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혼 1 - 위대한 후예, 드래곤 북스 017
금강 지음 / 시공사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98. 8월.

<금강 - 발해의 혼>

1.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그리고 지금도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는 무협은 김용作 <영웅문>이다. 당시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전진교>, <정강지변>, <구처기>, <양양성>등의 사실들이 순전한 작가의 허구가 아니라 정사에 존재하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2.
나에게 충효라는 윤리를 가르쳐 준 것은 명심보감이 아니라 곽정이었고 의를 가르쳐 준 것은 맹자가 아니라 강남칠괴였으며 자비를 가르쳐준 것은 법구경이 아니라 남제 단황야였다. 국사나 국민윤리를 전폐하는 대신에, 잘 쓰여진 무협지 한질을 읽히고 작중 인물에 대해 코멘트를 가하는 교육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3.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역사관에 심취해있었다. 얼른 모화사대주의의 사상을 없애고 만주로 나아가 우리의 옛 영토를 되찾으며, 민족혼을 세상에 드넓게 휘날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동화 성경이 있고, 불경에는 만화 불경이 있으며, 한국사에는 이야기 한국사가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단고기가 있어야 한다.>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나중에 <대쥬신 제국사>라는 책이 나왔으니, 만화책이야 나온 셈인데, <발해의 혼>이라는 소설은 당시에 이미 나왔으되 내가 알지 못했던 탓에 읽지를 못했었다.

4.
내가 <환단고기>의 역사관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그 파시즘적 성격 때문이다.
- 지금이라도 핵무기로 무장하고 대군을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자. 우리땅을 되찾는 것이니 어떠냐.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 국민이 어느 정도 손상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잃어버린 민족혼을 되찾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5.
<발해의 혼>.
읽기전에 상당히 선입견으로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환단고기>의 파시즘을 민족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느끼한 글과 또다시 만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이었고,또 하나는 무협 소설 특유의 과장법과 성근 글쓰기속에 역사가 어떻게 과장되고 왜곡될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적어도 1권을 읽으면서는 그런 선입견을 반성해야 했다.
주인공 대운풍은 파시즘적 인물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었고, 그 형인 대운정이 전형적인 민족주의 파시스트 - 민족주의를 위하여 민족 구성원을 희생시키는 사람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갈등이 중요한 것으로 나왔으니 그 점에서 첫번째 선입견이 깨졌다.
왕안석등의 인물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것이 바로, 나같은 이의 선입견을 잠시 보류시키기 위하여 별 필연성없이 만든 것이 아닐까. 중국사에 대한 상세한 고증과 각주에서 나는 두번째의 선입견도 잠시 미루어두었다.
- 글을 다 읽었을때, 그러나 두가지의 선입견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전체주의에 대한 선입견은, 내가 제대로 찾아 읽지 못한 것일수도 있으나, 대운풍이 결국 택한 길이 어느 쪽인지 애매하다.
그는 발해인 파시스트와 송나라의 휴머니스트,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발해의 휴머니스트로 결정을 내린 듯 하였다. 그러나 그 선택이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고, 선택의 결과라는 것도 어쩐지 아리송했다. 다만 이것은, 글 한번 읽은 내 개인적 감상일 뿐이다.

7.
역사 고증에 대한 생각
상고사에 대한 여러 각주, 혹은 대운풍의 설명적 독백들이,
소설적인 언어로 승화되지 못하고, 너무 생경하게 드러난다.
고증부분이 꼭 각주나 등장인물의 독백등으로 처리되었어야 했을까. <단>, <한단고기>, <조선상고사>등의 재인용을 보는 것 같아서 언짢았다.
그 뿐이 아니니 한가지를 더하자면, <이러이러하게 무식을 탄로내는 어용 식민사학자>등의 표현이 각주에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과격한 표현을 내가 주로 접하던 것은 김태영씨의 <소설 한단고기> 혹은 <소설 다물>이었다. 이병도나 기타의 사학자들이 쓴 각론들이 이루어내는 역사상은 주로 논리적으로 단단한 데 비하여, 소설 한단고기 류는 이렇게 감정적으로 들떠있다는 느낌이다.
학문에 대한 반박이 감정적이면, 학문하는 이는 그 반박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또한 이병도 사학의 방법론을 생각해본다면 나올 수가 없는 비판이다. 환단고기에서 주장하는 <진실 그대로의 역사>야 말로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문헌고증>이고 <실증사학>이다. 바로 이병도씨가 터를 닦은 방법론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이병도선생이 학문 그 자체가 아닌 학맥 형성으로 태산북두의 위치에 오르기는 하였으되, 마땅히 그의 학문에 대해서 비판하려는 자는 학문으로 마주해야 한다. 감정적인 응수는 대폿집에서 할 일이다.

8.
책의 중반을 넘어설수록 소설은 점점 일반 무협지에 가까와진다. <단심교>라는 것의 실존 여부는 알 수 없으되, 설령 있었다하더라도 소설에서는 지나치게 과장되고 있다. 대운정이 단성교의 교주라는 사실은, 소설로서는 대단히 극적이고 충격적이나, 그 댓가로 이 소설의 역사적 향기는 급격히 떨어져버린다.

9.
발해가 재건국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고구려의 옛무공을 얻어내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라는 점에서 여러가지를 천천히 다시 생각해볼만하다.

10.
<발해의 혼>은 재미있는 무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초반부의 흥미유발외에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결코 역사소설이 될 수는 없겠다.

2000년 10월에 감상문을 다시 읽고서 :

첫째. 파시즘도 필요하다. 아니, 현실사회에서 국가가 균형있고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사회는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둘째. 발혼은 80년대 무협으로서 대단히 훌륭하다. 그런데 이 대단히는 상대적으로 대단히이다. 2000년인 오늘에는 주목을 받을 부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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