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 조정래 문학전집 1
조정래 지음 / 해냄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대장경이라는 소설은 조정래씨가 1975년엔가 썼다는 소설이다. 그 문제의식, 즉 <몽고가 그토록 국토를 유린하는데 대장경을 새로 만들겠다는, 그 엄청난 불사를 일으키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비민중적인 것이다> 하는 것이 정말 날카롭다. 조정래씨의 문제의식, 그리고 주제의식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아-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대장경!! 감탄하고, 애써 보존하고, 세계에 널리 알리세- 하는 구태의연하고 지루한 생각이 아니다. 전란에 불타고 굶어죽고 찔려죽고 맞아죽고 끌려가고.... 그야말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어떻게 그런 큰 불사를 담담하게 이루었을까. 하는 문제의식은 정말로 본받아야 할 것이다.

글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크게 두갈래이다. 무신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방책>으로 시작되고 추진되는 불사. (추진되는 도중에 그들에게서도 불심을 확인하게 된다. 혹은 임금의 경우 처음부터 불심을 갖는다. 그러나 임금은 지극히 무기력하고 최우가 가지는 불심은 체제유지보다 앞서지 않는다.) 그리고, 민초들의 동원.

이 민초들의 동원도 단순한 <불심>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님이 중요하다. 만약 민초들이 가득한 불심으로 천지사방에서 몰려들었다, 하는 식의 묘사라면 이 소설은 시중의 그 수많은 소설들과 차별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몰려드는 민중은 혹은 가슴에 쌓인 한으로, 혹은 예술가적인 신념으로, 혹은 어차피 부초같은 놈의 인생 착한 일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그들이 단지 불심만으로 대장경을 이루어낸 것이 아님을 조정래는 그 특유의 필력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조정래의 최근 작품들 - 태백산맥, 아리랑과 비교할 때 당혹스러운 점이 있다. 사람은 늙으면 순해지기 마련이라고 표현이나 사상같은 것이 부드러워지는 법인데, 태백산맥-아리랑과 비교할때 이 대장경은 훨씬 선악의 구별이 약하다.

대장경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이는?

최우 - 최초에는 정권유지에 눈이 먼 독재자의 형상이나, 이야기가 나아가면서 그에 대한 작가의 눈길은 그렇게 차갑지가 않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 불심등을 밝히면서, 가끔 잊혀질만할때 '그래봐야 그는 독재자이고 정치가이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보여줄 뿐이다.

고종 - 미련하고 어리석으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눈길도 그렇게 차갑지 않다. 오히려 무능을 자탄하는 고종에게서 어떤 동정심까지도 자아내게 할 정도다.
몽고 - 악역이다. 말할 것 없이 악역이다. 사람을 죽이고, 겁탈하고, 불지르고, 끌고가는, 악역이다. 그러나 이 악역이 한번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야기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초반에 잠시 악행을 저지르나, 그 부분이 전체 글에서 삭제된다고 해도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무리를 주지 않는다. 단지 형식적인 악역일 뿐이다.

글쎄. 그렇다면 그 이유는, 마찬가지로 두가지쯤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대장경이라는, 부처의 안으로 모든 것이 크게 함께 하는 세상을 그리기 위하여. 찧고 까부는 것들 모두 부처 안에 있음을 말해주는...

둘째는 조정래씨의 역사인식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예를들면 80년 광주라든지.

이 소설이, 궁중 비사 내지는 전쟁사들을 피상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달리 취급되어야 하겠으나, 불만스러웠던 것은, 그의 시선이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되는 적은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엘리트로서, 그 시대의 엘리트인 수기대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러면서 가끔 장균, 근필, 등의 속으로 들어가서 보기도 한다. 세사람은 분명히 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태백산맥, 아리랑이 줄곧 평범한 사람들이 털어내는 이야기라는 것과 비교할 때에 확실히 연륜이 쌓이기 전 조정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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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1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1.
한 편의 잘된 역사소설은, 수십권의 관련서적을 읽는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과학 서적 한박스를 읽느니 태백산맥을 읽기를,
독립운동사 한박스를 읽느니 아리랑을 읽기를,
민속사 한 박스를 읽느니 장길산이나 임거정을 읽기를,
그리고.
80년 광주에 관한 책 한박스를 읽느니 봄날, 을 읽기를.

2.
올해는 1999년이다. '광주사태'는 이미 20년 전의 일이다.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먼지가 가라앉는데에는 일백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 말은 그 사건과 조금이라도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모조리 저세상에 가고 난 후에야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쓰여진 객관적인 역사는 아무에게도 의미
가 없는 죽은 역사다. 크로체식으로 말하자면 '연대기'일 뿐이다.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역사이다.

3.
80년대의 숱한 사회과학 도서들, 그리고 진보진영에서 발행하는
각종의 자료에 묘사된 80년의 광주는 민주와 혁명과 전사와 투쟁과,노동자의 불굴의 투혼이 살아 숨쉬는 불꽃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봄날,에서 묘사되는 광주는, 그렇게 이데올로기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들, '백성'들은 그런 어려운 가치를 알지 못했으며,
빨갱이를 미워하고 경상도 사람을 싫어하며 자그만 시비로 밥상을 뒤집으며 부부싸움을 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다른 어느 곳에 살고있던 사람들과도 똑같은, '백성'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한 백성들은, 죽지 않기 위해 몽둥이를 들었고,
죽지 않기 위해 총을 들었고,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총을 놓았다.
금남로에 모인 10만 군중도 물론 강조되어야 할 수치이지만
도청에서 옥쇄한 시민군이 겨우 백명안쪽이었다는 것 마찬가지로
강조되어야 할 수치이다.
광주 시민은 전사도 투사도 아니다.
어이없게 애타게 죽어간 이땅의, '백성'일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백성들을 죽였는가?

4.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 그리고 그 대답에 따르는 댓가를 위해 우리나라의 80년대는 그렇게도 뜨거웠고 그렇게도 아팠으며, 사회과학서적속에서 광주시민은 전사가 되고 투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임철우씨는 그러한 대답을 상당부분 자제한다. 교설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기껏해야 작중의 윤상현씨나 김상섭기자등을 통해 추측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명치, 오하사, 유이병등을 통해 드러나는 공수부대원들의 고뇌는 결코 광주시민을 학살한 것이 공수부대원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백성들을 죽였는가?

5.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아니, 정치를 매우 싫어한다.
정치인들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뉴스를 보지 않을 정도로.
박정희도 좋고 김영삼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남들이 좋다면 좋은가보고 싫다면 또 싫은가보다 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싫긴 하지만.)
정치에 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다.

6.
"아, 112에 신고를 해야 한다니께 그러네. 지금 김일성이가 보낸 무장 공비가 공수부대 옷을 입고서 시민들을 쥑일려고 하고 있는데 경찰은 뭣하는 것이냔 말이여." - 어떤 취객들의 대화중.

7.
나는 75년생이며 부산 출생이다. 80년 봄에 나는 아마도 쫀드기 같은 것을 물고 광안극장앞을 뛰어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저러나, 빨갱이들이 광주에서 난리라더라, 같은 뜻모를 말을 주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광주는, 실존으로서의 체험이 아니다. 책을 통한 추체험을 조금 아프게 한 편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 점점 더, 광주는, 잊혀질 것이다.
공수부대와 광주시민이 서로 악수까지 한 마당에.
(도대체 그건 무슨 코미디였단 말인가. 1980년의 공수부대 지휘관이 끝내 잘못이 없노라고 떳떳이 버티고 있는데, 1999년의 공수부대 사병이 도대체 뭘 잘못해서 광주시민에게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처참했던 봄날의 열흘간이, 조금 더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면 좋겠다. 좀 더 정확히는, 후배들에게 기억되면 좋겠다. 하다못해,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은 몇월 몇일이었나?] 라는 수학능력 객관식 문제의 정답을 외우는 방식으로라도.

8.
조금 더 주관적인 감상.
무협을 많이 읽는 나는, 글로 표현되는 선정성에는 그리 예민하지 않다. 기실 사람의 눈을 붙잡아 끄는 선정성으로는 섹스와 폭력만한 것이 없을텐데, 그것도 익숙해지고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책장을 넘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봄날은, 내가 읽어본 어떤 무협보다도 훨씬 더 잔혹하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팔기위해 마구 써댄 그 어떤 책보다도 더 잔혹하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잔혹한 사건들이 중원이나 신주꾸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극명한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임철우씨는, 가능한한 과거형 어미를 자재하고 있다.

9.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번이나 미친놈처럼 통곡하고, 혼자 술에 취해 망월동을 찾고, 혼자 소리를 질렀다는 임철우씨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테다.
그 고통스러운 추체험속에 그의 남은 생이 절반이 깎였다고 하더라도충분히 믿을 수 있다.

찬별.

감상문 다시 읽으며 :

광주라는 말을 떠올려본 것이 이 감상문을 쓰고나서 오늘이 처음이 아닐까... 그러나 내 감상적 추체험속에서 그 날의 광주는 여전히 아프다. 책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광주의 그 봄날은, 풍년집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는 여의도 정치학 박사들과, 386 세대들과, 전현직 대통령들에게는 정치적인 사건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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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향기 1
이인화 / 세계사 / 1998년 9월
평점 :
절판


이인화의 역사소설은,
고도의 지식인 소설로 보기 드문 꼼꼼한 고증을 하면서도
여기저기에서 잔잔한 잔재미를 준다.

초원의 향기, 는 고구려 유민인 고문간이
당나라에서부터 돌궐의 유목민 사회의 대장군이 되고
그리고 한 여자 - [동방교]의 교주격인 아란두라는 여자와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단상 몇가지.
1.
적어도 이 시대를 다루면서
이만큼의 꼼꼼하고 세밀한, 치밀한 고증을 한 글을 보기는
아주 보기 드물다.
그리고 화자의 역사관에 이만큼 객관적이고 진지한 무게가 느껴지는 소설도
참 보기 드물다.

삼국시대가 배경이 되는 소설의 열 가운데에 다섯은
삼국지의 무대를 우리나라로 옮기려는, 한국판 삼국지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로 쓰였다고 느꼈고 - 대륙의 한, 한삼국지...
나머지 열 가운데 셋은 고대 우리의 영광을 오늘에 되살리세, 하는 류의 경도된 민족주의가 우려되는 글들이었으며 - 잃어버린 왕국, 고구려를 위하여...
나머지 둘은, 굳이 삼국이 아니었더라도 문제가 없을 통속소설이었다 - 계백, 연개소문, 의자왕...
적어도 이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에서는 이만큼 진진한 역사적 긴장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소설이, 내 읽은 바로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2.
역사학자조차 객관적 모더니티를 포기한지가 이미 오래인데
소설가이랴 오죽하랴. 결국은 받아들이는 독자의 몫이겠는데
나는 다만 이 소설의 중요한 주제 (혹은 소재)로 등장하는
[동방교] 라는 것이 어쩐지 너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인화씨의 개인적 종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소설중에 등장하는 동방교의 여러 교리, 혹은 교리에 따른 행동들은 매우 기독교적 냄새가 풍겼다
- 마치 이문열의 대륙의 한, 을 읽으면서 상상력의 기반이 삼국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듯이, 초원의 향기의 기반은 기독교가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당나라에 당시 유행하던 경교등에 관한 자료는 매우 흥미있었지만 기독교와 관련된 작가의 어떤 편향을 보여주는 다른 자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3.
다만 쉽게 책장을 넘기기는 조금 어려운 소설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 1권 이후부터는 술렁술렁 책장을 넘기기는 했지만, - 일부러 그렇게 했지만 조금만 쉽게 써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그건 내가 쓰고 싶은 바이기도 하다.

4.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부분은 실존인물이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하는 문제는
특히 동방교라는 것에 관련된 부분은 작가가 각주라는 장치로 개입해서라도 조금 가려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
다른 이에게 강하고 추천하고 싶을만한 책은 못 되었는데
그 아쉬움은 위에서 말했던 [어려움] [기독교 냄새] 등이 되겠다. 하지만 이 시대에 관심이 있고, 역사소설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도 하겠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걸걸중상의 택껸, 이가도 휘하 청성파 네 도사의 무서운 무공,
죽어도 죽지 않는 오이, 등 몇가지의 신비스런 삽화는
치밀한 고증으로 짜여진 소설속에서, 어떤 역사적 생명력을 얻는 듯 하다.

찬별.


감상문 다시 읽고서...

이 감상문을 쓰고서, 그 날 대화방에서 신나게 떠들때 누군가가 "찬별님은 역사소설 비슷한 무협소설 아니면 무협소설 비슷한 역사소설만 읽으시네요"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_-
그 취향은 여직 변하지 않았다. -_-
그리고 지금 '다정' 이라는 역사 소설에 관한 평론을 손보는 중이었는데, 나는 최근 일년동안 초원의 향기에 대한 감상문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이 글과 구성이 똑같다. 신기하다.
취향만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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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혼 1 - 위대한 후예, 드래곤 북스 017
금강 지음 / 시공사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98. 8월.

<금강 - 발해의 혼>

1.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그리고 지금도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는 무협은 김용作 <영웅문>이다. 당시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전진교>, <정강지변>, <구처기>, <양양성>등의 사실들이 순전한 작가의 허구가 아니라 정사에 존재하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2.
나에게 충효라는 윤리를 가르쳐 준 것은 명심보감이 아니라 곽정이었고 의를 가르쳐 준 것은 맹자가 아니라 강남칠괴였으며 자비를 가르쳐준 것은 법구경이 아니라 남제 단황야였다. 국사나 국민윤리를 전폐하는 대신에, 잘 쓰여진 무협지 한질을 읽히고 작중 인물에 대해 코멘트를 가하는 교육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3.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역사관에 심취해있었다. 얼른 모화사대주의의 사상을 없애고 만주로 나아가 우리의 옛 영토를 되찾으며, 민족혼을 세상에 드넓게 휘날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동화 성경이 있고, 불경에는 만화 불경이 있으며, 한국사에는 이야기 한국사가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단고기가 있어야 한다.>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나중에 <대쥬신 제국사>라는 책이 나왔으니, 만화책이야 나온 셈인데, <발해의 혼>이라는 소설은 당시에 이미 나왔으되 내가 알지 못했던 탓에 읽지를 못했었다.

4.
내가 <환단고기>의 역사관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그 파시즘적 성격 때문이다.
- 지금이라도 핵무기로 무장하고 대군을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자. 우리땅을 되찾는 것이니 어떠냐.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 국민이 어느 정도 손상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잃어버린 민족혼을 되찾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5.
<발해의 혼>.
읽기전에 상당히 선입견으로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환단고기>의 파시즘을 민족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느끼한 글과 또다시 만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이었고,또 하나는 무협 소설 특유의 과장법과 성근 글쓰기속에 역사가 어떻게 과장되고 왜곡될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적어도 1권을 읽으면서는 그런 선입견을 반성해야 했다.
주인공 대운풍은 파시즘적 인물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었고, 그 형인 대운정이 전형적인 민족주의 파시스트 - 민족주의를 위하여 민족 구성원을 희생시키는 사람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갈등이 중요한 것으로 나왔으니 그 점에서 첫번째 선입견이 깨졌다.
왕안석등의 인물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것이 바로, 나같은 이의 선입견을 잠시 보류시키기 위하여 별 필연성없이 만든 것이 아닐까. 중국사에 대한 상세한 고증과 각주에서 나는 두번째의 선입견도 잠시 미루어두었다.
- 글을 다 읽었을때, 그러나 두가지의 선입견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전체주의에 대한 선입견은, 내가 제대로 찾아 읽지 못한 것일수도 있으나, 대운풍이 결국 택한 길이 어느 쪽인지 애매하다.
그는 발해인 파시스트와 송나라의 휴머니스트,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발해의 휴머니스트로 결정을 내린 듯 하였다. 그러나 그 선택이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고, 선택의 결과라는 것도 어쩐지 아리송했다. 다만 이것은, 글 한번 읽은 내 개인적 감상일 뿐이다.

7.
역사 고증에 대한 생각
상고사에 대한 여러 각주, 혹은 대운풍의 설명적 독백들이,
소설적인 언어로 승화되지 못하고, 너무 생경하게 드러난다.
고증부분이 꼭 각주나 등장인물의 독백등으로 처리되었어야 했을까. <단>, <한단고기>, <조선상고사>등의 재인용을 보는 것 같아서 언짢았다.
그 뿐이 아니니 한가지를 더하자면, <이러이러하게 무식을 탄로내는 어용 식민사학자>등의 표현이 각주에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과격한 표현을 내가 주로 접하던 것은 김태영씨의 <소설 한단고기> 혹은 <소설 다물>이었다. 이병도나 기타의 사학자들이 쓴 각론들이 이루어내는 역사상은 주로 논리적으로 단단한 데 비하여, 소설 한단고기 류는 이렇게 감정적으로 들떠있다는 느낌이다.
학문에 대한 반박이 감정적이면, 학문하는 이는 그 반박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또한 이병도 사학의 방법론을 생각해본다면 나올 수가 없는 비판이다. 환단고기에서 주장하는 <진실 그대로의 역사>야 말로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문헌고증>이고 <실증사학>이다. 바로 이병도씨가 터를 닦은 방법론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이병도선생이 학문 그 자체가 아닌 학맥 형성으로 태산북두의 위치에 오르기는 하였으되, 마땅히 그의 학문에 대해서 비판하려는 자는 학문으로 마주해야 한다. 감정적인 응수는 대폿집에서 할 일이다.

8.
책의 중반을 넘어설수록 소설은 점점 일반 무협지에 가까와진다. <단심교>라는 것의 실존 여부는 알 수 없으되, 설령 있었다하더라도 소설에서는 지나치게 과장되고 있다. 대운정이 단성교의 교주라는 사실은, 소설로서는 대단히 극적이고 충격적이나, 그 댓가로 이 소설의 역사적 향기는 급격히 떨어져버린다.

9.
발해가 재건국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고구려의 옛무공을 얻어내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라는 점에서 여러가지를 천천히 다시 생각해볼만하다.

10.
<발해의 혼>은 재미있는 무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초반부의 흥미유발외에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결코 역사소설이 될 수는 없겠다.

2000년 10월에 감상문을 다시 읽고서 :

첫째. 파시즘도 필요하다. 아니, 현실사회에서 국가가 균형있고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사회는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둘째. 발혼은 80년대 무협으로서 대단히 훌륭하다. 그런데 이 대단히는 상대적으로 대단히이다. 2000년인 오늘에는 주목을 받을 부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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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매우 재밌게 읽었다. 내 독서의 불균형때문인지는 몰라도, 주로 내가 "한번 잡아서 다 넘길 때 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책" 은 서양 대중소설류다.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뇌의 모티브 및 가장 큰 전거는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이다. 미친 사람이 정상인이고 정상인이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든지, 또는 책의 곳곳에서 직접 인용되기도 하는 "광기의 역사"의 부분부분들... 그 난해하기 짝이 없는 푸코의 생각을 굉장히 대중적으로 잘 풀어놓았다고 생각했다.

-- 위와 같은 요지로 어느 게시판에 감상문을 남겼는데, 그곳에서 누군가가 댓글을 달았다. "자기가 단순무식한지도 모르는 단순무식함.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유치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부분도 맞다. 사실 뇌, 라는 소설에서는 별반 대단한 것이 없었다. 남들도 많이 쓰는 구성 및 스토리 전개 방식, 그리고 어쩌면 어설프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는 메시지. 특이하다면 소재, 그리고 호흡을 조절하는 역량 정도라고 해야 할 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로 폄하할 내용은 아닐 것 같다. 최소한 이 소설은 나로 하여금 "내 행동의 동인은 무엇일까?" 라는 자문을 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역시 하는 말인데, 이수영의 쿠베린 같은 소설은 분명히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 단순무식하고도 유치찬란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어떤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뭐 예전에 쓴 리뷰라서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면, 타나토노트를 먼저 읽고 뇌를 읽었다면, 아마 이 글도 삼류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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