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것을 가졌었다. 그러나 모두 속임수였다. 무엇으로도 문제를 고칠 수 없었다. 해결책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까지도 몇 년은 거릴 터였다. 오해는 마시라. 꿈이 집, 주급 백만 달러, 모두 황홀했고, 나는 영원히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정말이지 재밌게 살았다. 

그것들은 그냥 정답이 아니었던 거다. 옛날로 돌아가도 <프렌즈> 오디션을 보겠느냐고? 물론이다. 또 술을 마시겠느냐고? 물론이다. 술을 마시며 긴장을 풀고 즐기지 못했더라면 이십대가 끝나기 전에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렸을 것이다. 

(중략)

누군가의 동정을 얻으려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진실이어서다. 

<친구와 연인, 그리고 무시무시한 그것 / 매튜 페리>


매튜 페리(1969~1923, 만 54세)가 쓴 <친구와 연인, 그리고 무시무시한 것>을 매일 잠들기 전에 조금씩 읽고 있다. 매튜 페리에겐 미안하지만 그의 고난이 나에겐 많은 위로가 된다. 꿈의 집(그는 나중에 2천만 달러짜리 펜트하우스 40층(뷰가 끝내주는)을 소유하고 살지만 그곳보다는 재활센터 또는 병원 중환자실 같은 곳에서 더 많은 밤을 보낸다), 여자 친구 줄리아 로버츠(물론 헤어지지만, 줄리아가 자길 버리고 떠날 것이 두려워서 그가 먼저 떠나지만), 주급 백만 달러와 명성과 재능, 그 재능을 알아봐 주는 방송계와 영화계... 정말 가지기 힘든 것을 모조리 다 가졌지만 정작 그는 정말 가지기 쉬운 두 가지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것은 바로 숙면(깊고 긴 잠)과 중독 없음이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중독(알코올, 담배, 약물까지 죄다 중독이었던 매튜 페리)이 필요했던 그는 중독이 선물한 불안감소 효과로 인해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더 잘 발휘하게 되어 엄청난 부와 명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중독은 그의 직장까지도 파괴해 버리는데, 이쯤 되면 나는 매튜 페리가 '부와 명성도 다 필요 없고 평범한 삶이 좋아.' 할 줄 알았는데, 이런 상식적인 생각은 <벤야멘타 하인학교> 주인공 또는 니체가 차라투스투라 첫 장부터 비난하는 말종의 인간 같은 패배주의에 찌든 나 같은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고, 그는 달랐다.


하지만 아빠는 연극 대본을 쓸 수 없고, <프렌즈>에 출연할 수 없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도 없다. 어딘가에 7백만 달러를 쓸 재력도 없다. 삶은 이렇듯 반대급부가 있는 모양이다.

궁금해진다. 아빠와 바꾸라면 바꿀 수 있을까?

<친구와 연인, 그리고 무시무시한 그것 / 매튜 페리>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고 약간 충격받았다. 이런 인생관을 가져야만 성공할 수 있는 거구나 싶어서. 하지만 매튜 페리가 저런 생각을 한 것에 대한 더 논리적인 이유는 아마도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긍정하는 생존 본능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해 가지지 못한 것은 전부 신포도이며, 내가 가진 것은 전부 달콤한 레몬이라는 식으로 생각해야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건지도! 물론 이런 사고방식이 깊어지면 '대통령 3년 하나 5년 하나 똑같다'는 비루한 자기 합리나 하는 자기 망상 속에서 홀로 유희하는 내란수괴 윤 씨 같은 사람이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각(증상) 없이 살다가 느닷없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몇 달 투병하다 죽는다. 하지만 나는 운이 억세게 좋게(아니면 나쁘게) 어떤 병의 단서가 발견되어 몇 년째 추적 검사를 받고 있다.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그 정점을 찍은 것이 재작년 하반기와 작년 상반기였다(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천성이 안분지족인 나는 건강악화로 인해 더더욱 안분지족(스트레스가 없는 상황)하게 되었다. 어떤 즐거움(정서적, 금전적 이득)이 스트레스를 담보로 한다면 나는 과감하게 그 즐거움을 포기했다. 대신 내 생활의 중심에는 매일(평균 아님) 8시간 이상의 수면과 운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최근에는 독서, 영화감상, 일기 쓰기마저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느 정도였냐면 bgm으로 켜두는 음악도 없는 적막 속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다림질을 하거나 옷장 정리는 하거나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청소했다. 극장에 가지 않은 지도 한 달이 되었다.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작년부터 읽다가 내란 터지면서 못 읽었던 <삼체 3>을 윤 씨 파면 후에야 집중해서 다 읽어낸 정도가 전부다. 


검사 또 검사. 대학병원 교수는 좋은 결과에는 나빠질 수도 있는 상황을 말해주고, 나쁜 결과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좋은 상태였던 데이터들을 말해 준다. 이 시대의 훌륭한 상담사이자 명의랄까! 요즘은 계속 검사 결과가 좋다. 좋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는 다음 검사 날짜를 예약하라고 한다. 검사 주기가 2배로 길어졌다는 것이 그나마 실제적인 희소식. 그게 어디냐! 결론만 말하자면 현재는 나도 여느 사람과 똑같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정상 수치를 가진 건강인이다, 당분간은. 


다시는 정상 범위의 수치를 가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정상이다!! 정상 수치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 건강이 악화되었던 지난 몇 년간의 변수들을 분석해 보았다. 악화일 때는 있었고, 정상일 때는 없었던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찾았다!!!! 내가 좋아했던 그것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의 나의 육체에 가장 큰 해악을 주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없었을 때의 검사 결과는 대체로 좋았던 것! 하지만 이 분석은 완전히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정상 수치도 한시적인 것일 가능성이 많고, 내가 정상 수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티맵 운전 점수처럼 생활의 중심에 8시간 수면 시간 확보라는 철칙을 두고 생활한 시간들의 누적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다시 바다를, 섬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나뭇잎 같은 섬의 뚜렷한 윤곽이 사라지고 있었다. 섬은 무척 작았고, 무척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바다가 해안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 주위에는 온통 일었다 가라앉는 파도뿐이었고, 파도에 실려 온 통나무가 뒹굴었으며, 갈매기 한 마리가 다른 파도를 타고 있었다. 이 근방에서 배 한 척이 침몰했다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물을 튕기면서 생각했고, 몽롱한 상태로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각자 홀로 죽어 갔지.

<등대로 / 버지니아 울프>


검사 결과가 두려울 때마다 '우리는 각자 홀로 죽어 갔지.'를 기도문처럼 읊는다. '인간은 누구나 홀로 태어나서 자기만의 망상에 빠져 살다 홀로 죽는다.'라고 생각하면 두려움은커녕 편안해지고 약간은 (태어남을 원한 적 없던 나 인지라) 생명에 대해서 복수한 거 같아서 쾌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삼체 3>을 다 읽은 후로는 1890만 년의 시간을 상상하곤 한다. 반 평생을 살아버린 나에게 여생은 우주의 시간에 비교한다면 무(없음)와 다름없다. 무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면 편안해진다. 


지드래곤처럼 다섯 손가락 전부 다른 색으로 네일 컬러를 바른 손가락으로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지드래곤을 따라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내 손을 보더니 지드래곤 스타일이라고 해서 알게 된 것이다. 지드래곤이 네일 아트를 하고 다니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손 끝만은  화사하게 하고 지내고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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