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카피하다 - Certified Cop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영화를 봤을 때의 그 얼떨떨한 기분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제목 그대로 단 한 번의 거스름 없이 오로지 '친구의 집을 찾는 여정'만 보여줘서 마지막까지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하는 심정으로 보다가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었다.  

어제 <사랑을 카피하다>를 보러 갔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된 친구는 영화가 지루했다고 문자를 보내 왔다. 나는 전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본 기억을 떠올리며 그 지루함을 이해했다. 이 감독은 옛날부터 '지루해도 할 수 없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다인 걸'이라며 느긋한 포즈를 취하는 데는 도사니까.  

그런데 나는 이제 그 느긋함이 내 몸에 꼭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쇼킹한 반전이나 집요한 메세지가 없는 이런 영화가 다른 다이내믹한 쟝르의 영화만큼이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보는 동안 장면 장면에만 몰입하지 않고 내 멋대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보는 긴 호흡이 좋아서, 그 지루함에 무감각해진 듯하다. 

물론 이런 나의 무감각만이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요소는 아니다. 무릇 대개의 좋은 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대사 하나 하나가, 장면 하나 하나가 내포하는 것들이 한 가득이라서 놀라운 부분이 많다.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장인의 냄새가 나기도 하고, 또 그런 장인이 갖춘 다른 미덕인 '내포하는 것은 많지만, 공은 엄청 들였지만, 결과물은 편안하고 심플하며 자연스럽기 그지 없는' 작품이 되기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갈채를 받는 것일 테다. 

그나저나, 극 중 줄리엣 비노쉬의 대사에는 exactly 내 대사랑 똑같은 대사가 여럿 있다. 아이고, 찔려. ㅋㅋ (뭐, 그래도 나는 우선 기억력이 제로인지라 비노쉬보다는 덜 집요하다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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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5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친구의 집은 어딘인가>는 저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죠. 개인적으로 <식스 센스>, <유주얼 서스펙트>보다 더 충격적 대 반전이었어요. ^^

영화를 잘 안 보다 보니 영화 속에서 느끼는 것이 많이 없어요. 너무 액션 영화만 봐서 그런지 몰라도요. 기껏 감동 받은 영화라 해도 최민식의 <파이란>이 유일무이 하거든요. ^^

제가 꿈꾸는 리뷰에 대한 답도 치니님의 문장에 있네요. '내포하는 것은 많지만, 공은 엄청들였지만, 결과물은 편안하고 심플하며 자연스럽기 그지 없는 작품' 정말 그렇게 되고 싶네요.

치니 2011-05-15 19:54   좋아요 0 | URL
저는 무서운 영화를 못 보는지라 <식스 센스> 못 봤어요. 아, 그러고보니 무서운 것 뿐만 아니라 긴장시키는 영화도 그닥 즐기진 못해요. ^-^;

<파이란>은 저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꼽아요. 최민식 씨는 개인적으로 그 영화에서가 최고.

리뷰를 잘 쓰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도 루쉰P님을 비롯해서 알라딘에는 그런 분들이 참 많으니, 읽는 즐거움이 늘 한 가득. :)

네오 2011-05-15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무 좋아서 벌써 이 영화를 세 번이나 관람한 열혈센티멘탈한 청년입니다^^(선배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미쳤다고 하더군요~)

잠깐 그의 미학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하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디지털시대의 미학진보에 당연히 "계몽자"의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 영화는 당연히 그의 영화 <10>었습니다. 제목처럼 자동차안에서만 벌어지는 사건들의 10개의 씬, 20개의 숏(결국에는 저는 영화는 영화를 구성하는 기본단위 "숏"과 "숏"을 어떻게 나누고 봉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며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외아들을 둔 이혼녀가 아들과 일상생활에서 소소하게 벌어지는 일로 다투고 지금의 이란여성(청장년층,결혼을 앞둔 여인, 이혼한 여인, 성매매여인)과 대화를 하면서 여성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 바로 들어가서 이 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고다르의 표현을 빌려 필름는 곧바로 거짓이다 그러나 1/24숏(프레임의 기본최소단위)은 언제나 진실이다라는 말을 드리고 싶네요~

치니 2011-05-16 13:19   좋아요 0 | URL
세 번이나 관람하면 각기 느낌이 어떻게 다를지 궁금한 영화에요. 미쳤다니요, 저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용. :)

<10>이란 영화는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호오, 흥미로운 방식과 내용이네요. 제 개인적으로는 키아로스타미가 딱히 취향에 100% 맞지는 않지만 그의 방식이 흥미롭다는 점은 늘 인정하게 됩니다. 숏과 숏을 어떻게 나누고 봉합하는지, 우와, 그런 과정까지 보려면 세 번 가지곤 부족하겠어요, 암요. :)

굿바이 2011-05-1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이 영화 보셨군요 :) 저도 편하게 봤어요.
전체적으로 흐름이 좋았는데, 화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결이 고운 빛이 참 좋았어요.
그렇지만 정말 어떤 장면에서는 막 움찔움찔 했답니다. 줄리엣 비노쉬의 행동들이 툭툭 걸리는데 그게 다 제 과거와 현재의 어떤 부분이더라구요. ㅡㅡ;

치니 2011-05-17 14:04   좋아요 0 | URL
그죠그죠? 언뜻 보면 15년 결혼생활의 중년 부부가 약간 똘짓 하는 거 뿐인데, 담담하게 보면 되는데, 어우 비노쉬의 그 강렬한 연기 덕인지 제가 찔리는 게 워낙 많아 그런지 어떤 장면에서는 신경질이 솟을 정도로 움찔하더라고요. ㅎㅎ 그래서 대가는 대가임미, 압바스 님 잘나셨어, 속으로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