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길동과 김영희의 이야기...

고길동은 눈을 떴다. 정신이 지나치게 맑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성격이 게을러, 잠자리에서 몇 시간이나 뭉그적거리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신이 너무 또렷해서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고길동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로보트가 된 것처럼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만을 겨우 힘들게 들어올렸을 뿐이다.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달랐다. 지금쯤 해가 중천에 떠있어야 할, 어수선한 그의 옥탑방이 아니었다. 반투명한 유리관과, 유리관 너머에 얼핏 보기에도 삐까번쩍한 여러 불빛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그제야 고길동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 곳은 그의 자취방이 아니라 대옹제약의 실험실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못해 몇 년간을 빈둥거리던 끝에 그는 대옹제약의 실험실에 계약직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는 냉동숙면 프로젝트에 참가했는데, 허드랫일들만 하고 월급도 적었으며 프로젝트가 끝나면 해고될 팔자였다. 그 때 팀장이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프로젝트 파일럿"으로 참가하면 특별 보너스와 함께 정직원으로 승격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표현이 좋아 "프로젝트 파일럿"이지, 결국 실험용 모르모트가 되라는 것이었다.

고길동은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당장 놀러다닐 돈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특별 보너스를 삼백만원이나 준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기 때문이다. 고길동은 먼저 이틀간 단식을 했고, 그런 다음 회사의 지하에 특별히 준비된 연구실로 내려갔다.

그는 연구실에서 김영희를 만났다. 김영희는 고길동과 마찬가지로 프로젝트 파일럿으로 참가한 여자였다. 나이는 그보다 몇 살 어렸고, 대학생으로 보였는데, 꼭 이모티콘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녀가 웃을 때는 통신 기호인 ^O^ 같은 얼굴이 연상되고, 인상을 찌푸리면 -_- 과 같은 표정이 연상되었으며, 눈을 초롱초롱 뜨고 이야기르 할 때는 '_' 와 같은 표정이 연상되었다.

실험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냉동숙면 프로젝트에 참가한 동기가 좀 색달랐다. '재밌을 것 같아서' 였다. 아무 생각없이 집에서 잘 잠 냉동실에서 하루 잔다고 생각한 고길동과는 많이 달랐다. 김영희에게 냉동숙면 프로젝트는 흥미진진한 모험이었다. 고길동은 내심 스스로가 돈 벌려고 별 짓을 다 한다고 느낀데 비해, 김영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작전의 파일럿이 된 것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대형식당의 냉장고 같이 생긴 기계속으로 안내되었다. 고길동은, 비록 실험실의 모르모트 신세이나마 밀폐된 공간에서 한 여자와 함께 잔다는 것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하지만 김영희는 고길동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자신이 겪게 될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척 춥다고 생각했다. 추워서 이불을 돌돌 말고 벌벌 떨다가, 어느 순간 눈꺼풀이 덮혔다. 그것이 잠들기 전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지금 맑은 정신으로 눈을 떴는데, 몸이 시체처럼 뻣뻣한 것이었다.

고길동은 힘겹게 눈을 뜨고서 공기를 들이마셨다. 조금씩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고길동은 먼저 고개를 돌려 김영희를 보았다. 잠들기 전, 자신이 보았던 바로 그 자리에 김영희가 있었다. 그런데 고길동은 눈을 의심했다. 김영희의 옷이 너덜너덜 삭아, 속살이 훤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고길동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옷이 삭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면으로 된 속옷은 이미 완전히 삭아 없어진지 오래였고, 병원에서 제공했던 잠옷 또한 약간의 나일론 성분만 남아있을 뿐 면 성분은 삭아 없어졌다.

수면실에서는 위잉- 하는 기계소리가 나고 있었다. 공기는 따뜻하지만, 근처에 흥건한 물이 고여있는 걸로 봐서, 냉동상태에서 따뜻한 기온이 되돌아온지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놀라고 당황하는 순간, 김영희가 힘겹게 눈을 떴다. 고길동은 화들짝 놀라 얼른 몸을 숙이며 알몸을 가렸다. 김영희도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고길동이 말했다.

"이상해요.*--*"
"그래요, 이상해요. *ㅡㅡ*  우리가 왜 옷을 벗고 있죠? ㅡ.ㅡ+"
"옷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무실이 이상해요."

그제야 김영희 또한 옷만 삭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침대도, 전등도, 이불도, 벽도. 모든 것이 먼지를 먹고 푹 삭아 있었다. 고길동은 수면실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자신이 엊그제까지 일하던 곳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수백 년이나 지난 것 같았다. 연구 서적과 서류는 바스러져서 흩어지고, 금속으로 된 실험 장치들에는 말할 수 없이 심한 녹이 슬었다. 컴퓨터는 삭았으며, 나무는 좀이 쓸었다.

김영희는 옷을 벗고 있는 부끄러움 때문에 곧장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 뒤에 숨어 바깥을 보면서, 고길동과 비슷한 전율을 느꼈다.

그들은, 무엇인지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짧은 시간동안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몇가지 없었다. 그들이 냉동되어서 한 오백년간 잠들었다, 는 정도 밖에는.

고길동은 일단 입을만한 옷이 있는지를 찾아봤다. 고길동은 녹이 슬어 반쯤 쪼개진 낡은 사물함을 발견했다. 잠들기 전에 옷을 벗어뒀던 사물함과 비교적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며, 사물함의 틈을 억지로 벌렸다. 사물함은 김영희의 것이었던 듯 한데, 점퍼와 청바지가 모두 폭삭 썩어있었다.

 가죽잠바가 고약한 냄새를 내며 썩어있었고, 청바지는 만지는 족족 폭삭 먼지로 가라앉았다. 다행히 폴리에스테르가 50:50으로 섞인 티셔츠는 그럭저럭 모양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폴리에스텔 소재의 가방 하나가 빛깔은 바래었지만 모양만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고길동은 먼저 티셔츠를 김영희에게 주고, 자신은 가방을 적당히 찢어서 몸에 둘렀다.김영희는 티셔츠를 스커트처럼 허리에 둘렀는데, 면으로 된 부분이 썩었기 때문에 마치 망사 같았다. 김영희는 스판 소재의 수건 하나를 주워서 그것으로 가슴을 질끈 동여묶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밝게 말했다.

"우리 앞에 어드벤쳐가 펼쳐지는구나! ^o^"

고길동은 어이가 없어 김영희를 쳐다봤다. 반투명한 티셔츠를 치마처럼 걸쳤으니, 보일 것은 다 보였다. 그런 주제에 어드벤쳐 어쩌고 하면서 환하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란! 낙천적인 건지 멍청한건지 모를 일이다.

김영희는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발걸음을 딛을 때 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던 김영희가 고길동에게 말했다.

"우리 내려올 때 어떻게 왔었어? ㅡㅡa"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왔지."
"여기가 지하 몇 층인데? ㅡㅡ?"
"삼층쯤 될꺼야. 근데 너 왜 반말이냐? "
"지구가 멸망했을지 모르는 판에, 꼭 존댓말 반말 따져야겠냐? 앗, 저기 출구가 있다! "

김영희는 폴짝폴짝 뛰어 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철문을 잡아당기자, 철문이 기우뚱 하더니 앞으로 쓰러졌다. 김영희는 하마터면 철문에 깔릴 뻔 했는데, 고길동이 얼른 옆으로 잡아당겨 간신히 피했다. 김영희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계단으로 달려갔다.

과연 여기는 지하 삼층이었다. 삼층을 통과하자 넓직한 건물 로비가 ... 나와야 했는데, 나타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울창한 숲이었다.이름 모를 수많은 나무들이 ( 둘 다 도시출신이라서, 알아볼 수 있는 나무로는 소나무와 은행나무 정도 밖에 없었다.) 사방을 꽉 메우고 있었다.

김영희와 고길동은 마주보았다. 뭔가가 잘못됐어도 단단히 잘못 됐다. 여기는 서울이다. 약간 교외이긴 하지만, 소나무 숲이 아니라 빌딩숲이 있어야 할 곳이다. 두 사람의 생각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새 한 마리가 똥을 찍 갈기며 날아갔다.

"우쒸, 저 넘들까지 나를 놀려 T_T"

김영희의 표정을 본 고길동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김영희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냥 웃겼다. 대화를 하고 있는건지 채팅을 하고 있는건지 헷갈리는 여자였다.

"넌 또 뭐야! 왜 웃어!  \_/"
"잠깐만."
"모야! 주글래! ㅡㅡ+"
"가만 있어봐! "

고길동이 김영희의 머리를 땅으로 쳐박듯 밀어내렸다. 김영희가 항의하려는데, 고길동이 김영희의 입을 막고 손으로 숲 너머를 가리켰다. 멀리 조그만 오솔길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무슨 소리가 들렸다. 말 울음소리와 흡사하지만, 한 번 울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고저장단이 있게 길게 이어지는 것으로 봐서 언어인 것 같았다.

김영희와 고길동이 숨을 죽이고 쳐다보자, 오솔길 너머로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서 정확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큼직한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 치고는 다리가 너무 가늘고 몸통이 비대하며 얼굴이 길었다.

그들이 차츰 가까이 오자, 마침내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두 발로 일어서서 걷는 말이었다.

"저게 모야 @_@"
"쉿-! "

두 마리의 말이 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두 마리의 말은 사람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한 마리는 바지 비슷한 것을 입었고, 또 한 마리는 치마 비슷한 것을 입었다. 두 발로 서서 옷을 입고 걸어오는 말의 모습이 조금도 불편하거나 어색해보이지 않았다. 원래 옷이라는게 사람이 입으라고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말이 입으라고 만든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 둘은, 다정해 보였다. 긴 혀로 서로 볼을 핥아주기도 하고, 등을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그러더니 김영희와 고길동이 숨어있는 곳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바지를 입은 놈은 주위를 꼼꼼히 둘러봤다. 근처에 누가 없는지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등도 긁어주고 볼도 핥아대더니, 급기야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치마를 입었던 놈이 몸을 숙이자, 그 위로 바지를 입었던 놈이 올라탔다.

"도대체 이것들 뭐야 @_@"

고길동도 김영희의 입을 막을 정신이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회중시계를 보는 토끼를 만난 적이 있는데, 지금 고길동은 두 발로 수풀 으슥한 곳에 걸어와서  응응응을 하는 말 한 쌍을 보고 있었다.

그 말은 귀가 밝은 모양이었다. 숫말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김영희와 고길동이 숨어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고길동과 김영희가 질겁을 하고 순간적으로 껴안았다. 숫말이 풀을 확 헤치자, 고길동과 김영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말이 뭐라곤가 푸르릉 거렸다. 김영희도 고길동도 말의 언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안심하는 기색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암말이 뭐라곤가 푸르릉 거리면서 달려왔다. 암말은 질겁을 하는 고길동을 번쩍 안아들며 울었다. 역시 언어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략 "아유 귀여워" 하는 뜻임을 느낄 수 있었다.

숫말이 화가 난 기색이었다. 숫말은 암말의 손에서 고길동을 뺏아 던지고, 김영희 앞에서 발을 탕 굴렀다. 놀란 김영희가 질겁을 하면서 달아났다. 그러자 숫말은 암말을 다시 엎드리게 한 후, 원래 하려던 일을 계속했다.

고길동과 김영희는 숲에 내던져져서, 이들이 하는 짓을 처음부터 끝까지 훔쳐보았다. 마침내 숫말이 온몸을푸르릉 떨면서 전율하고는 나가떨어졌다. 암말은 도취된 표정으로 엎드려 있다가, 다정하게 숫말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암말이, 입이 떡 벌어져 있는 고길동과 김영희를 보았다. 그리고 손으로 가리키며 푸르릉거리자, 숫말이 비시시 몸을 일으켰다. 사랑하는 남녀가 성행위를 한 뒤, 여자가 뭔가를 가리키며 요구했다면, 남자는 기꺼이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서 덤벼들 것이다. 그 요구라는 것이 아마 김영희와 고길동을 잡아달라는 것 같아 보였다.

이들 말은, 원래의 말보다 움직임이 둔했다. 고길동과 김영희는 손을 꼭 쥐고 급하게 도망쳤는데, 숫말보다 움직임이 빨랐기 때문에 얼마동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영희가 급히 달리다가 고길동의 손을 놓치고 넘어졌다. 숫말이 김영희를 잡아 들어올렸다. 김영희가 고함을 질렀다.

"야이 XX야! 왜 나만 잡아가냐! >O<"

고길동은 뒤도 안 보고 더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김영희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귀를 찔렀다. 비명이 심상치않아 돌아봤더니, 숫말이 김영희를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놀고 있었다. 고길동은 옛날 고양이 던지고 받기 놀이를 하면서 놀던 것을 반성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우악스러운 힘이 고길동의 뒤를 덮쳤다. 어느 새 뒤로 돌아온 암말이 그를 뒤에서 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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