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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 우리 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
이원석 지음 / 책담 / 2014년 2월
평점 :
나는 평범한 학생(청소년)이었다.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공부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을 뿐,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공부 잘 한다’는 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차지하여 상위권 대학에 입학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대학에 가서도 어떤 면에서는 비슷했다. 내가 소속된 학과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건 학점이 높다는 뜻이고, 임용고시에 합격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으니까. 최근까지도 나는 공부가 그런 의미라고 생각하곤 했다. 곰곰이 생각한 것은 아니다. 으레 그런 건줄 알고 살아 왔다는 뜻이다. 공부라는 건 자격증을 얻거나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처럼 즉각적이고 확실한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 점에서 나는 ‘공부를 못 하는’ 대학생이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공부를 못 하는’ 내가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는 사실이다. 학부를 막장 성적으로 졸업하는 바람에 취업하기 힘들어서도 아니고, 사회생활 초년생처럼 ‘그래도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며 막연한 향수를 느끼거나 ‘이것은 나의 적성에 안 맞아!’라며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나는 말문이 막혀버린다. 스스로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다.
공부란 무엇일까? 나도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라는 것이 자격증을 얻거나 취업하고 학위를 얻기 위한 공부는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사소한 계기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외국인 노동자들 성소수자들 이야기가 나왔다, 이후 책을 읽다 보니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또 신문을 보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니 보수 진보 그런 얘기도 나오고 정치 이야기도 나오고, 내 삶을 돌아보게 되고, 주변을 살펴보게 되고…. 이런 일들이 쌓이다가 어떤 시점부터 ‘아 답답해. 제대로 좀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세상에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세상이 좋아지고 있는 것인지, 왜 이렇게 안 변하는 것 같은지 궁금했다.
학부 시절 어느 강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공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있다고, 정말 그런 것 같다며 막연한 느낌을 가졌던 말이다. “앎과 삶의 격차가 그대로 우리의 욕망을 보여 준다. 욕망은 우리 몸의 관성을 여지없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욕망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확인할 수 있다.”(51~52쪽) 바로 그 욕망이 바깥으로부터 주입된 욕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어느 날, 나는 내가 원하는(욕망하는) 것들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자유로워지기 위해 공부한다’는 그 말이 떠올랐다. 주입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거구나, 하는 느낌? 그런 점에서 “유학은 이 욕慾의 통제, 즉 절욕節慾을 지향한다”(52쪽)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새로운 마음과 신체를 만들고 나아가 새로운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 공부라고 말한다. 때문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행복은 공부순이다’(169쪽).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공부를 하는지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는지를 넘어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169쪽)하기 때문이다. 유념해야 할 점: ‘행복은 공부순’이라고 해서 마치 공부하기만 하면 현실사회에서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진지하게 제대로 공부할수록 어렵고 힘든 삶을 살게 할 확률이 높다.(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등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공부 자체가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품는 것, 생각 없이 대세를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나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껍지 않은데도 간단히 읽히지는 않았다. 동서양 철학과 종교를 토대로 공부가 무엇인지(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좋았지만,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읽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한 가지만 불만을 말하자면 저자가 ‘하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서 눈에 거슬렸다는 것. ‘하나’가 자연수의 첫 숫자가 아니라 ‘그러나, 그렇지만, 하지만’의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대부분 ‘하나’라는 단어는 자연수의 첫 숫자로 쓰지 않는가), 말버릇처럼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