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진가소전 1 - 드래곤 북스 035
임준욱 지음 / 시공사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임준욱의 소설은 착하다. 그러나 이 착함은 부분적으로는 '눈치 많이 보는 작가'가, 독자에게 미리부터 '내가 이거 잘못했을 수도 있어요. 용서해주세요. 저거 잘못해줄 수도 있어요. 그것도 양해해주세요. 요거는 잘못하긴 했는데요, 제가 잘못한 건 아니고요, 알면서도 일부러 이렇게 했어요. 저 그정도는 알아요.' 하는 느낌이 강하다. 즉, 가상의 평론가를 상정해두고 일일히 그 눈치를 본다. 그래서 착하고 재미있게 소설을 읽을 수 있으나, 동시에 불편한 부분이 있다.

이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간)에 임준욱은 무림 세계의 여러 장치들에 대해 일일히 설명하려고 한다.  장치라기보다는, '승진체계', '지휘 계통' 과 같은, 지극히 선량한 직장인의 관심사(즉 직장에서 관심가지고 보게 되는 부분)에 대해 천착한다.

임준욱은 확실히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그리고 뒷끝이 담백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마음은 지울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쿠베린 1 - 엘프의 소원
이수영 지음 / 황금가지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이수영의 환타지, 귀환병 이야기 등은 별 재미없었다, 외에는 기억이 없다. 하지만 쿠베린은 인상이 강하다. 첫째, 만화같기 때문에. 소설을 그만큼 만화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재주이다. 둘째, 그래서 재미있다. 엄청 재미있다. 셋째, 때때로 무언가 통찰을 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셋째에 대해서 부연하자면, 작가는 진짜로 느끼고 생각하는 부분인지 아니면 어거지로 만들어낸건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특히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서) 통찰을 시도한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인지 어거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즉 그 통찰에는 때때로 고개를 끄떡이게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여운이 깊지는 못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촌검무인 村劒無刃 1
임준욱 지음 / 북소리(영언문화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임준욱이라는 작가의 글은, 도저히 무협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촌검무인은 인터넷에서 극찬을 받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단단한 필력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확 끌어당기는 맛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독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변명한다.

촌검무인은 농풍답정록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담담한 관찰에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무협적 현실에 참여를 염두에 두지 않은, 평범하고 순하고 자기 스스로에게 규율을 세우는 소시민 월급장이로서의 시선으로 무협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무협에 등장하는 군상들은 대개 다른 무협의 엑스트라들과 틀린 색깔을 가지고 나타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래곤 라자 12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대중문학이 순수문학적 메세지를 가지게 될 때,
그 메세지는 순문학보다 훨씬 다 강렬한 에너지와 파괴력을 뿜기도 하는데,
그것은 순문학이 돌려말하기, 은유나 상징하기, 말을 아끼기등을 미덕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순문학을 읽는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이 순문학
을 보고서 뭔가를 느끼는 것은 쉽지 않으며,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
지를 제대로 혹은 나름대로 잡아내기란 더욱 어렵다.

한편 장르문학은 훨씬 더 자유스러운 상징적 도구를 쓸 수 있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극단적인 상징들을 쓸 수가 있다는 것이 되겠는데,
드래곤라자의 "영원의 숲"에서 보여주는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
퇴마록에 등장한 귀신에 씌워져 서울로 탱크를 모는 충성스런 사단장,
금강불괴가 상징하는 인간성 완성으로서의 금강불괴,
등등이 이런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이들이 전하는 메세지의 강렬함과 진지
함이 결코 순수소설의 강렬함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제는 독자의 경우다. 대중문학을 읽는 독자가, 정신수양이나 인격향상등을
위해서 글을 읽지는 않는다. 전우치전에 나오는 숱한 경전 말씀이나, 드래곤
라자에서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직접 등장한 부분, 들에 이르면 누워서 방
바닥을 딩굴며 책을 보던 독자들은 미련없이 그 부분을 건너뛰고, 칼싸움을
하거나 마법을 부리는 장으로 건너뛴다. 그래서 아무래도, 대중소설이 독자
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방법은 순수문학보다 훨씬 교묘하고 기술적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이다.

드래곤라자는 생전 처음으로 읽어본 환타지이므로 (그나마 다 읽지도 못했으
므로) 할 말이 많을 수는 없지만, 무협에 대해서 떠오른 생각으로 말하자면,
아무래도 무협은 보다 보수적인 것이 아니냐 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령 팔십
년대의 무협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영웅담들은 팔십년대 젊은이들의 생각이라
기보다는 새마을운동시대 맨주먹으로 돈벌어보세를 외치던 젊은이들의 생각
에 가깝다고 느껴지고, 구십오년 이후 보여지는 무협에서의 사회적 리얼리즘
의 경향들은 구십오년 이후 젊은이들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삼팔육세대
의 방식에 가깝다. 진지한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무협의 경우, 대개는 개개의
인간을 탐구한다기보다는 사회에서부터 개인으로 탐구해들어오는 경향이 강
하다고 하겠다. 드래곤라쟈가 개인으로부터 출발해서 사회로 탐구해 나가는
것과는 반대라고 하겠다. (다른 환타지를 좀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함)
이것을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전통에까지 이어본다면. 글쎄. 가능할 수도 있
다고 본다. 개인적 감상이지만, 드래곤라쟈의 처음 얼마를 읽어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우리 세대의 감성에서 서양의 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내가 생각했
던 것보다 높음을 느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해의 혼 1 - 위대한 후예, 드래곤 북스 017
금강 지음 / 시공사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98. 8월.

<금강 - 발해의 혼>

1.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그리고 지금도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는 무협은 김용作 <영웅문>이다. 당시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전진교>, <정강지변>, <구처기>, <양양성>등의 사실들이 순전한 작가의 허구가 아니라 정사에 존재하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2.
나에게 충효라는 윤리를 가르쳐 준 것은 명심보감이 아니라 곽정이었고 의를 가르쳐 준 것은 맹자가 아니라 강남칠괴였으며 자비를 가르쳐준 것은 법구경이 아니라 남제 단황야였다. 국사나 국민윤리를 전폐하는 대신에, 잘 쓰여진 무협지 한질을 읽히고 작중 인물에 대해 코멘트를 가하는 교육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3.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역사관에 심취해있었다. 얼른 모화사대주의의 사상을 없애고 만주로 나아가 우리의 옛 영토를 되찾으며, 민족혼을 세상에 드넓게 휘날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동화 성경이 있고, 불경에는 만화 불경이 있으며, 한국사에는 이야기 한국사가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단고기가 있어야 한다.>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나중에 <대쥬신 제국사>라는 책이 나왔으니, 만화책이야 나온 셈인데, <발해의 혼>이라는 소설은 당시에 이미 나왔으되 내가 알지 못했던 탓에 읽지를 못했었다.

4.
내가 <환단고기>의 역사관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그 파시즘적 성격 때문이다.
- 지금이라도 핵무기로 무장하고 대군을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자. 우리땅을 되찾는 것이니 어떠냐.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 국민이 어느 정도 손상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잃어버린 민족혼을 되찾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5.
<발해의 혼>.
읽기전에 상당히 선입견으로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환단고기>의 파시즘을 민족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느끼한 글과 또다시 만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이었고,또 하나는 무협 소설 특유의 과장법과 성근 글쓰기속에 역사가 어떻게 과장되고 왜곡될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적어도 1권을 읽으면서는 그런 선입견을 반성해야 했다.
주인공 대운풍은 파시즘적 인물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었고, 그 형인 대운정이 전형적인 민족주의 파시스트 - 민족주의를 위하여 민족 구성원을 희생시키는 사람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갈등이 중요한 것으로 나왔으니 그 점에서 첫번째 선입견이 깨졌다.
왕안석등의 인물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것이 바로, 나같은 이의 선입견을 잠시 보류시키기 위하여 별 필연성없이 만든 것이 아닐까. 중국사에 대한 상세한 고증과 각주에서 나는 두번째의 선입견도 잠시 미루어두었다.
- 글을 다 읽었을때, 그러나 두가지의 선입견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전체주의에 대한 선입견은, 내가 제대로 찾아 읽지 못한 것일수도 있으나, 대운풍이 결국 택한 길이 어느 쪽인지 애매하다.
그는 발해인 파시스트와 송나라의 휴머니스트,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발해의 휴머니스트로 결정을 내린 듯 하였다. 그러나 그 선택이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고, 선택의 결과라는 것도 어쩐지 아리송했다. 다만 이것은, 글 한번 읽은 내 개인적 감상일 뿐이다.

7.
역사 고증에 대한 생각
상고사에 대한 여러 각주, 혹은 대운풍의 설명적 독백들이,
소설적인 언어로 승화되지 못하고, 너무 생경하게 드러난다.
고증부분이 꼭 각주나 등장인물의 독백등으로 처리되었어야 했을까. <단>, <한단고기>, <조선상고사>등의 재인용을 보는 것 같아서 언짢았다.
그 뿐이 아니니 한가지를 더하자면, <이러이러하게 무식을 탄로내는 어용 식민사학자>등의 표현이 각주에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과격한 표현을 내가 주로 접하던 것은 김태영씨의 <소설 한단고기> 혹은 <소설 다물>이었다. 이병도나 기타의 사학자들이 쓴 각론들이 이루어내는 역사상은 주로 논리적으로 단단한 데 비하여, 소설 한단고기 류는 이렇게 감정적으로 들떠있다는 느낌이다.
학문에 대한 반박이 감정적이면, 학문하는 이는 그 반박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또한 이병도 사학의 방법론을 생각해본다면 나올 수가 없는 비판이다. 환단고기에서 주장하는 <진실 그대로의 역사>야 말로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문헌고증>이고 <실증사학>이다. 바로 이병도씨가 터를 닦은 방법론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이병도선생이 학문 그 자체가 아닌 학맥 형성으로 태산북두의 위치에 오르기는 하였으되, 마땅히 그의 학문에 대해서 비판하려는 자는 학문으로 마주해야 한다. 감정적인 응수는 대폿집에서 할 일이다.

8.
책의 중반을 넘어설수록 소설은 점점 일반 무협지에 가까와진다. <단심교>라는 것의 실존 여부는 알 수 없으되, 설령 있었다하더라도 소설에서는 지나치게 과장되고 있다. 대운정이 단성교의 교주라는 사실은, 소설로서는 대단히 극적이고 충격적이나, 그 댓가로 이 소설의 역사적 향기는 급격히 떨어져버린다.

9.
발해가 재건국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고구려의 옛무공을 얻어내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라는 점에서 여러가지를 천천히 다시 생각해볼만하다.

10.
<발해의 혼>은 재미있는 무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초반부의 흥미유발외에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결코 역사소설이 될 수는 없겠다.

2000년 10월에 감상문을 다시 읽고서 :

첫째. 파시즘도 필요하다. 아니, 현실사회에서 국가가 균형있고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사회는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둘째. 발혼은 80년대 무협으로서 대단히 훌륭하다. 그런데 이 대단히는 상대적으로 대단히이다. 2000년인 오늘에는 주목을 받을 부분이 많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