀여운 조카와 함께 였는데도 불구하고 지루했다. 


낯선 것, 새로운 것이 설레임이나 호기심으로 다가오기 보단 새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을 것이 분명한(돌고도는 유행처럼, 쉐이크쉑은 신선했지만 파이브 가이즈는 전혀 새롭지 않게 여겨졌던 것처럼) 경험들. 그런 경험들에 굳이 시간, 체력, 돈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점 커지기에 국내든 국외든 여행에 대해 시큰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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