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돈은 없었지만 시간만은 넘쳐나서 구입한 책은 최소 2번 이상 정독했다. 어른들의 책을 사놓고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한다고 하는 푸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되었던 용돈으로 책을 사고, 비디오를 빌려 보고, 영화잡지를 사면 간식을 사 먹을 수가 없었다. 먹는 것에는 큰 흥미가 없었던 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비디오도 꼭 2번 이상 반복해서 보고 난 후에 반납했다. 토요일에 한 번  보고, 일요일에 한 번 더 보고 반납을 하면 연체료도 없고 깔끔하다. 


팟캐스트에서 책 소개를 듣고는 너무 읽고 싶어서 당장 결제를 했고, 책은 다음 날 바로 배송 완료가 되었다. 들뜬 마음으로 포장을 뜯고 게걸스럽게 십여 페이지를 읽다 피곤해서 잤다. 그리고 그 이후로 책장을 펼친 기억이 없다. 책은 일주일 넘게 내 배우자라도 되는 듯 퀸 사이즈 침대의 한 자리를 자치하고 있을 뿐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어떤 경우에도 내 침대에 오를 수 없지만, 내가 구입한 새 책은 언제라도 침대 옆 자리가 가능하다. 


찐 찹쌀을 씹어먹듯이 한 문장 한 문장 정성껏 책을 읽던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내 인생 최초의 즐거웠던 독서 경험은 딱히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던 중2 여름방학의 어느 날에 펄 벅의 <대지>를 하루 종일 읽었던 때이다. 선풍기 혹은 부채로 더위를 치우면서 나름 쾌적한 기분으로 오란의 인생을 읽어나갔다. 그때도 왕룽, 이 나쁜 새끼가 하면서 빡이 쳤었다. 


언제쯤이면 나는 다시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무해한 나태 속에서 아무 근심 걱정도 없이 책 읽기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될까...


내가 집 안에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집사나 하인을 들이기 전에는 불가능하리라. 어렸을 때는 부모라는 집사와 하인이 집안일을 해주었기에 집에서의 나는 딱히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이 느긋하게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퇴근하고 집에 오면, 혹은 주말에 우선 집사와 하인으로서의 해야 할 일 이 있는 것이다. 청소, 빨래, 설거지, 밥하기, 각종 공과금 및 세금 내기, 수리와 보수 그리고 다 쓴 생필품 구매까지... 아 또, 여러 가지 할인, 적립금 및 혜택을 챙기는 것도 무시 못할 시간 도둑이다.  


어떻게 책을 그렇게 많이 읽고 책도 자주 쓰냐는 질문에 이다혜 작가는 "전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냉장고를 열면 썩은 채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반면 나는 쾌적한 집안을 추구하기에 집안일에도 에너지와 시간을 제법 투자하는 편이다. 최근에 섬유유연제 주문하는 걸 미뤘다가 급하게 쿠팡을 열어 주문하면서 "움베르토 에코는 섬유유연제 같은 거 직접 주문한 적이 없겠지. 그 사람이 아무리 천재더라도 나처럼 집안일까지 했다면 그렇게 많은 책을 쓰진 못했을 거야."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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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2-0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너무 그윽하네요. 그리고 마지막 문단.... 하 ㅜㅜ 그래도 오늘하루는 무해한 나태 속에서 풍족히 독서 하시길..

먼데이 2021-02-09 13:1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일요일 오후엔 해야 할 일들을 미뤄두고 미뤄둔 독서를 했는데 역시 책 읽기만 한 사치가 없는 듯하여 행복했었답니다. 곧 설연휴이니 공쟝쟝님도 무해한 나태를 즐기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