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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여, 안녕
김종광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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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여 안녕 - 김종광

이문구의 뒤를 잇는다는 사람으로 흔히 지목되는 것이 김종광과 한창훈인데, 나는 한창훈보다 김종광을 윗길로 본다. 한창훈에게서는 약간의 가식이 느껴진다. 그는 하류층의 인생에 편입하려고 애쓰는 상류층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보들의 틈에 어울릴려는 똑똑이라고 해야겠다. 한창훈 그의 약력을 보았을 때는 충분히 민중(-_-)적이니까.

한창훈의 주인공들은 너무 생각이 많다. 나이 육칠십 먹은 시장 아줌마들의 생각하는 깊이와 방식이 나이 삼십대의 소설가와 다를 바가 없다. 어색하다.

김종광은 오히려 그 반대다. 자기 이야기를 조금은 지나치게 한다는 느낌이다. 주인공들은 대개 공익근무요원 아니면 소설가 지망생이다.

뭐 그거야 어쨌든 간에 김종광 쪽이 조금 더 와닿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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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1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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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편의 잘된 역사소설은, 수십권의 관련서적을 읽는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과학 서적 한박스를 읽느니 태백산맥을 읽기를,
독립운동사 한박스를 읽느니 아리랑을 읽기를,
민속사 한 박스를 읽느니 장길산이나 임거정을 읽기를,
그리고.
80년 광주에 관한 책 한박스를 읽느니 봄날, 을 읽기를.

2.
올해는 1999년이다. '광주사태'는 이미 20년 전의 일이다.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먼지가 가라앉는데에는 일백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 말은 그 사건과 조금이라도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모조리 저세상에 가고 난 후에야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쓰여진 객관적인 역사는 아무에게도 의미
가 없는 죽은 역사다. 크로체식으로 말하자면 '연대기'일 뿐이다.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역사이다.

3.
80년대의 숱한 사회과학 도서들, 그리고 진보진영에서 발행하는
각종의 자료에 묘사된 80년의 광주는 민주와 혁명과 전사와 투쟁과,노동자의 불굴의 투혼이 살아 숨쉬는 불꽃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봄날,에서 묘사되는 광주는, 그렇게 이데올로기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들, '백성'들은 그런 어려운 가치를 알지 못했으며,
빨갱이를 미워하고 경상도 사람을 싫어하며 자그만 시비로 밥상을 뒤집으며 부부싸움을 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다른 어느 곳에 살고있던 사람들과도 똑같은, '백성'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한 백성들은, 죽지 않기 위해 몽둥이를 들었고,
죽지 않기 위해 총을 들었고,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총을 놓았다.
금남로에 모인 10만 군중도 물론 강조되어야 할 수치이지만
도청에서 옥쇄한 시민군이 겨우 백명안쪽이었다는 것 마찬가지로
강조되어야 할 수치이다.
광주 시민은 전사도 투사도 아니다.
어이없게 애타게 죽어간 이땅의, '백성'일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백성들을 죽였는가?

4.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 그리고 그 대답에 따르는 댓가를 위해 우리나라의 80년대는 그렇게도 뜨거웠고 그렇게도 아팠으며, 사회과학서적속에서 광주시민은 전사가 되고 투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임철우씨는 그러한 대답을 상당부분 자제한다. 교설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기껏해야 작중의 윤상현씨나 김상섭기자등을 통해 추측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명치, 오하사, 유이병등을 통해 드러나는 공수부대원들의 고뇌는 결코 광주시민을 학살한 것이 공수부대원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백성들을 죽였는가?

5.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아니, 정치를 매우 싫어한다.
정치인들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뉴스를 보지 않을 정도로.
박정희도 좋고 김영삼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남들이 좋다면 좋은가보고 싫다면 또 싫은가보다 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싫긴 하지만.)
정치에 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다.

6.
"아, 112에 신고를 해야 한다니께 그러네. 지금 김일성이가 보낸 무장 공비가 공수부대 옷을 입고서 시민들을 쥑일려고 하고 있는데 경찰은 뭣하는 것이냔 말이여." - 어떤 취객들의 대화중.

7.
나는 75년생이며 부산 출생이다. 80년 봄에 나는 아마도 쫀드기 같은 것을 물고 광안극장앞을 뛰어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저러나, 빨갱이들이 광주에서 난리라더라, 같은 뜻모를 말을 주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광주는, 실존으로서의 체험이 아니다. 책을 통한 추체험을 조금 아프게 한 편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 점점 더, 광주는, 잊혀질 것이다.
공수부대와 광주시민이 서로 악수까지 한 마당에.
(도대체 그건 무슨 코미디였단 말인가. 1980년의 공수부대 지휘관이 끝내 잘못이 없노라고 떳떳이 버티고 있는데, 1999년의 공수부대 사병이 도대체 뭘 잘못해서 광주시민에게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처참했던 봄날의 열흘간이, 조금 더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면 좋겠다. 좀 더 정확히는, 후배들에게 기억되면 좋겠다. 하다못해,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은 몇월 몇일이었나?] 라는 수학능력 객관식 문제의 정답을 외우는 방식으로라도.

8.
조금 더 주관적인 감상.
무협을 많이 읽는 나는, 글로 표현되는 선정성에는 그리 예민하지 않다. 기실 사람의 눈을 붙잡아 끄는 선정성으로는 섹스와 폭력만한 것이 없을텐데, 그것도 익숙해지고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책장을 넘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봄날은, 내가 읽어본 어떤 무협보다도 훨씬 더 잔혹하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팔기위해 마구 써댄 그 어떤 책보다도 더 잔혹하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잔혹한 사건들이 중원이나 신주꾸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극명한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임철우씨는, 가능한한 과거형 어미를 자재하고 있다.

9.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번이나 미친놈처럼 통곡하고, 혼자 술에 취해 망월동을 찾고, 혼자 소리를 질렀다는 임철우씨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테다.
그 고통스러운 추체험속에 그의 남은 생이 절반이 깎였다고 하더라도충분히 믿을 수 있다.

찬별.

감상문 다시 읽으며 :

광주라는 말을 떠올려본 것이 이 감상문을 쓰고나서 오늘이 처음이 아닐까... 그러나 내 감상적 추체험속에서 그 날의 광주는 여전히 아프다. 책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광주의 그 봄날은, 풍년집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는 여의도 정치학 박사들과, 386 세대들과, 전현직 대통령들에게는 정치적인 사건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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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작은 보헤미안
알렉스 코트로 / 홍익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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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작은 보헤미안
은 시카고의 슬램가에 사는 흑인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삶에는 갖가지 다른 양태가 있겠지만,
나는 솔직히 노숙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하다못해, 시골 동네에서 여름 한 철 모내기만 해주고
빈 집 하나 얼렁뚱땅 차지해서 살면 되지 않을까? 라는,
(물정을 너무 모르는건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있었던 라플린의 시골 구석에는
식당 종업원, 주유소 직원 같은 비숙련공 일손이 모자라서 허덕이고 있다.
그들이 시카고의 슬램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뭐 아무튼, 그들의 삶이 생생하게 담긴 넌픽션 르뽀는 읽어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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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1
김형경 지음 / 민예원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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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새는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 는
최근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울림이 깊었다.
가슴속 울림이랄까, 머릿속 울림이랄까.

젊은 여자 소설가의 소설은 의식적으로 피하던 때가 있었다.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직업적으로 자기 자신을 고민하는 사람들,
의 의식 세계에 전염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예외를 두었다면, 한강 정도였을까.

그랬는데 지금은, 그 젊은 여자 작가들이 누구인지조차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조경란 정도 밖에는... --a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으로도, 하성란이니 공지영, 전경린 같은 작가들이 병적으로 자기 자신을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새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는 어떻게 보면 후일담류의 소설이지만
자기 기만이나 환상, 자기 도취, 자기 연민 등등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후일담류들과는 구분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후일담들이
"우리는 386, 암울한 80년대를 온몸으로 헤쳐온 386"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소설은 80년대에 대한 그런 식의 과장은 하지 않는다.
40대는 70년대에 청춘을 보냈고 50대는 6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
그리고 30대는 8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유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20대에 터널을 한 번
지나간다. 새는... 은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성장 소설이다.
하지만 10대 소년처럼 고뇌를 통해 새로운 단계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결국에는 명랑한, 그런 성장 소설은 아니다.
세파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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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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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나는, 어쩌면 한없이 복잡해질 수 있는 주제들을, 무한정 단순하게 끌어내려 이해하는 버릇이 들어있다. 이것은, 정말로 단순할 수 있는 문제를 한없이 깊게 생각하던 옛날의 반작용일 수 있다.

모래의 여자는 - 뭐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가령 주인공의 일탈과 고착, 사막의 이미지 등등을 통해 삶의 한 습성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 어쩌구 하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내가 이해한 방식은 간단하다. 모래속에서 모래처럼 사는 여자, 그리고 떠돌아다니다가 모래를 취미로 삼게 되는 남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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