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제국 - 상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영어로 읽으면 버나드 웨버 라는 사실을 깨닫다.

2.
뇌, 개미 등은 재미있게 읽었고 심오함을 가볍게 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나토노트는 유치한 상상력을 기발하게 포장해냈다고 생각했고,
타나토노트의 실망이 워낙 컸기에 베르베르를 삼류로 생각하게 됐다.
(예스 24 같은 곳에 올라오는 타나토노트에 대한 극찬에 의아함을 가지면서)

천사들의 제국. 은 타나토노트의 연작이고, 타나토노트보다 더 못하다.
타나토노트는 기발함이라도 있었지만 천사들의 제국은 그마저도 없다.
다만 소재가 동심을 자극할 뿐. (보물섬이나 소년중앙 애독자였던 세대를 위한...)

3.
건질만한 내용 하나는, 어쩌면 윤회란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이라는 것.
1500년대를 살고 있는 내가 있고, 1000년을 살고 있는 내가 있고, BC 500년을 사는 내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
그래서 말인데, 베르베르는 짧은 시간에 어떤 철학에 심취하고
(그 학자가 뭐라고 말했는지를 연구한다기보다는 그 학자의 말에서부터 자기의 상상력을 펼쳐서)
그 생각으로 소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뇌. 는 미셸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소설로 옮겼다는 느낌이 강하다.
천사들의 제국은 고대 그리스 순환사관이나 또는 중용 같은 것에서 가져왔다는 느낌.

4.
그러나 아무튼 재밌게 쓰는 재주 하나는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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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947d3ic 2005-02-13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는 얼마나 잘났다고 베르베르 베르베르를 그렇게 평가하는지 모르겠네요 -_-
님은 평생동안 소설 한 편 신중히 생각해서 써보셨어요? 작가가 이 글을 쓰기위하여 자기의 상상력과 모든 자료를 뒤졌을텐데... 만약 님이 생각한 사후세계를 글로 펴냈는데 사람들이 그냥 유치하고 멍청한 소설이라 그러면 좋겠네요 이건 비판의 도를 넘어서서 부정하는 거 아닌가요?

찬별 2005-02-14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부정하면 안되나요? ^^;
베르베르와 개인적인 안면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어차피 전업작가의 출판된 책에 대해 독자로 만나는 관계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없던 건 재미없었다고. 재미있던건 재미있었다고.
 

야신의 이야기

야신은 눈을 떴다. 하지만 정신이 몽롱해서,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낯설었다. 언제나 들려오던 주인 휘넘 까레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또한 그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여주인 미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야신은 불쾌한 냄새를 맡았다. 고릿하고 푹 절은 냄새였다. 야신은 그것이 다른 동물, 또는 다른 사람의 냄새임을 알았다. 그 속에 섞이는 것은 매우 불쾌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휘넘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휘넘이 먹는 음식을 먹고 휘넘의 지붕 아래에서 잤다. 비록 인간의 껍질을 두르기는 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휘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쾌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야신은 몸 어디에선가 매우 거북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렵긴 한데 어디가 가려운지 모를 때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게다가 긁고 싶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지금 야신은 악몽을 꾸거나 또는 가위에 눌린 상태와 비슷했다. 심지어는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야신은 누워있는 자신의 주위에 모여있는 눈을 느낄 수 있었다. . 퀴퀴한 냄새가 코를 파고 들었다. 누군가가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는 서늘한 느낌도 들었다. 얼굴에 찬 물수건이 닿는 순간, 야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신은 벌떡 일어났다.

누워있던 야신이 벌떡 일어나자, 주위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물러났다.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몸 위에 걸친 사람들이었다. 애완 사람은 바지를 입지 않는데, 이들은 바지를 입고 있다.  야신은 그들의 얼굴빛에서 풍기는, 문화적이지 않은 냄새를 맡았다.

휘넘의 문화와 교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음식을 훔쳐먹으며 사는 사람들. 도둑 사람들이라고도 하고 거리의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야후" 라는 속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야신은 지금 자신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깨달았다.

"팔이 아플텐데... 아프지 않아? "

여러 야후 가운데, 중년의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신은 여자 사람을 조심스럽게 노려보다가, 자신의 어깨를 보았다. 야신은 그제야 오른 팔 팔꿈치 아래가 없음을 깨달았다. 야신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 앉으려 하자 야신이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오지마! "
"무서워 하지마, 너를 도우려고 해."
"가까이 오지마! 더러운 야후! "

야신이 앉은 걸음으로 기어서 도망쳤다. 야신은 거의 발악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여자가 움찔 했다가 도로 다가와 부드럽게 손을 내밀려 했다.

"저리 가! 내 몸에 손 대지 마! 야후 주제에! "

야신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야신은그가 "야후"라고 말할 때 마다 조금씩 사람들의 얼굴빛이 변해가는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듣자듣자 하니까, 애땡 꼴값을 떠는구만."

마침내 덩치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사람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이름은 히틀러였고, 별명은 불맞은 소 였다. 히틀러는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두개가 더 큰 거구였다. 그 히틀러가 화나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히틀러는 앞을 가로막는 사람을 모두 뿌리치고 나섰다.

"야후"가 거리의 사람에 대한 비속어라면, "애땡"은 애완사람에 대한 비속어였다. 다만 "야후"는 휘넘이 만든 호칭이었고, "애땡"은 거리의 사람들이 애완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야신은 거구의 히틀러가 주변 사람들을 뿌리치고 다가오자, 겁에 질렸다. 야신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물러나다가, 바닥에 떨어진 벽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힘껏 히틀러에게 집어던졌다. 벽돌이 날아가서 히틀러의 얼굴을 맞췄다. 야신의 던지는 힘이 약하고, 그리고 히틀러의 덩치가 거대했기 때문에 큰 타격은 없었다. 히틀러의 화만 더 돋구는 결과가 되었다.

히틀러는 달려가서 야신의 멱살을 쥐었다. 히틀러는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힘도 엄청났다. 그는 한 손으로 야신을 번쩍 들어올렸다. 야신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둥거렸다.

"너는 오늘 죽었다! "

히틀러가 화를 내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히틀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이 차갑고 딱딱해서, 히틀러는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푸틴! "

히틀러가 허겁지겁 돌아섰다. 야신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공중에 매달렸던 공포가 가시지 않아, 야신의 얼굴빛은 여전히 창백했다. 땅에 부딪히면서, 잘린 팔의 고통이 심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겁에 질려 감히 소리도 내지 못했다.

푸틴이라 불린 사내는 광대뼈가 나오고, 눈자위는 검었다. 호리호리했지만 눈에서는 형형한 에너지를 뿜고 있었으며, 또한 영롱한 총기를 담고 있었다.

"뭘 하고 있었나, 히틀러? "
"애땡 녀석이 열받게 해서 말이야. "
"애땡? "

푸틴이 야신을 흘낏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야신은 푸틴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에 이채가 도는 것을 알아차렸다. 히틀러는 말을 이었다.

"애땡 놈, 팔 부러져서 여기 누워있는 거 보면 뻔하잖아. 휘넘한테 얻어맞아서 다쳤는데, 휘넘 놈이 돈은 아까운데 차마 버리지는 못해서 여기다가 내다버리고 간 걸꺼 아냐. 엘리자벳 아줌마가 치료해주려고 했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더러운 야후는 저리가라고 그러길래. 버릇 좀 고쳐줄려고."

야신은 히틀러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야신은 겁에 질린 것도, 팔이 아픈 것도 잊고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 하지 마! 헛소리 하지 마! "

히틀러가 껄껄 거리면서 웃었다.

"저 봐, 애땡이라니까."

야신은 히틀러의 껄껄거림을 들으면서, 히틀러의 말이 거짓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틀림없이 까레무에게 얻어맞아 여기에 왔다. 그리고 미싸는 자기를 여기에 놔두고는 눈물을 지으면서 사라졌다.

애완사람이라고 해서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공원을 산책하며 다른 애완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때면 가끔, 휘넘에게 버림받는 애완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휴가를 갈 때 귀찮아서 길에 버린다거나, 또는 늙고 병든 애완사람에게 주사를 놓아 죽인다거나, 심지어는 기르던 애완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모두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야신에게 까레무는 아버지와 같았고, 미싸는 어머니와 같았다. 부모에게 일순에 상처와 배신을 함께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야신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거짓말마! 거짓말 마라니까! 더러운 야후 자식들, 나를 속이지 마!"

더러운 야후라는 말에 히틀러의 인상이 다시 험악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히틀러가 화를 낼 겨를도 미처 없었다. 야신이 벼락같이 히틀러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야신은 나이도 어리지만, 같은 나이로도 체구가 왜소했다. 거구의 히틀러에 비하자면 어깨는 커녕 배꼽에 겨우 닿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야신이 달려드는 기세는 엄청났다. 야신이 펄쩍 뛰어 박치기를 하자, 가슴을 제대로 얻어맞은 히틀러가 벌러덩 뒤로 나가떨어졌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원래 그들이 거리에서 살 때, 히틀러의 괴력은 볼만큼 보아왔다. 심지어는 휘넘 두세명을 단숨에 쓰러뜨릴 정도의 괴력이었다. 그런 히틀러가 누군가에게 맞아서 쓰러지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야신은 주변에서 말릴 틈도 없이 히틀러를 마구 짓밟았다. 히틀러는 가슴에 당한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아서, 꼼짝도 못하고 야신이 때리는데로 맞았다.

조금 뒤늦게야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야신을 말리려고 들었다. 하지만 야신이 획 돌아서며 주위를 쏘아보자, 아무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푸틴이 야신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푸틴은 야신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괴력을 내고는 하는데, 푸틴은 야신이 지금 그런 상태임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푸틴은 주위 사람을 제치고 야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히틀러를 마구 두들겨패던 야신이 움찔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푸틴의 움푹 들어간 눈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졌다. 야신은 그 눈빛이 가슴속으로 들어온다고 느꼈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야신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야신은 곧 얌전해졌다.

주위 사람들은 푸틴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푸틴의 저 놀라운 능력은 여러 번 보는 것이지만, 볼 때 마다 놀라왔다.

푸틴이 사라미 동물병원에 오기 전에는 히틀러가 이 곳을 다스렸다. 거리의 사람 출신으로 괴력을 가진 히틀러가 다른 사람을 지배할 때, 다른 사람들의 생활은 그렇게 평화롭지는 못했다. 푸틴이 오고서 단 몇일만에 히틀러는 푸틴을 순순히 이 곳의 리더로 인정했다. 그것은 매우 놀라웠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혹하게 대하던 히틀러였다.

푸틴이 말했다.

"난 너의 상처를 이해해."

야신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푸틴은 잠시 후에, 여자 사람에게 말했다.

"이 친구는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하지만 팔도 아프다. 마음의 상처는 내가 치료하도록 도와줄테니, 팔의 상처를 가라앉히도록 약을 주시오."

여자 사람 하나가 조심스럽게 야신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야신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팔에 놓은 주사는 농도가 진한 진통제였다. 야신은 곧 졸음을 느꼈다.

"김대중 할아버지를 뵈러 가자."

푸틴은 야신을 이끌고 방을 나갔다. 그들이 방을 나가고서야 사람들이 쓰러진 히틀러의 부상을 치료하느라 비상이었다.

야신은 주사를 맞고 부터 반쯤 수면상태였다. 언제 그렇게 불처럼 화를 냈는지가 스스로 의아스러운 지경이었다. 잘려나간 팔은 남의 살처럼 무감각했다. 푸틴이 이끄는데로 따라서 걷기는 하지만, 그저 기계적으로 발이 움직일 뿐이었다.

푸틴은 걸음을 옮기며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자네의 이름은 야신이야. 맞지? "

야신이 응, 하고 대답했다. 야신은 자기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지만, 푸틴이 자기 이름을 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았다.

"야신, 오늘 네가 듣는 말들을 너는 평생 잊지 못할꺼야."

푸틴이 말했다. 반 수면 상태의 야신은 꿈속에서 듣는 것처럼 푸틴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푸틴의 말대로, 정말 자신은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뵈러 가는 김대중 할아버지는 현존 인간중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분이다. 휘넘의 말을 들을 수 있고, 휘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분이지. 그와 동시에 고대에 살던 인간들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분이다. 이제 연세가 백 이십 살이나 되셨으니, 네가 석달만 늦게 이 병원에 왔다면 김대중 할아버지를 뵙지 못했을 수도 있어."

푸틴이 미로같은 곳을 지났다. 덩치 크고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 두 사람이 방 앞을 지키고 서있다가, 푸틴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푸틴이 문을 열고 작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갈하게 치워진 방에서는 상큼한 오렌지 냄새와 함께 노인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김대중 노인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주름이 얼굴을 덮고 있었으며, 몸은 치면 부러질 것 처럼 삭아있었다. 원래 사람은 나이가 칠십이 넘으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별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런데 백살이 넘으면 동물과 식물의 구별도 별 필요가 없다. 김대중은 그 만큼 늙은 사람이었다. 그가 고목나무가 아닌 사람임을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는, 사려깊은 눈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지혜의 빛이었다.

김대중이 야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가볍게 이채가 돌았다. 오래 살수록 느는 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김대중은 야신을 보자 마자 야신에 대한 몇 가지를 즉시 알아냈다. 야신이 애완사람이라는 것, 이제까지 스스로를 휘넘이라고 착각할만큼 철없다는 것, 최근의 모종의 사건 때문에 충격을 받고 원한을 품었다는 것. 그리고, 주변에서 흔히 찾아보기 힘들만큼 뛰어난 인재라는 것 까지 김대중은 알아차렸다.

김대중이 가볍게 입술을 달싹였다. 고목나무같은 외모와 달리, 김대중의 발음은 비교적 또렷하고 정확했다. 야신은 첫 마디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조금 신경을 쓰자 모든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야신이라고 했지. 반갑네. 얼굴을 보니까 사람으로서의 삶이 즐겁지 않은가보군. 내 말이 맞나?"

야신은 대꾸를 하지 않았는데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틀전 까지만 해도 야신은 행복했다. 그는 휘넘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오늘 그는 팔이 잘린 채 버려졌다. 야신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너무 속단하지는 말게. 삶이란 게 꼭 그렇지는 않늬라. 늬는 지금 애완사람으로서의 삶이 즐겁지 않은거야. 사람으로서의 삶은 아직 제대로 시작을 해보지 않았늬라."

야신의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불과 오백년 전에는 이 세상의 주인은 휘넘이 아니고 사람이었늬라. 휘넘들의 책에 써져있는 이야기지. 사람은 짐승을 키우고 문명을 만들어서 살았지. 그 시절에 휘넘은 사람이 타기 위해  기르는 짐승에 불과했었늬라. 마치 지금의 휘넘이 코끼리를 타고 다니듯이 말이다."

야신은 김대중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휘넘을 타고 다녔다니, 말도 안된다. 하지만 푸틴과 김대중의 눈에는 장난기라고는 없었다.

"지금의 휘넘이 사용하는 핸드폰이니, 컴퓨터 같은 것들은 원래 인간이 발명한 문명이었늬라. 지금의 휘넘들처럼 거대한 정부를 세우고, 화폐경제를 이룩했다. 비행기와 탱크를 타고 다녔고, 농사와 축산을 했다."

김대중의 말은 점입가경이었다. 야신은 자기 스스로도 사람이지만, 사람이 핸드폰으로 전화통화를 한다거나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가끔 휘넘들이 보는 텔레비젼을 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코너에서나 사람이 컴퓨터를 만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야신이 좀처럼 믿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푸틴이 서재 한 쪽을 열어 화보집 몇 권을 꺼냈다. 화보집은 휘넘의 언어로 쓰여져 있지만, 그림은 볼 수 있었다. 야신은 당혹감을 느꼈다.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바퀴달린 나무 집에 앉아있는데, 여러 휘넘들이 그 나무집을 끌고 있는 그림이었다. 한 장을 넘기자, 낡고 퀴퀴한 집에 수백 명의 휘넘이 갇혀있는 그림이 있었다. 그림속에서는 사람 하나가 보기에도 역겨운 밀죽 같은 것을 휘넘에게 먹이고 있었다. 그 다음 장에는 놀랍게도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김대중이 그림책을 도로 가져가서 연표를 펼쳤다. 그리고 연표를 느릿느릿 읽기 시작했다.

- 마이너스 휘넘 200년, 사람의 산업혁명
- 마이너스 휘넘 180년, 첫 번째 휘넘의 지구 불시착
- 마이너스 휘넘 100년, 사람의 제 이차 세계 대전쟁
- 마이너스 휘넘 50년, 사람의 정보 혁명과 인터넷
- 마이너스 휘넘 10년, 사람의 제 삼차 세계 대전쟁
- 마이너스 휘넘 8년, 휘넘의 우주선 "띠까흐빠리" 지구 착륙
- 마이너스 휘넘 5년, 사람과 휘넘의 전쟁 시작
- 마이너스 휘넘 3년, 사람의 무조건 항복 선언
- 마이너스 휘넘 1년, 사람 사이에 전염병 창궐로 인구 급감
- 휘넘 원년, 띠까흐빠리 15 지구 상륙. 휘넘의 식민지 "아쓰흐" 개국

김대중은 읽었던 내용을 야신에게 반복하도록 했다. 야신은 내용 때문에 충격을 받은 듯 하다가, 잠시 후에 방금 들었던 것을 암송했다. 한 자의 틀림도 없었다. 푸틴이 입을 떡 벌렸다. 김대중도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야신의 암기력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늬가 읽었던 이야기가 뭔지 알겠느냐. 그것이 바로 사람의 별인 "지구"가 휘넘에게 빼앗겨 휘넘 식민지인 "아쓰흐"가 되기까지의 역사늬라."

야신은 골치아픈 표정을 지었다. 왜 자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야. 바로 휘넘들을 지구상에서 몰아내는 방법 뿐이늬라."

야신이 놀란 표정을 짓기도 전에, 푸틴이 나직하게 김대중의 말을 끝맺었다.

"모두 쫓아내든지, 아니면 모두 죽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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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레무의 이야기

까레무는 애완 사람을 싫어했다. 까레무가 좋아하는 것은 황색 암사람의 야들야들한 살코기였다. 미싸에게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까레무는 사람 낚시도 좋아했다. 결혼 전에는 적어도 석달에 한 번은 사냥을 나가서 야생 사람을 사냥했다. 직장에서 책임이 커졌기 때문에시간이 없어서 야생 사람 사냥은 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이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실내 사람 사냥이라도 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래서 까레무는 아내 미싸가 애완 사람을 데려온다고 했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워낙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허락을 했다. 그것이 두 휘넘간 불화의 원인이 될 줄은 몰랐다. 까레무가 태어난지 천일이 지났다는 순종 이라크 사람인 "야신"을 데려왔을 때, 처음에는 가끔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던 야신이 이제 나이가 오천 일이 넘도록 아직 두 휘넘은 아기를 낳지 못했고, 게다가 얼마 전에 까레무는 직장까지 잃었다. 그런 뒤로 두 휘넘은 점점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마침내 까레무는 스스로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한 시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야신을 걷어찼다. 아니나 다를까, 허약하기 짝이 없는 애완사람은 단번에 팔이 부러졌다. 미싸는 팔이 부러진 야신을 데리고 나가더니, 축 늘어진 어깨로 혼자 돌아왔다.

까레무는 애완사람을 싫어하는데 미싸는 애완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출신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까레무는 휘넘의 별인 모쪼뜨까 행성에서 지구로 이주해온 1세대의 후손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만일 쯤 전에, 까레무의 증조할아버지는 척박한 지구에서 휘넘의 터전을 만들고 있었다. 그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지구의 악천후나 대기, 이름모를 병균이 아니었다. 바로 사람이라는 괴상한 짐승이었다. 이들이 쏘아대는 화약과 가스, 납덩이는 수많은 휘넘의 생명을 앗아갔다.

하지만 개척의 와중에 휘넘들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도움이 되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사람고기는 맛이 있고 영양이 풍부하며, 다른 짐승에 비해 잡기가 쉬웠다. 게다가 독성이 없으며 지구라는 별 어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량자원이었다. 그래서 개척자들에게 사람은 가장 큰 적이며 동시에 가장 큰 도움이었다.

조상이 그랬으니 후손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가풍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삼대 정도는 가풍이 이어질 수 있기 마련이다. 까레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옛날의 그 개척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미싸는 달랐다. 미싸는 모쪼뜨까별에서 태어나서, 이만 일이 넘게 그곳에사 자랐다. 어린 시절과 소녀기를 모두 그곳에서 자랐다. 모쪼뜨까별에서 사람은 매우 부유한 사람이나 키울 수 있는 진귀한 애완동물이었다. 그래서 미싸는 애완사람을 특히 좋아하는 것이었다.

두 휘넘은 서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두 휘넘은 사흘동안 서로 한 마디의 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고 했다. 또한 비온 뒤에 땅이 굳다고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싸였다.

"여보, 그동안 당신을 챙기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은 애완사람보다 열 배 백 배 더 중요한 존재에요. 그동안 당신을 잊고 있었어요."

"나도 미안해 여보. 난 야신이 미웠던 것이 아니야. 그리고 당신이 야신을 아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내가 일자리를 잃고서 신경이 날카로워졌었던 것 뿐이야. 당신이 원한다면 야신을 도로 데려다가 키워도 좋아."

"오, 여보. 나도 반성을 많이 했어요. 솔직히 나는 애완사람을 다시 기르면, 또 전처럼 당신에게 소홀해질까봐 겁나요. 야신에겐 미안하지만 난 야신보다는 당신이 더 소중해요."

"고마워 당신."

두 휘넘이 다정히 껴안고 서로의 콧잔등을 핥아주었다.

두 휘넘은 화해를 한 기념으로, 가까운 레스토랑에 갔다. 여러 요리의 구색은 맞춰뒀지만 값은 비싸지 않은 식당이었다. 두 휘넘은 메뉴판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먼저 미싸가 코끼로 코 통구이를 주문했다. 까레무가 메뉴판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자, 미싸가 대신 주문했다.

"당신 암사람 허벅지 먹어요."

사람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눈치를 보던 까레무는, 미싸의 배려에 감동했다. 그 때 마침 누군가가 까레무에게 아는 체를 했다.

"까레무! "

까레무가 돌아봤더니, 옛날 대학시절의 친구였던 히쁘끼 였다.

"이게 얼마만인가 히쁘끼! 이봐 미싸, 내 대학때 가장 친한 친구인 히쁘끼야. 인사해."

"제수씨가 미인이십니다. 식사나 같이 하시죠."

히쁘끼는 까레무의 자리에 합석했다. 두 휘넘은 사실 대학 시절에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특히, 그들은 해마다 방학이면 교외로 사람 사냥을 하러 다니는 단짝이었다. 졸업을 한 이후 각자 생활에 바쁜 중에 연락이 끊겼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둘 모두 매우 반가워했다.

두 휘넘은 한참이나 학창시절의 추억담을 나눴다. 그러는 중에 요리가 나왔는데, 히쁘끼의 요리 역시 암사람 스테이크였다. 하지만 히쁘끼의 스테이크는 좀 더 육질이 부드럽고 연한 "허벅지 안창살"이었다. 까레무가 먹는 퍽퍽한 "허벅지 바깥살" 보다는 좀 더 비싼 요리였다. 그러고보니 히쁘끼가 입고 있는 옷은 최고급 메이커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봐, 히쁘끼. 자넨 돈을 잘 버는 것 같군."

"우연히 공무원 자리를 하나 얻었을 뿐이네. 지금 사라미 동물병원의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지."

미싸의 눈에 부러운 빛이 돌았다. 휘넘의 사회에서 공무원이라면 최고의 직장이었다. 별볼일 없는 직장 마저도 해고당한 까레무의 형편을 생각하자니 부럽기 짝이 없었다. 미싸가 잠시 후에 심통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병원 부원장님이 사람 고기를 좋아한다니, 우스운 일이로군요."

"아하하, 그건 마치 목장 주인이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게 사람고기인데, 사람고기를 안 먹는게 말이 됩니까. 그 뭐냐, 요즘 모쪼뜨까 별에서는 브리지또 빠뜨롱이라는 배우가 사람 안 먹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이야 애완동물의 일종일 뿐인데, 그걸 가지고 남이 먹든지 말든지 간섭할 까닭이 뭡니까? 그렇지 않은가, 까레무? "

히쁘끼가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미싸의 말투에 섞인 빈정거림을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싸 역시 부러움 때문에 심통이 난 상태였다.

"나도 봤어요. 브리지또 빠뜨롱 여사의 말이 신문에 나온 것을 봤죠. 하지만 나는 빠뜨롱 여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사람고기를 먹는다고 굳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휘넘이 휘넘으로서의 자부심을 찾으려면 적어도 애완용으로 기르는 짐승을 먹어서는 안돼요."

"모쪼뜨까 별에서야 사람이 애완용일 뿐이겠죠. 하지만 지구에서야 어디 그렇습니까? 집에는 애완용 사람이 있고, 아파트에는 식용 사람이 있습니다. 거리에는 도둑사람 야후가 있고, 들에는 야생사람이 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 에이즈니 싸쓰니 하는 병에 걸려본 적이 있으시죠? 그게 다름아닌 사람이 옮기는 병입니다.
"

"사람고기를 식용으로 먹는 건 어디 안전한 줄 아세요? 심장질환이니 소화기 질환은 십중 팔구 육식, 그것도 특히 지방이 많은 암사람 고기를 먹어서 생기는 질병이에요."

"사람고기든 소고기이든 육류가 몸에 부담을 주는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사람고기 중에도 흰사람이나 검은 사람 고기와 달리, 노란사람 고기는 몸에 좋아요. 성분 자체가 다르죠. 소화도 잘 되고 흡수도 잘 되죠."

"노란 사람 고기에는 지방이 더 많아요."

"지방이 많은 유방살이나 갈비살을 먹으면 그렇겠죠. 하지만 허벅지 살에는 지방보다 단백질이 더 풍부합니다."

"문화휘넘은 사람고기를 먹지 않아요! "

말싸움에서 밀린 미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의 말싸움이 고조되자 까레무가 중재에 나섰다.

"이봐, 히쁘끼, 오랜만에 만난 내 얼굴을 봐서 그만하게. 여보, 아까 낮에 나하고 약속했던 것 기억하지? "

까레무가 말하는 도중에 미싸가 벌떡 일어나더니, 물컵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한 컵은 까레무에게, 한 컵은 히쁘끼에게 부어버렸다. 돈 못 버는 까레무를 남편으로 둔 신세가 한심해서 저지른 짓이다. 그러나 금방 저지르고도 후회할 짓이었다. 후회한다고 뾰족한 수도 없어, 미싸는 휙 돌아서서 식당을 빠져나왔다.

까레무와 히쁘끼는 찬물을 뒤집어쓰고 씩씩거렸다. 특히 까레무는 오랫만에 만난 친구에게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히쁘끼는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면서, 오히려 까레무를 달랬다.

"오늘 집에 들어가기는 틀렸지? 마누라랑 이렇게 대판 싸웠으니 말이야. 나는 혼자 살고 있으니까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서 자자."

까레무는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사실 미싸에 대해서도 분통이 터져,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히쁘끼와 함께 술이라도 실컷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까레무가 고개를 끄떡이자, 히쁘끼가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은 고가의 물건이었으므로 까레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데 히쁘끼가 통화하는 걸 보니, 가까이에 있는 운전사를 보낸 모양이었다.

곧 새까만 색의 고급 승용차가 다가왔다. 비싼 외제차였다. 기사는 까레무와 히쁘끼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히쁘끼의 집에 도착한 까레무는 입을 쩍 벌렸다. 까레무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 저택이었다. 대문에서 집까지 차를 타고도 몇 분이 걸렸는데, 그 도로 양쪽에는 정원과 호수가 번갈아 있었다.

히쁘끼가 도착하자, 전라인데다가 온 몸의 털을 깎고 주요 부위에만 아슬아슬하게 털을 남긴 암 휘넘들이 히쁘끼를 반겼다. 히쁘끼가 눈짓을 하자, 암 휘넘 중 둘이 까레무에게 엉겨들었다. 여자라고는 미싸밖에 몰랐던 까레무는 숨이 턱 막혔다.

이미 안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귀한 술이었다. 양 옆에 붙어앉은 여자 휘넘들이 음식 시중을 들어주며 교태를 부렸다. 여자 휘넘 하나가 젓가락으로 건포도알 같은 것을 집어주는데, 그 맛이 너무 기가 막혀서 까레무가 물어봤다.

"암사람 젖꼭지회 지요. 암 사람 한 마리에서 두 알 밖에 안 나와요. 그러니 한 접시면 어지간한 사람 한 달 봉급보다 비싸요. 얼마나 맛있는데요, 부드러우면서 쫄깃쫄깃한게."

여자 휘넘이 또 한 알을 까레무의 입에 넣어주면서 말했다. 까레무는 눈을 감고 입 속에서 그 부드러운 알맹이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씹었다. 톡 터지면서 육즙이 퍼졌다.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었을까 하고 놀랄만큼 대단한 맛이었다.

까레무는 암사람 젖꼭지 회를 안주로 여러 잔의 술을 마셨다. 술 또한 이름도 모를 귀하고 비싼 술이었다. 까레무는 금세 기분좋게 취해서 해롱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사라미 동물병원 원장이라면 고위 공무원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공무원이 버는 돈이란 한계가 있다. 급여를 가지고는 일인분에 어지간한 사람 한달 봉급값과 같다는 암사람 젖꼭지회를 먹을 수는 없다.

"히쁘끼, 도대체 자네는 무슨 수로 돈을 벌었나? "

히쁘끼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술에 취한 까레무가 여러 차례나 반복해서 물어봤다. 그러자 히쁘끼가 술 한 잔을 마시더니, 눈짓을 했다. 그러자 여지껏 시중을 들던 여자 휘넘들이 자리를 비웠다. 교성과 웃음소리가 사라진 방은 급작스럽게 조용해져서,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 때 히쁘끼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돈의 전부인줄 알아? 아냐. 너에게 돈을 줄 수도 있어."

히쁘끼가 지갑에서 백지 수표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거기다가 먼저 이름을 썼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히쁘끼가 돈을 주겠다고 하자, 까레무는 당황하면서도 의아한 빛이 돌았다.

- 까레무 짜냑

까레무가 쳐다보는 가운데, 히쁘끼가 수표에 숫자를 적어갔다. 1... 10... 100... 1000... 10000... 100000... 1000000
히쁘끼는 백만 위니를 적었다. 백만 위니면 까레무가 이주일 가량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까레무에게는 매우 요긴한 돈이다. 까레무가 희색이 만면해서 수표를 받으려고 하는데 히쁘끼가 수표를 얼른 가로챘다.

히쁘끼는 까레무의 얼굴을 보더니 수표에 0을 하나 더 그렸다. 천만 위니! 까레무의 반년치 월급이다. 액수가 커지자 까레무는 쉽게 수표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히쁘끼는 까레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수표의 숫자 뒤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려넣었다. 일억 위니! 까레무는 히쁘끼가 취중에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난이라기에는 히쁘끼의 표정이 진지했다. 히쁘끼는 까레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수표를 까레무에게 건넸다.

"이걸 자네에게 주겠네. 이건 단지 계약금일 뿐이야. 나를 위해서 훌륭하게 일해준다면, 이 뒤에 0을 하나 더 붙여서 주겠네."

수표를 받아쥔 까레무의 손이 덜덜 떨렸다. 히쁘끼는 멈추지 않고 수표 한장을 마저 적었다. 십억 위니의 수표였다. 히쁘끼는 십억 위니를 까레무의 눈앞에서 몇번 흔들어 보인 다음, 자기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다면 평생 벌 수 없는 큰 돈이다. 까레무가 다시금 마른 침을 삼켰다. 까레무의 시선이 안타깝게 수표를 따라갔다.

"이 돈도 자네 것이 될 수 있어."

히쁘끼가 목소리를 낮췄다.

"나를 위해서 한 번만 일해준다면 말이지."

까레무가 고개를 끄떡였다.

"뭐든지! 내 목숨을 버리는 일을 빼고는 뭐든지 하겠네."

히쁘끼가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자네와 나는 계약을 했네. 자네는 나를 위해서 일하기로 한 거야. 내가 자네에게 맡길 일은 간단한 걸세."

히쁘끼가 까레무의 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길지 않은 밀담이었다. 잔뜩 긴장했던 까레무의 표정은, 히쁘끼가 이야기를 함에 따라 점점 펴졌다. 위험 부담이 있는 일임에는 틀림 없다. 그렇지만, 목숨을 버리고 어쩌고 할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어떤가? "
"좋아! 틀림없이 완수하겠네! "

까레무가 고개를 끄떡이자, 히쁘끼가 다짐을 받으며 말했다.

"틀림없이 해야 하네. 일을 끝낼 때 까지 자네는 내 근처에 와서는 안되네. 자네와 나는 지난 10년간 만난 적이 없는 사이며, 오늘도 우리는 우연히 식당에서 만났을 뿐이야. 그래서 함께 식사를 마쳤고, 자네는 부부싸움을 한 끝에 혼자서 화풀이를 하려고 사창가에 갔어. 우리 집에 온 적은 없는거야."
"사창가... 는 좀 그런데... 어디 다른 곳으로 알리바이를 정하면 안될까? "
"부부싸움한 남편이 외박을 했다면 어디서 잤다고 하는게 가장 적당하겠나? "

까레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바이야 아무려면 어떨까. 사창가가 아니라 문둥이굴이라도 괜찮았다. 10억위니! 히쁘끼가 다시 손뼉을 쳤다. 아까 나갔던 여자 휘넘들이 요란한 교성을 지르며 다시 뛰어들어왔다. 까레무는 암사람 젖꼭지 회를 싫도록 먹었다. 싫도록 먹고 마신 까레무는, 히쁘끼가 제공한 차를 타고 사창가에 가서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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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길동과 김영희의 이야기...

고길동은 눈을 떴다. 정신이 지나치게 맑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성격이 게을러, 잠자리에서 몇 시간이나 뭉그적거리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신이 너무 또렷해서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고길동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로보트가 된 것처럼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만을 겨우 힘들게 들어올렸을 뿐이다.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달랐다. 지금쯤 해가 중천에 떠있어야 할, 어수선한 그의 옥탑방이 아니었다. 반투명한 유리관과, 유리관 너머에 얼핏 보기에도 삐까번쩍한 여러 불빛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그제야 고길동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 곳은 그의 자취방이 아니라 대옹제약의 실험실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못해 몇 년간을 빈둥거리던 끝에 그는 대옹제약의 실험실에 계약직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는 냉동숙면 프로젝트에 참가했는데, 허드랫일들만 하고 월급도 적었으며 프로젝트가 끝나면 해고될 팔자였다. 그 때 팀장이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프로젝트 파일럿"으로 참가하면 특별 보너스와 함께 정직원으로 승격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표현이 좋아 "프로젝트 파일럿"이지, 결국 실험용 모르모트가 되라는 것이었다.

고길동은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당장 놀러다닐 돈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특별 보너스를 삼백만원이나 준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기 때문이다. 고길동은 먼저 이틀간 단식을 했고, 그런 다음 회사의 지하에 특별히 준비된 연구실로 내려갔다.

그는 연구실에서 김영희를 만났다. 김영희는 고길동과 마찬가지로 프로젝트 파일럿으로 참가한 여자였다. 나이는 그보다 몇 살 어렸고, 대학생으로 보였는데, 꼭 이모티콘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녀가 웃을 때는 통신 기호인 ^O^ 같은 얼굴이 연상되고, 인상을 찌푸리면 -_- 과 같은 표정이 연상되었으며, 눈을 초롱초롱 뜨고 이야기르 할 때는 '_' 와 같은 표정이 연상되었다.

실험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냉동숙면 프로젝트에 참가한 동기가 좀 색달랐다. '재밌을 것 같아서' 였다. 아무 생각없이 집에서 잘 잠 냉동실에서 하루 잔다고 생각한 고길동과는 많이 달랐다. 김영희에게 냉동숙면 프로젝트는 흥미진진한 모험이었다. 고길동은 내심 스스로가 돈 벌려고 별 짓을 다 한다고 느낀데 비해, 김영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작전의 파일럿이 된 것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대형식당의 냉장고 같이 생긴 기계속으로 안내되었다. 고길동은, 비록 실험실의 모르모트 신세이나마 밀폐된 공간에서 한 여자와 함께 잔다는 것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하지만 김영희는 고길동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자신이 겪게 될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척 춥다고 생각했다. 추워서 이불을 돌돌 말고 벌벌 떨다가, 어느 순간 눈꺼풀이 덮혔다. 그것이 잠들기 전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지금 맑은 정신으로 눈을 떴는데, 몸이 시체처럼 뻣뻣한 것이었다.

고길동은 힘겹게 눈을 뜨고서 공기를 들이마셨다. 조금씩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고길동은 먼저 고개를 돌려 김영희를 보았다. 잠들기 전, 자신이 보았던 바로 그 자리에 김영희가 있었다. 그런데 고길동은 눈을 의심했다. 김영희의 옷이 너덜너덜 삭아, 속살이 훤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고길동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옷이 삭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면으로 된 속옷은 이미 완전히 삭아 없어진지 오래였고, 병원에서 제공했던 잠옷 또한 약간의 나일론 성분만 남아있을 뿐 면 성분은 삭아 없어졌다.

수면실에서는 위잉- 하는 기계소리가 나고 있었다. 공기는 따뜻하지만, 근처에 흥건한 물이 고여있는 걸로 봐서, 냉동상태에서 따뜻한 기온이 되돌아온지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놀라고 당황하는 순간, 김영희가 힘겹게 눈을 떴다. 고길동은 화들짝 놀라 얼른 몸을 숙이며 알몸을 가렸다. 김영희도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고길동이 말했다.

"이상해요.*--*"
"그래요, 이상해요. *ㅡㅡ*  우리가 왜 옷을 벗고 있죠? ㅡ.ㅡ+"
"옷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무실이 이상해요."

그제야 김영희 또한 옷만 삭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침대도, 전등도, 이불도, 벽도. 모든 것이 먼지를 먹고 푹 삭아 있었다. 고길동은 수면실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자신이 엊그제까지 일하던 곳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수백 년이나 지난 것 같았다. 연구 서적과 서류는 바스러져서 흩어지고, 금속으로 된 실험 장치들에는 말할 수 없이 심한 녹이 슬었다. 컴퓨터는 삭았으며, 나무는 좀이 쓸었다.

김영희는 옷을 벗고 있는 부끄러움 때문에 곧장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 뒤에 숨어 바깥을 보면서, 고길동과 비슷한 전율을 느꼈다.

그들은, 무엇인지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짧은 시간동안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몇가지 없었다. 그들이 냉동되어서 한 오백년간 잠들었다, 는 정도 밖에는.

고길동은 일단 입을만한 옷이 있는지를 찾아봤다. 고길동은 녹이 슬어 반쯤 쪼개진 낡은 사물함을 발견했다. 잠들기 전에 옷을 벗어뒀던 사물함과 비교적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며, 사물함의 틈을 억지로 벌렸다. 사물함은 김영희의 것이었던 듯 한데, 점퍼와 청바지가 모두 폭삭 썩어있었다.

 가죽잠바가 고약한 냄새를 내며 썩어있었고, 청바지는 만지는 족족 폭삭 먼지로 가라앉았다. 다행히 폴리에스테르가 50:50으로 섞인 티셔츠는 그럭저럭 모양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폴리에스텔 소재의 가방 하나가 빛깔은 바래었지만 모양만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고길동은 먼저 티셔츠를 김영희에게 주고, 자신은 가방을 적당히 찢어서 몸에 둘렀다.김영희는 티셔츠를 스커트처럼 허리에 둘렀는데, 면으로 된 부분이 썩었기 때문에 마치 망사 같았다. 김영희는 스판 소재의 수건 하나를 주워서 그것으로 가슴을 질끈 동여묶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밝게 말했다.

"우리 앞에 어드벤쳐가 펼쳐지는구나! ^o^"

고길동은 어이가 없어 김영희를 쳐다봤다. 반투명한 티셔츠를 치마처럼 걸쳤으니, 보일 것은 다 보였다. 그런 주제에 어드벤쳐 어쩌고 하면서 환하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란! 낙천적인 건지 멍청한건지 모를 일이다.

김영희는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발걸음을 딛을 때 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던 김영희가 고길동에게 말했다.

"우리 내려올 때 어떻게 왔었어? ㅡㅡa"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왔지."
"여기가 지하 몇 층인데? ㅡㅡ?"
"삼층쯤 될꺼야. 근데 너 왜 반말이냐? "
"지구가 멸망했을지 모르는 판에, 꼭 존댓말 반말 따져야겠냐? 앗, 저기 출구가 있다! "

김영희는 폴짝폴짝 뛰어 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철문을 잡아당기자, 철문이 기우뚱 하더니 앞으로 쓰러졌다. 김영희는 하마터면 철문에 깔릴 뻔 했는데, 고길동이 얼른 옆으로 잡아당겨 간신히 피했다. 김영희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계단으로 달려갔다.

과연 여기는 지하 삼층이었다. 삼층을 통과하자 넓직한 건물 로비가 ... 나와야 했는데, 나타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울창한 숲이었다.이름 모를 수많은 나무들이 ( 둘 다 도시출신이라서, 알아볼 수 있는 나무로는 소나무와 은행나무 정도 밖에 없었다.) 사방을 꽉 메우고 있었다.

김영희와 고길동은 마주보았다. 뭔가가 잘못됐어도 단단히 잘못 됐다. 여기는 서울이다. 약간 교외이긴 하지만, 소나무 숲이 아니라 빌딩숲이 있어야 할 곳이다. 두 사람의 생각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새 한 마리가 똥을 찍 갈기며 날아갔다.

"우쒸, 저 넘들까지 나를 놀려 T_T"

김영희의 표정을 본 고길동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김영희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냥 웃겼다. 대화를 하고 있는건지 채팅을 하고 있는건지 헷갈리는 여자였다.

"넌 또 뭐야! 왜 웃어!  \_/"
"잠깐만."
"모야! 주글래! ㅡㅡ+"
"가만 있어봐! "

고길동이 김영희의 머리를 땅으로 쳐박듯 밀어내렸다. 김영희가 항의하려는데, 고길동이 김영희의 입을 막고 손으로 숲 너머를 가리켰다. 멀리 조그만 오솔길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무슨 소리가 들렸다. 말 울음소리와 흡사하지만, 한 번 울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고저장단이 있게 길게 이어지는 것으로 봐서 언어인 것 같았다.

김영희와 고길동이 숨을 죽이고 쳐다보자, 오솔길 너머로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서 정확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큼직한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 치고는 다리가 너무 가늘고 몸통이 비대하며 얼굴이 길었다.

그들이 차츰 가까이 오자, 마침내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두 발로 일어서서 걷는 말이었다.

"저게 모야 @_@"
"쉿-! "

두 마리의 말이 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두 마리의 말은 사람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한 마리는 바지 비슷한 것을 입었고, 또 한 마리는 치마 비슷한 것을 입었다. 두 발로 서서 옷을 입고 걸어오는 말의 모습이 조금도 불편하거나 어색해보이지 않았다. 원래 옷이라는게 사람이 입으라고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말이 입으라고 만든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 둘은, 다정해 보였다. 긴 혀로 서로 볼을 핥아주기도 하고, 등을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그러더니 김영희와 고길동이 숨어있는 곳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바지를 입은 놈은 주위를 꼼꼼히 둘러봤다. 근처에 누가 없는지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등도 긁어주고 볼도 핥아대더니, 급기야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치마를 입었던 놈이 몸을 숙이자, 그 위로 바지를 입었던 놈이 올라탔다.

"도대체 이것들 뭐야 @_@"

고길동도 김영희의 입을 막을 정신이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회중시계를 보는 토끼를 만난 적이 있는데, 지금 고길동은 두 발로 수풀 으슥한 곳에 걸어와서  응응응을 하는 말 한 쌍을 보고 있었다.

그 말은 귀가 밝은 모양이었다. 숫말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김영희와 고길동이 숨어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고길동과 김영희가 질겁을 하고 순간적으로 껴안았다. 숫말이 풀을 확 헤치자, 고길동과 김영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말이 뭐라곤가 푸르릉 거렸다. 김영희도 고길동도 말의 언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안심하는 기색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암말이 뭐라곤가 푸르릉 거리면서 달려왔다. 암말은 질겁을 하는 고길동을 번쩍 안아들며 울었다. 역시 언어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략 "아유 귀여워" 하는 뜻임을 느낄 수 있었다.

숫말이 화가 난 기색이었다. 숫말은 암말의 손에서 고길동을 뺏아 던지고, 김영희 앞에서 발을 탕 굴렀다. 놀란 김영희가 질겁을 하면서 달아났다. 그러자 숫말은 암말을 다시 엎드리게 한 후, 원래 하려던 일을 계속했다.

고길동과 김영희는 숲에 내던져져서, 이들이 하는 짓을 처음부터 끝까지 훔쳐보았다. 마침내 숫말이 온몸을푸르릉 떨면서 전율하고는 나가떨어졌다. 암말은 도취된 표정으로 엎드려 있다가, 다정하게 숫말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암말이, 입이 떡 벌어져 있는 고길동과 김영희를 보았다. 그리고 손으로 가리키며 푸르릉거리자, 숫말이 비시시 몸을 일으켰다. 사랑하는 남녀가 성행위를 한 뒤, 여자가 뭔가를 가리키며 요구했다면, 남자는 기꺼이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서 덤벼들 것이다. 그 요구라는 것이 아마 김영희와 고길동을 잡아달라는 것 같아 보였다.

이들 말은, 원래의 말보다 움직임이 둔했다. 고길동과 김영희는 손을 꼭 쥐고 급하게 도망쳤는데, 숫말보다 움직임이 빨랐기 때문에 얼마동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영희가 급히 달리다가 고길동의 손을 놓치고 넘어졌다. 숫말이 김영희를 잡아 들어올렸다. 김영희가 고함을 질렀다.

"야이 XX야! 왜 나만 잡아가냐! >O<"

고길동은 뒤도 안 보고 더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김영희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귀를 찔렀다. 비명이 심상치않아 돌아봤더니, 숫말이 김영희를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놀고 있었다. 고길동은 옛날 고양이 던지고 받기 놀이를 하면서 놀던 것을 반성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우악스러운 힘이 고길동의 뒤를 덮쳤다. 어느 새 뒤로 돌아온 암말이 그를 뒤에서 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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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다의 이야기

이렇게 말하면 웃길지 모르지만, 암사람 아멜다는 태어나서 16년동안 숫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는 본 적이 있지만 아버지를 본 적은 없었다. 자매를 본 적은 있었지만 남매를 본 적은 없다.

그것이 특별하거나 신기한 경우는 아니다. 어린 암사람과 숫사람이 나눠서 자라는 것은 비단 이 곳 팸퍼스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는 한, 세상의 모든 미성년 사람은 모두 남자와 여자가 나뉘어서 자란다. 그것이 그녀가 배운 법이며 도덕이었다.

아멜다는 태어나서 한 번도 팸퍼스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농장에 있는 대규모 아파트단지 (휘넘들은 이곳을 사육장이나 닭장이라고 부른다) 안에는 모든 편의시설이 다 있었다. 식당, 학교, 영화관, 만화방, 비디오방... 역사 이래 이만한 물질문명을 이룬 것은 처음이며, 가장 행복한 세상이라고 한다. 다만, 팸퍼스 바깥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지가 궁금할 때가 있다는 것만이 문제였다.

물론 학교에서 배운다. 팸퍼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이제 한 숫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었을 때이다. 남자 사람과의 사랑은 감미롭고 달콤하며,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텔레비젼과 비디오로만 보던 남자 사람과의 사랑을 누구나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소녀들은 팸퍼스 바깥으로 나가는 나이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아멜다 또한 호기심 많은 어린 소녀로서 바깥 세상을 궁금해했다. 그리고 마침내 팸퍼스 바깥 세계로 나가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얼마나 꿈꿔왔던 바깥 세상이던가.

시간이 되자 휘넘인 팸퍼스씨가 와서, 아파트 입구에 모여있던 소녀들을 차에 태웠다. 아멜다를 포함한 꿈많은 소녀 스물 아홉 명이었다. 긴장과 흥분이 교차된 소녀들은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고 재잘거렸다. 팸퍼스씨는 차를 몰다가, 가끔 돌아보며 흐뭇한 얼굴로 소녀들을 쳐다보았다.

팸퍼스 씨는 샹들리에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집 앞에 차를 멈추어 세웠다. 소녀들이 차에서 내리자, 문 앞에는 동화책에서 보던 나비넥타이 정장을 맨 급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소녀를 안내해서 드레스룸으로 이끌었다.

아멜다는 옷장에 걸린 여러 드레스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림책과 영화에서만 보던, 휘넘 중에서도 부자인 휘넘만 입을 수 있는 찬란한 드레스들이 수백 벌이나 있었다.

"마음대로 골라 입으시지요. 숙녀로서의 준비가 끝나면 파티장으로 나오십시오. 신사분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사라는 말에 아멜다의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멜다 뿐 아니라, 열 여덟명의 소녀는 모두 눈에서 환한 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신사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

점잖은 웨이터는 빙긋이 웃을 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웨이터가 빙긋 웃고 나가자, 아멜다와 소녀는 황급히 옷을 주워입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어보는 옷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입었는지 어떤지를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최대한 노력해서 예쁘게 옷을 입었다. 비치된 화장품으로 얼굴에 화장도 했는데,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치장이 끝나자 그들은 파티 홀로 안내되어 나왔다.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고, 연미복을 입은 신사 열 여섯 명이 싱긋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일렬로 다가와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춤을 청했다. 암사람들이 손을 내밀자 숫사람들은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남자들이 일어나, 능숙한 솜씨로 여자들을 리드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멜다의 파트너인 숫사람은, 키가 크고 얼굴선이 강인해보이는 사내였다. 덮수룩한 수염에서 강인한 남성미가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멜다는 숫사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자기들 암사람과는 달리, 쇠처럼 강인한 가슴이었다. 춤을 추면서 와인을 몇 잔 마신 탓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맡아보는 남자의 향기 탓인지, 아멜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멜다는 문득 주위를 살펴보았다. 파티홀에 남아있는 커플은 몇 없었다. 모두 이미 별실로 안내된 모양이었다. 남아있는 커플 가운데 하나는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커플은 숫사람이 암사람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암사람은 눈을 감고 있는데, 가끔씩 신음을 토해내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웬지 눈이 끌리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가요."

아멜다가 남자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멜다는 그 웃음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남자가 말했다.

"어디를 가지? "
"어디... 어디론가..."

남자가 아멜다를 푹 껴안았다. 자연스럽게 껴안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팔은 아멜다가 환상적인 낭만에서 화들짝 깨어날 정도로 강하게 아멜다의 목을 조였다. 그리고 아멜다의 귓볼에 대고 말했다.

"정신차려.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알아? 너희들 제삿날이야."

아멜다는 갑자기 남자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가 하는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남자는 아멜다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휘넘은 암사람 고기를 좋아해. 그것도, 젊은 암사람이 처음으로 환상적인 섹스를 하던 중에 잡은 것이 가장 맛있다고 믿고 있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어? "

아멜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휘넘이 암사람 고기를 좋아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멜다는 휘넘 몇 명을 안다. 언제나 친절하게 생필품을 운반해주던 팸퍼스씨를 비롯해서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친절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잡아먹는다고?

남자가 말했다.

"가장 비싼 사람 요리가 어떤건지 알아? 숫사람과 처음으로 결합을 하는 순간, 암사람과 숫사람을 동시에 죽이는거야. 단, 암사람의 육질이 고급인 경우에만 의미가 있지. 그리고 두 사람이 결합한 모습 그대로를 w전자렌지에 익히는 요리야. 암사람이 처음 결합이라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사타구니에는 냉동팩을 붙여놓지. 그래야 붉은 피가 익지 않으니까. 내 말 믿기 힘든 거 알아. 아무 말 하지 말고 날 따라와봐.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서는 안돼."

남자는 우악스럽게 아멜다를 이끌고는 별실 쪽으로 향했다. 아멜다는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해서 남자의 뒤를 따랐다. 별실의 조금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려는데, 문틈으로 가냘픈 소리가 새어나왔다. 역시 암사람이 신음을 내는 소리였다. 영화 속에서도 암사람은 숫사람이 몸을 만지면 꼭 저런 소리를 냈다. 앓는 소리 같으면서도 어딘지 가슴을 후비는 것 같았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곧 남자가 여자의 몸 위로 올라탔다. 이어서 침대가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멜다의 얼굴이 붉어졌다. 웬지 훔쳐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으며, 아멜다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굵은 쇠기둥이 내려오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대가 흔들리도록 들썩여댔다. 무거운 쇠막대는 남자의 등을 짓눌렀고, 그제서야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이 때 남자와 여자의 목에 거의 동시에 올가미가 씌워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올가미가 잡아당겨졌다.

암사람과 숫사람이 동시에 몸을 바둥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차례로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이어서 휘넘들이 뭐라곤가 하는 말이 들렸다. 휘넘들이 쓰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지만, 어감만 가지고 보자면 "한 마리 잡았다" 정도로 들렸다.

아멜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아멜다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그와 같다는 것 조차 제대로 실감을 하지 못하고, 그저 끔찍함 때문에 몸을 떨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말 잘 들어. 너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 뿐이야. 알아들었어?"

아멜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남자가 시키는대로라도 해야 했다. 남자는 아멜다를 껴안고 뒷문 쪽으로 나갔다. 뒷문 앞에는 나비넥타이를 맨 시종이 서있다가 정중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신사분과 숙녀분께서는 안쪽에 별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순간 남자의 주먹이 번개같이 시종의 목줄기를 강타했다. 꺽- 하고 신음을 토하면서 시종이 쓰러졌다. 남자는 침을 돋우어 쓰러진 시종에게 뱉었다.

"더러운 놈! 휘넘에게 붙어서 인간을 죽이는 일을 도맡아 하는, 맞아죽어서 싼 놈이지."

남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뒷문 바깥으로 나갔다. 뒷문 밖에는 아까 아멜다가 타고 왔던 자동차가 서 있었다. 남자는 거침없이 자동차 위로 올라타면서 아멜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알아. 하지만 혼자서는 몰 수가 없어. 왜냐하면, 차를 몰기 위해서는 왼쪽에 있는 버튼과 오른쪽 끝에 있는 버튼을 동시에 누르고, 양 발로는 왼쪽과 오른쪽의 페달을 밟아야 하거든. 휘넘이라는 놈들이 덩치가 커서, 인간의 팔길이로는 안 되는 일이란 말이야. 네가 할 일은 그 쪽에 서서, 내가 시키는데로 버튼도 누르고 페달도 밟는거야. 알았어?"

아멜다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팸퍼스 안에서만 자란 그녀가 이해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했다. 그렇든 말든 남자는 아멜다를 지휘해가면서 자동차의 레버를 눌렀다. 

- 위이이잉--

자동차에서 소음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자동차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젠장, 펄쩍펄쩍 뒤면서 페달을 힘껏 밟아."

남자는 자기도 펄쩍거리면서 아멜다에게 말했다. 아멜다가 시키는데로 뛰다가, 실수로 버튼을 누르는 것을 잊었다. 남자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아멜다를 다그치자, 아멜다는 간신히 시키는데로 두 개의 버튼과 페달을 다 눌렀다. 그러자 윙 소리를 내던 자동차가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뒷문이 급하게 열리면서, 휘넘이 뛰어나왔다. 손에 철사와 올가미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아까 저쪽 방에서 한 쌍의 사람을 죽인, 그 휘넘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휘넘은 다름아닌... 팸퍼스였다. 팸퍼스는 앞으로 달려나가는 자동차를 보면서 놀라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거울로 그 표정을 본 남자가 "얏호" 하고 경쾌하게 괴성을 질렀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십분... 이십분... 창밖으로 농장과 건물들이 휙휙 스쳐갔다. 아멜다는 체중을 실어 페달을 밟으면서 동시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남자에게 물었다.

"저기, 이거 계속 밟고 있어야 되나요? "
"마르크스라고 불러."
"마르크스씨, 이거 계속 밟고 있어야 되나요? "
"뭐라구? 너 그거 계속 밟고 있었어? 그거 놔! "

남자가 허겁지겁 말했다. 10분동안 계속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었다면 도대체 지금 속력이 얼마나 된다는 이야기인지! 남자는 펄쩍펄쩍 뛰면서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다. 굉음을 내면서 자동차의 엔진이 멎었다.

아멜다는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일이 생겼으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게다가 가속페달을 밟고 있느라 워낙 힘들어서, 온몸에 맥이 쭉 빠진 것 같았다. 차가 멎자 아멜다는 더 이상 말도 못하고, 마치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릴 듯 했다.

남자는 아멜다의 손목을 끌고 차 밖으로 내렸다. 비록 농촌의 길만을 달리기는 했지만, 이만큼 멀리 왔다면이제는 잡힐 걱정은 없을 것이다. 남자는 이미 근처의 지도를 봐두었었다. 정신이 없긴 했지만, 원래 그가 오려고 하던 곳 까지 왔다. 이곳은 휘넘의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 틀림없다.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서, 주위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고 나서야 남자는 긴장이 풀려 벌러덩 쓰러졌다. 아멜다는 남자가 눕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했다. 아멜다는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아멜다는 선잠에 들었다. 그 속에서 꿈과 현실, 환상 사이를 오갔다. 아멜다는 여섯 시간 전에는 팸퍼스 마을에서 친구들과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했다. 세시간 전에는 드레스를 입고 공주처럼 시중을 받으면서 춤을 췄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속에서나 보던 격렬한 사랑, 그 도중에 갑작스럽게 철사에 목이 졸려 비틀거리는 남녀... 그리고 도망자가 된 신세. 불과 반나절 사이에, 평생 겪은 일보다 더 많은 일을 겪었으니 충격을 받을 만 했다.

선잠속에서 아멜다는 다시 환상속을 헤맸다. 백마를 탄 왕자님이 그와 함께 감미로운 와인을 마시고 (왕자님이 키스를 통해 아멜다의 입속으로 넘겨주었다),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드레스를 하나씩 벗겨나갔다. 아멜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고 생각한 순간, 강렬한 느낌이 그녀의 몸속에서 부딪혔다. 아프다기보다, 즐겁다기보다, 이물스럽다기보다....

이미 마르크스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평생 처음 입어본 '옷' 이란 물건은 찢겨지고 벗겨진지 오래였다. 마르크스는 숨을 헐떡이며 아멜다의 몸 위에서 요동을 쳤다. 아멜다는 눈을 떴고,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붉은 방에서 봤던 두 남녀, 그 목에 걸린 올가미가 떠올랐다. 아멜다는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고함을 질렀다.

- 꺅!

마르크스의 크고 두꺼운 손이 아멜다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가속을 더해갔다. 아멜다의 부릅뜬 눈으로 흰자위가 몰려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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