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 - 우리 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
이원석 지음 / 책담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평범한 학생(청소년)이었다.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공부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을 뿐,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공부 잘 한다는 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차지하여 상위권 대학에 입학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대학에 가서도 어떤 면에서는 비슷했다. 내가 소속된 학과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건 학점이 높다는 뜻이고, 임용고시에 합격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으니까. 최근까지도 나는 공부가 그런 의미라고 생각하곤 했다. 곰곰이 생각한 것은 아니다. 으레 그런 건줄 알고 살아 왔다는 뜻이다. 공부라는 건 자격증을 얻거나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처럼 즉각적이고 확실한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 점에서 나는 공부를 못 하는대학생이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공부를 못 하는내가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는 사실이다. 학부를 막장 성적으로 졸업하는 바람에 취업하기 힘들어서도 아니고, 사회생활 초년생처럼 그래도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며 막연한 향수를 느끼거나 이것은 나의 적성에 안 맞아!’라며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나는 말문이 막혀버린다. 스스로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다.

 

공부란 무엇일까? 나도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라는 것이 자격증을 얻거나 취업하고 학위를 얻기 위한 공부는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사소한 계기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외국인 노동자들 성소수자들 이야기가 나왔다, 이후 책을 읽다 보니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또 신문을 보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니 보수 진보 그런 얘기도 나오고 정치 이야기도 나오고, 내 삶을 돌아보게 되고, 주변을 살펴보게 되고. 이런 일들이 쌓이다가 어떤 시점부터 아 답답해. 제대로 좀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세상에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세상이 좋아지고 있는 것인지, 왜 이렇게 안 변하는 것 같은지 궁금했다.

 

학부 시절 어느 강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공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있다고, 정말 그런 것 같다며 막연한 느낌을 가졌던 말이다. “앎과 삶의 격차가 그대로 우리의 욕망을 보여 준다. 욕망은 우리 몸의 관성을 여지없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욕망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확인할 수 있다.”(51~52) 바로 그 욕망이 바깥으로부터 주입된 욕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어느 날, 나는 내가 원하는(욕망하는) 것들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자유로워지기 위해 공부한다는 그 말이 떠올랐다. 주입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거구나, 하는 느낌? 그런 점에서 유학은 이 욕의 통제, 즉 절욕節慾을 지향한다”(52)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새로운 마음과 신체를 만들고 나아가 새로운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 공부라고 말한다. 때문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행복은 공부순이다’(169).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공부를 하는지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는지를 넘어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169)하기 때문이다. 유념해야 할 점: 행복은 공부순이라고 해서 마치 공부하기만 하면 현실사회에서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진지하게 제대로 공부할수록 어렵고 힘든 삶을 살게 할 확률이 높다.(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등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공부 자체가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품는 것, 생각 없이 대세를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나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껍지 않은데도 간단히 읽히지는 않았다. 동서양 철학과 종교를 토대로 공부가 무엇인지(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좋았지만,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읽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한 가지만 불만을 말하자면 저자가 하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서 눈에 거슬렸다는 것. ‘하나가 자연수의 첫 숫자가 아니라 그러나, 그렇지만, 하지만의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대부분 하나라는 단어는 자연수의 첫 숫자로 쓰지 않는가), 말버릇처럼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브오카 2015-06-1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도 행복 해 질려고 하는 수단이기에...

cobomi 2015-07-02 09:46   좋아요 0 | URL
아.. 댓글을 이제 봤습니다. 공부도 행복해지려고 하는 수단이다... 맞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것 같아요.

albatros 2015-06-2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에서 공부의 의미는 상당히 오염되었죠. 공부가 무엇이어야하는지를 논한다니 한번 읽어봄직한 책이네요.

cobomi 2015-07-02 09:47   좋아요 0 | URL
네 ㅎㅎ 책값도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이렇게 말하니 왠지 출판사 직원 같네요ㅎㅎㅎ)
 
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중에 나와 있는 글쓰기 책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럼에도 글쓰기 책에 끌리는 이유는? 가끔 제목이 꼭 내 사정을 함축한 듯한 자기계발서에 손이 가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글쓰기, 독서, 책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의욕이 샘솟곤 하는데, 내 문제와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책에서 의외의 답을 얻고 기분을 전환한다.

 

글쓰기의 최전선도 비슷한 이유에서 주문했다. 빨간 바탕에 몇 가지 필기구가 그려진 표지가 인상적이다. 손으로 글씨를 쓰고 싶어진다. 책을 펼치고 가장 처음 등장하는 글이 나는 왜 쓰는가저자의 자기고백이다.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 () 낱말 하나, 문장 한 줄 붙들고 씨름할수록 생각이 선명해지고 다른 생각으로 확장되는 즐거움이 컸다. () 어렴풋이 알아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9)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저자의 고백. 그녀의 고백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막힌 살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는 그 얘기가 꼭 내 얘기인 것만 같았으니까. 그리하여 내 일기, 나의 글은 내 삶을 얼마나 잘 보듬고 풀어주었는지 다시 살펴보기 위해 일기장을 뒤적였다. 왜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뭔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문제가 있는 날. 원래부터 있었던 문제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그게 신경이 쓰여서 당장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 문제가 정확히 뭔지를 모르겠고,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막연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날 말이다. 나는 그런 날이면 일기장에 생각나는 대로 다 털어놓고 싶다. 막상 일기장을 펼치면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몇 줄짜리 밋밋한 기록만 할 때가 많지만.

 

이 책은 글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어떻게 해서 글 써서 먹고 살게 되었는지, 글쓰기란 어떤 것이고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등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연구공동체(수유너머R)에서 직접 수업한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관계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은 부분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글이 있다. 그 모든 글들을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 두 가지로 나눈다면 기준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문장? 구성? 정확한 단어 사용? 내 생각엔 나 자신의 글이 좋은 글이 아닌가 싶다.(이것은 저자와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마치 나도 그렇다는 듯이 표현한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나의 말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가꿔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그리하여 읽고 쓰는 것이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며,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된다는 저자의 말에도 깊이 수긍하게 되었다.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내 얘기를 쓴다는 것은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두루뭉술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어쩌면 글쓰기가 를 선명하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자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내 생각을 말하기보다 주어진 (일반적인) 생각을 받아들일 때가 더 많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 사실은 남들이 원하는 것이었을 때도 많았다. 자식으로, 학생으로, 선후배로, 동료로, 친구로, 배우자로 내게 기대되는 역할, 행동, 사고방식, 태도 등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글쓰기의 최전선은 말 그대로 글쓰기의 최전선이 곧 삶이라는 것, 그렇게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 내 글이 곧 나라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안 읽히는김수영의 시-삶이지, 김수영의 시-삶을 이론의 형틀로 찍어낸 잘 읽히는지식인의 해석이 아니다. 소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느낌과 생각으로 시를 읽어내고 해설하느라 낑낑대는 것이 공부다. 독서의 참맛이다.”(100)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 하지만 평균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률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118)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글쓰기를 하고 싶은지, 왜 글을 쓰고 싶고 써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부록으로 실린 공동체 학인의 글 세 편도 좋았다. 저마다의 삶을 잘 보여주는 글이었고 추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감동적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현인 2015-07-2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책 사고싶은데 집에서 넘 멀다.

서울와우북페스티벌 2015-09-23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은유 작가님을 비롯하여 글쓰기의 유명한 작가 4분이서
와우북페스티벌에서 글쓰기 강연을 하신답니다!!

지금 사전등록 받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이원시인 글쓰기 강좌: http://onoffmix.com/event/52416
박수밀 작가 글쓰기 강좌: http://onoffmix.com/event/52431
함돈균 평론가 글쓰기 강좌: http://onoffmix.com/event/52445
은유 작가 글쓰기 강좌: http://onoffmix.com/event/52452
 
장정일의 독서일기 3 범우 한국 문예 신서 53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3권은 앞서의 두 권에 비해 차분하고 냉정한 느낌이다. 독서일기임에도 또렷이 각인된 사건이 있는데, 이 권 전체에 걸친 핵심 사건은 바로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 할 수 있겠다. 1996년 봄. 처음 파리로 떠난 후의 일상(이라고 해도 독서가 거의 전부이지만)에서 뜬금없이 한국 생활로 배경이 바뀐다. 324일의 두 줄짜리 영화감상문 다음에 곧장 424일의 일기가 나오는 것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앞의 두 권에서 저자는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해왔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것을 기록하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한 달 동안 별다른 독서를 하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중심에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자리 잡고 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바로 말함(193~199), 리뷰지가 위촉한 이영준과의 대담(203~215), 시사저널이문재와의 대담(230~232), 지역 신문에 게재한 나는 하이틴 작가가 아니다(241~247),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설명글(269~275) 등은 모두 당시 작가가 처했던 상황과 심경을 대변해준다.(이 책은 사건 당시 출판사 스스로 판매중지하고 책을 회수하였다. 현재 알라딘 중고 거래가격은 3~10만원) 물론 독서 감상문 자체도 충분히 재미있고 유익했지만, 작가가 쓴 소설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에 대한 작가의 글은 내게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었다. 표현의 자유란 무엇이며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작가란 어떤 사람인지, 작가가 내놓은 작품에 대해 강제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런 제재를 가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 등. 특히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는 20년 전에 비해 지금이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회의적이다. 사이버 감찰 논란이나 닭그림(풍자화라 하자) 제재(制裁)는 코미디에 가깝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은 표현의 자유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한 동성애자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의견, 그에 대해 더러운 걸 더럽다고 말하는 게 표현의 자유라며 댓글을 달던 사람들그러나 솔로강아지라는 초등학생의 시집에 실린 동시 학원 가기 싫은 날에 대해서 사람들은 잔인하고 끔찍하다면서 시집을 눈앞에서 불태워 버리라고 했다는데(그리하여 출판사는 전량 회수, 폐기했다 한다), 학원 가라고 하는 엄마가 끔찍하니까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는 앞서 말한 더러운 걸 더럽다고 말하는 게 표현의 자유라는 논리에 해당하는 게 아닌가. 표현의 자유란 어른에게만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것만을 너도 표현할 수 있다’(이때 는 대다수 혹은 강자, ‘는 소수 혹은 약자)는 것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여 이래저래 씁쓸하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와 관련한 글에서 인상 깊었던 몇 구절을 옮기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할까 한다. 2001년에 그 소설로 인해 장정일은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장정일의 독서일기31997117일 일기로 끝나니까 이어지는 책에서도 당분간 이 사건 이야기가 나오겠지.(읽은 지가 너무 오래 돼서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부연하자면 내가 이 소설을 포르노로 치장한 다른 이유는 부권적이고 권위적인 문어체에 억눌려 온 구어체를 마음껏 풀어놓기 위해서였으며 더욱 중요하게는 고작 기성 체제에 봉사하는 요즘 소설의 존재 방식에 의문이 났기 때문이다. 흔히 예술은 자유로우며 불온한 것이라고 말해지지만, 굳어진 형식에 아무런 충격을 가하지 못하는 작가의 더듬거림은 체제에 대한 고해에 불과하며 시비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장인정신은 아버지가 심어준 내면감시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기 갱신의 열정 없는 기계적인 글쓰기는 선생님에게 보이는 매일 매일의 일기쓰기에 불과하지 않은가.”(196)

 

음란도서와 작가, 출판인에 대한 제재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첫째 인신구속과 같은 사법처리, 둘째 판매 금지, 셋째 통신판매나 비닐 씌우기 미성년자 판매 불가와 같은 유통방법상의 제재. 나는 인신구속이 중세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판매 금지는 작가의 실존적 체현물인 동시에 경제 수단을 원천봉쇄한다는 이유로 수락할 수 없다.”(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태우스님 서재에서 본 책이다. 관련 글을 읽고 사두었다. 머리가 좀 복잡해서 편히 쉬려는 마음으로 가볍게 빼들었다가 당황했다. 빠져들어서 1권 절반 쯤 읽다가 다시 마태우스님 서평을 찾아보니 이런 경고가 있다.

"그러니 뭔가 꼭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을 펼치지 마시라."(http://blog.aladin.co.kr/747250153/6518600)

그 말을 기억했어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사나흘 잠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읽었다. 아니, 잘 수가 없었다. 지금도 눈이 빨갛고 정신은 혼미하며 입술에 물집이 생기려 한다.

 

1990년 초 일본, 중학생의 죽음을 두고 벌어지는 사건과 해결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죽은 소년이다. 죽은 채로 계속 등장하고, 사건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세 권이나 된다. 이야기의 전개는 굉장히 느린 느낌(간간히 빠르지만)인데, 그래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더 긴장감을 주었던 것 같다. 작가는 사건과 등장인물을 물고 늘어지고 씹고 뜯고 맛보고 파고들어서 끝장을 본다. 느린 전개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중학생)의 심리 묘사는 단연 돋보였다.(특히 죽은 소년)

'아니 중학생이 이렇게 어른스럽단 말이야!'

라고 놀라면서 자연스레 나의 중학 시절을 떠올렸다. 가족과 학교, 친구들, 선생님, 성적, 인기 등 그 시절에 나도 했을 법한 고민과 생각들. 물론 작가가 표현하듯이 어른스럽게 생각한 건 아닐 테지만 나름 진지했던 기억이 난다. 예민하고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뒤따르는 생각은 '어쩌면 난 아직 중학생 수준에서 못 벗어난 걸지도 모른다'는 것.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함께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학교라는 '체제', 부모와 자식, 교사, 언론, 교육, 법, 자살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나도 가끔 생각하는 것이지만, 소설 속에서 보니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 우리 사회와 많이 닮은 일본(소설의 배경) 사회를 보며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돌이켜 보기도 했다.

 

1권 후반부에서 2권으로 넘어갈 무렵부터 범인(?)을 예상할 수 있었다는 게(상당히 자주 나오는 암시) 조금 흠이었지만, 구체적인 전개는 조금 의외였다. 마지막에 가서 작가가 힘이 빠져버린 느낌. 죽은 아이의 노트를 더 살리길 바랬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핵심 줄거리와 잔가지(?)들이 연결된 부분들도 흥미로워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심리 묘사와 유머러스한 표현이 좋았다.

 

 권 당 600쪽 이상 3권이나 되는 분량이니 결코 가볍지 않다. 마태우스님 말을 기억하자.

"그러니 뭔가 꼭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을 펼치지 마시라."

 

 

#리뷰는 왜 1,2,3권 한꺼번에 안 써지는 건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부의 배신 -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윌리엄 데레저위츠 지음, 김선희 옮김 / 다른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144)에 나오는 이야기다. 얼핏 주문처럼 보이는 저 문장은 수능배치표상의 대학 서열이라 한다. 대학 서열로 사람을 차별하는 끔찍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공부의 배신은 한국으로 치면 앞서 말한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쯤에 속하는 미국의 대학을 주로 다룬다. ‘엘리트 교육의 문제점을 키워드로 원인, 영향, 해결책 등을 톺아보는 책이다. 미국(딴 나라) 얘기하는데 왜 내 속이 갑갑하고 부글거리면서 근심이 깊어지는 건지. “‘좋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무조건 읽어야 한다. ‘후진 대학에 다닌다는 열등감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 한다.”는 김정운 교수의 추천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두 눈을 가린 양 한 마리가 그려진 표지.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학생들은 똑똑하지만 앞을 못 보는 온순한 양이라는 걸 암시한다.(원제가 ‘Excellent sheep’이다.)

 

대학생, 대학원생, 교수, 강사, 대학교직원 등 대학에 관련한 사람도 아니면서 난 대학 문제에 열을 올린다. 아마 학부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내내 방황만 했던 나는 복수전공도 부전공도 하지 않았고 그 흔한 토익점수도 없다. 이렇다 할 자격증도 없고 교내외를 불문, 수상경력 같은 것도 없다. 해외봉사활동은커녕 국내봉사활동 증명서(?)도 없고, 인턴십이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도 없다.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학과 점수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럼 대학 다니는 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실제로 물어본 사람도 꽤 있다.)

 

나는 고민이 많았다. 알고 싶은 것도 많았고 흥미로운 것도 많았다. 연애하면서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술도 많이 마셨고 우정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하기도 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학교에서는 여러 학과의 전공수업을 들었다. 남들은 영어나 시험공부를 할 때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만 읽었다. 결석도 많았다. 취업이나 국가고시 같은 공통의 관심사에 끼어들지 못했던 나는 늘 겉돌았다.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대학 생활에서 후회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공부란 것은 내게 있어 화두와도 같은 낱말이다. 시험을 위한 공부를 제외하면 공부가 딱히 하기 싫은 적은 없었다. 역사, 미술, 교육, 철학, 국문, 한문, 영어, 심리, 사회, 식품영양, 생물 등의 학과 수업을 수강한 것도 내 관심이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는 못했다. 공부가 내 삶과 연결된 것, 삶 자체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찾아보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거라면 말이다. 관심도 많고 흥미도 느꼈지만 어떻게 읽고 생각하고 써야 할지를 몰랐고 어떻게 내 삶과 연결해야 할지도 몰랐다.(지금도 모른다) 학교생활을 충실히 했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같다.

 

공부의 배신은 대학생으로 또 대학을 나와서까지도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한 내 고민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나의 고민은 나만의 고민인가, 그저 시스템의 문제일 뿐인가? 한국 학생들도 (책에 나오는) 미국 학생들처럼 진정한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스펙이나 취업이 아닌 자신과 공동체의 삶과 미래,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에 공부하고 싶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대체 대학이 어때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을 돌이켜보자.(지금은 많이 다를까?) 20명 이상은 당연하고 50명 이상이 듣는 강의도 흔한 강의에 대해 나는 늘 불만이었다. 토론은커녕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한 학기를 보냈다. 타학과 전공 학생들을 제한하는 수업도 더러 있었다.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면담할 기회는 졸업할 때까지 몇 번 오지 않았다. 내가 제출한 과제물에 대해 피드백을 받은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무엇이 어떻게 부족한 것인지(또는 잘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교수님들이 늘 하는 질문 있어요?”란 말에, 왜 교수님은 우리한테 하는 질문이 질문 있어요?”밖에 없는 건지 늘 궁금했다.(‘넌 어떻게 생각하니?’도 있을 텐데.) 강의 중에 간혹 사회적 약자나 기득권층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면 나는 왜 교수들이 자신들의 비정규직동료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내가 그 모든 것에 대해 내 생각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도 ('똑똑한'건 아니지만) 한 마리의 '눈 먼 양'인지 모른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들은 이런 것이다. 공부(배움)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엘리트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사회는 아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가,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등. 비단 대학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키워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교육문제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교육의 목표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신을 직장에서는 쓸모 있는 인력으로, 시장에서는 잘 속아 넘어가는 소비자로, 국가에서는 순종적인 국민으로 전락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대학의 존재 이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중요한 건 바로 온전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다.”(121)라는 저자의 말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한국의 대학도 미국 대학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높은 것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이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성찰의 시간을 갖기위해 이 책을 일독하길 권한다.

어쩌면 똑똑한 부모 밑에서 자란 똑똑한 아이들과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똑똑한 선생으로 가득한 곳은 가장 끔찍한 곳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마침내 배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 머릿속에 어떤 생각도 집어넣지 말아주세요."라는 요청은 너무도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누구나 내 아이가 교육을 받길 원한다. 하지만 누구도 내 아이가 `교육다운 교육`을 받길 원하지 않는다. (80쪽)

만약 우리가 우아한 사회, 정당한 사회, 현명하고 번영하는 사회, 아이들이 배움에 대한 애정으로 공부하고 사람들이 일에 대한 애정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이웃의 아이들을 우리 자신의 아이들처럼 사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귀족사회를 열었다. 우리는 실력사회를 열었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열 시간이다. (343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arcus Aurelius 2015-05-23 0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겉에 드러난 것만 보지 말고, 본질을 보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왜 공부를 하고 계속 배우고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현실적인 이유(돈,직업, 명예 등등) or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유(배움,앎에 대한 즐거움, 지식의 추구를 통한 인격완성과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등등..)를 대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니.. ㅜㅜ

cobomi 2015-05-23 12:58   좋아요 1 | URL
예로 드신 두 가지 이유 모두 가벼운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직업도 중요하고 인격완성(?)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그 중 어느 하나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때 발생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더구나 그게 사회 전체적인 흐름이 되어버린다면 개인으로서는 대세에 거스르거나 비판하기 쉽지 않죠. 이 책 추천드릴게요. 진지한 조언들도 있고,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Marcus Aurelius 2015-05-23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넵, 그렇죠..
책 꼭 읽어보겠습니다^^

2019-07-09 0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