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게 공표되었을 때 사람들이 받은 첫 느낌은 엄청난 행복감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어떤 보물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육각형 진열실에 가면 그 어떤 개인적 문제나 세계 보편적 문제에 대한 명쾌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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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서들>은 존재한다(나는 미래의 사람들, 실제로 존재하게 될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두 권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변론서>를 찾아나선 사람들은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그 책의 불충실한 해적판들이나마 찾을 수 있는 확률이 <영>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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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 터무니없는 희망 뒤에는 엄청난 절망이 뒤따른다. 어떤 육각형의 어떤 책장에는 틀림없이 진귀한 책들이 감추어져 있겠지만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바벨의 도서관 / 보르헤스 전진 2 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민음사>
스마트폰의 앱 속에 담긴 정보들이 내 머리속에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아, 보르헤스는 천재였다'는 생각과 함께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무슨 영화를 좋아하냐고 질문한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은 발열과 소음을 동반한 채 하드를 미치듯이 돌리는 10년 된 컴퓨터처럼 작동한다. 본 영화가 너무 많고, 애초에 괜찮을 것 같은 영화들만 골라서 보기 때문에 대체로 다 좋은 영화들이라서 금방 대답하기가 힘든 것이다. 내가 극장에서 본 영화들을 역순으로 복귀해보지만(현재 수감 중인 내란 주요 임무 종사자인 특전사령관 곽종근이 비상계엄의 밤에 했던 일을 복귀하여 자수서를 써가듯)생각이 안 날 때가 많아서 영화의 전당 앱을 열어 예매 리스트를 찾곤 한다.
무슨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게 지금 미리 답안을 작성해 둔다.
답안 : 단편적인 영화 제목보다는 좋아하는 감독, 배우별로 답하는 게 효과적이다. 우선 국외는 에릭 로메르(<녹색광선> 등), 켈리 라이카트(<퍼스트 카우> 등), 올리비에 아사야스(<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등, 데이빗 핀처(<조디악> 등), 미아 한센-러브(<다가오는 것들> 등), 코언 형제(<시리어스맨> 등), 쿠엔틴 타란티노(<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 등), 짐 자무쉬(<데드 돈 다이> 등), 리처드 링클레이터(<비포 선라이즈>등), 드니 빌뇌브(<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 등), 알리체 로르와커(<행복한 라짜로> 등) 더 많지만 일단 생각나는 건 여기까지.
국내는 봉준호, 봉준호,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어 뭐 또 ..이경미(<비밀은 없다>, <미스 홍당무>)..그리고 또..황정민? 박정민? 아 차차 황정민은 배우잖아! 그러니까 황정민의 대다수 영화들. 박정민의 대다수 영화들. 국내는 감독보다는 배우 위주다.
최근(약 10년 전부터) 보고 또 보고 계속 보고 명절처럼 보는 영화들을 추려보자면 <토니 에드만>, <리버 로드>, <도그빌>, <모비딕>(김민희 보려고), <클레어의 카메라>(홍상수는 싫지만 김민희 존예!!), <어느 멋진 아침>, <로맨틱 홀리데이>, <틱틱붐>(넷플릭스 앤드루 가필드 주연)
책이나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즉시 생각이 났는데 요즘은 로딩 시간이 필요하고 점점 그 시간이 길어진다. 어...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국내는 박완서, 권여선, 김사과, 김영하, 장강명...음... 또... 해방기 소설가는 염상섭, 채만식, 김유정, 이광수, 백석(시인), 국외은 미셸 우엘벡, 에밀 아자르 또... 일단 외국 소설가 중에서 모든 작품을 다 가지고 있는 건 미셸 우엘벡과 에밀 아자르뿐이라서 여기까지만.
음악(가장 관심이 없는 장르)으로 가면 환장 그 자체다. 나는 음악 스트리밍 앱을 메뚜기 하기에 멜론, 유튜브 뮤직, 지니, 바이브를 그때그때 할인과 결합상품에 따라서 옮겨 다니는데, 옮길 때마다 직전에 사용했던 앱의 보관함 리스트를 업데이트하는 게 귀찮아서 요즘은 업데이트는 안 하고 자력으로 생각을 해내서 항상 검색해서 음악을 듣는다. 보관함을 보지 않고 내 두뇌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가수나 앨범, ost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 늘 충격을 받는다. 백과사전식 지식 암기가 하대 받는 시대, 창의력이 칭송받는 무한 데이터 정보 AI 시대 속에서 나의 두뇌가 텅 빈 듯한 느낌이 들 때마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 생각난다. 너무나 방대하기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무한=0이라는 아이러니!
하지만 내란 우두머리 윤 씨 탄핵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국정원 1차장 홍장원을 보면서 다시금 기억(력)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깨닫는다!!! 검색해 보면 알 수 있고, 스마트폰을 열어보면 알 수 있는(특히 메모장, 사진앨범)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는 것에 두뇌를 쓰지 않는 것은 어쩌면 두뇌 스트레칭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내 머릿속에 든 기억은 거의 없고, 기억은 휴대폰 속에만 있는 거라면 그것을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며칠 전 데이빗 린치(데이빗 핀처 아니고!!)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린치 작고 기념 특별상영)을 보면서 제대로 된 기억을 하지 못하면 이 영화의 전반부처럼 허상(또는 망상) 속에서 살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주인공 배티가 윤 씨 부부처럼 여겨졌다. 윤 씨 부부의 엔딩도 '다이안' 같길!!!
전자책은 나에겐 바벨의 도서관처럼 거대하게 여겨진다. 조금 전에 알라딘 장바구니에 새로 출시된 크레마를 담았다. 구매하지는 않을 듯. 나는 아직은 전자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바벨의 도서관>을 인용하기 위해서 내 등 뒤에 있는 책장에서 <픽션들>을 꺼내 인덱스를 붙인 페이지들 중에서 해당 문장을 찾아서 타이핑했다. 책의 첫 페이지(흰 종이)에는 내가 이 책을 구입한 날짜가 적혀 있다. 2007년 6월 21일. 이런 아날로그적인 행위를 전자책의 어떤 기능이 대신할 수 있을까? 대신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을 많이 다를 것이다.
남동생은 매일 증가하는 딸의 동영상과 사진으로 인해서 아이클라우드 용량을 계속해서 늘이고 있다. 반대로 나는 팔만대장경판을 새기는 장인의 심정으로 조카의 사진들을 고르고, 삭제하고, 외장 하드로 옮기고, 현상하고, 포토 앨범 만들고, 또 어떤 건 액장에 넣어서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다. 그렇기에 남동생은 자신의 딸의 사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나는 조카의 사진에 대한 기억이 많다.
시간이 갈수록 외우고 있는 것, 기억하고 있는 정보들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상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이 크지 않다는 것이 슬프다. 어제의 일, 지난주의 일들을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대신 폰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재난처럼 여겨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