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마지막을 덮자, 온 몸의 세포가 부르르 떨리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수초 간 지속되었다.
물론 읽다가 중간에 그런 적도 있지만 다음 페이지가 너무 궁금하고 불안해서 (이 불안의 연원은 내가 아직 파악을 못했다) 떨리는 세포조차 애써 진정시키려 했고, 드디어 다 읽은 후에는 조금은 안정감을 갖고 입맛을 다실 만 했다는 얘기다.

이런 느낌은, 그러니까, 수줍게 고백하자면, 한 사람에게 반했을 때의 느낌이다.
그렇다, 나는 그의 세번 째 책을 읽고(동물농장과 나는 왜 쓰는가를 이전에 읽었었다), 급기야 오웰에게 반해 버렸다.
반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나 분석은 저리 치워 놓은지 오래. 앞으로 뭐라 말하든 콩깍지가 씌인 채로 한동안, 그럴 것이다.

앞뒤 맥락을 모르고 그가 살아온 역사를 모르는 분들은 그다지 이해가 안 가겠지만, 내가 가장 반하게 된 대목을 꼽자면 아래와 같은 대목,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심장이 막 두근거려서 훕 - 하고 숨을 멈췄다가 뱉어야 했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 모든 걸 혼자서만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압제에 대한 증오심을 유난히 길게 끌고 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 조금이라도 자기 발전을 생각한다면, 심지어 한 해 몇 백 파운드를 버는 정도의 '성공'이라도 바란다면 비열한 짓 같았다.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내가 뻔하고 무책임한 생을 살고 비슷한 부류만 상대하며 살아선지, 지금까지 나는 한번도 자신이 '압제자'의 위치에 섰다가 이토록 통렬하고 냉철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변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실제로 피압제자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으면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말을 한 뒤 자발적으로 피압제자의 생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도 거의 보지 못했다. 실제로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경우엔 '압제자'가 아니라 '피압제자'가 되어본 경험이 한번이라도 있었던 경우이거나, 80년대 대학생들이 주로 했던 '교육과 계몽 후 혁명을 이뤄내기' 위한 도구로서 잠시 잠깐 겪어보는 일일 뿐이었다.
아니 아니, 모르겠다. 내 이야기만 하자. 그들은 그들대로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을테니. 해보지도 않은 내가 감히 말할 건덕지는 없다.
아무튼 여기 이 남자, 오웰은 그 체험을 글로 썼고 내가 글에서 확인한 것은 ...... 아이고야, 그렇게도 수백만번 회자되는 '진정성' - 이 단어를 얼마나 쓰기 싫은지 모른다, 지금도. 얼마나 이 단어에 진저리 나게 가짜 진정성이 판을 치는지, 쓰자마자 식상해지는 느낌이 너무 싫어서. 그래도 이 단어 밖에 없다. (오, 나의 그지같은 어휘력이여)

아무튼지간에, 읽으면서 나는 '긴 말 필요없다. 닥치고 일단 무조건 읽어야 한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종내에는 오웰에게 또 설득당하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 이 따위 '배운' 자의 말보다는 그저 노동하는 것,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더욱 중요하잖아. 우선 배우고나서 행동해야 한다는 믿음 역시 우리가 학교나 배운 사람들의 문화에서 체득한 것일 뿐, 책 한 권 읽는다고 내가 변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네.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당장은, 소위 '진보' 쪽에 계신 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적어도 뜨끔뜨끔 찔리기라도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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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4-1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 몸의 세포가 부르르~ 첫 문장에서 콜라 광고가 생각났어요^^
개인적인 생각인데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참 고생이 많은 것 같아요. 딱히 대체할 뭔가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저 역시 빵꾸똥꾸 수준의 어휘력이라서 '진정성'만 우려먹고 있는 것 같아요 ㅜㅜ

책을 읽고 뭔가 변할 수 있다거나,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이 말이 다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뭐랄까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말이에요.
제가 어느 한 시절 육체적 노동에 올인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 기준에서 육체적 노동에 올인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벼락맞을 소리 같지만 그것도 답이 안되더라구요. 그때 매일 생각했어요. 뭐가 문제냐, 뭐가 답이냐, 뭐가 희망이냐, 이런 젠장.....

이렇거나저렇거나 오웰의 책은 무조건, 무조건 많이 읽혔으면 좋겠어요~ :)

치니 2011-04-12 16:42   좋아요 0 | URL
콜라 광고, ㅎㅎ 역시 굿바이 님.
진정성 뿐이겠슴까, 소통이라는 단어도 그렇구요, 니들이 고생이 많다, 고 할 만한 단어들이 꽤 되는데 - 그 단어 쓰는 사람들에게 딱히 뭐랄 자격이 없는 스스로의 어휘력이 늘 좌절스럽죠. 휴.

책도 책 나름이라는 건 제가 새삼 덧붙일 거 없지만서도, 오웰의 책을 한번 읽는 것이 쓰잘데기 없는 책 열 권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꾸역꾸역 올라와요. 흐 - 그래서 무조건, 무조건이야 외칩니다!

그런데, 굿바이 님, 당신의 정체는 대체 무엇입니까, 이 어메이징한 알라디너야 ~ (지송 반말이지만 이해하시리라 믿으며) 육체적 노동에 올인이라뇨, 으아으아.

2011-04-12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3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3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디 2011-04-1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레퀴엠을 새벽에 다 읽고 온 몸이 떨렸어요. 손도 떨리고... 어떤 육체적인 충격을 줬던 책은 저 책이 유일했던 것 같아요.

음. 근데, 지금 과연 조지오웰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글을 쓴다면 어떨지 궁금하네요. 글의 내용이 바뀔지도 궁금하고 아니면 "좀 더 정치적인 글"이란 (1936년의 탄광과 지금이 그리 다르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여윳거리가 있으니까) 낙인이 찍힌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궁금하구요.


다락방 2011-04-13 11:54   좋아요 0 | URL
누구의 어떤 레퀴엠인지 링크 부탁합니다, 에디님.

치니 2011-04-13 13:34   좋아요 0 | URL
하비트 셀비 주니어의 레퀴엠이 아닐까요, 다락방 님? 지금 일단 알라딘에서 찾아본 바로는 이 책이 유력한데...에디 님 알려주세요!

네, 저도 지금 오웰이 살아 있어서 비슷한 경험을 한다면, 뭐라고 할지 간혹 궁금해요. 이 책 속에서도 간간히,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예언을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잘 좀 해보자 으쌰 으쌰 하는 사람인데 지금과 같은 세상이라면...글쎄요, 너무 절망적이라서 그냥 속세를 떠났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는 어떤 예술가의 글도 결국에는 정치적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니 사람들의 낙인 같은 건 아마 신경쓰지 않을 거 같아요.

다락방 2011-04-13 14:16   좋아요 0 | URL
치니님이 말씀하신 책이 맞는것 같아요. 거기에 에디님 밑줄긋기도 있거든요. 그런데 절판..orz

치니 2011-04-13 14:34   좋아요 0 | URL
쩝, 왜 우리가 애타게 찾는 책과 영화는 늘 절판되는가 - 뭐 이런 주제로 뭉쳐야 하나효? 요새 왜 이랭. 브로큰 잉글리쉬도 글쿠요.

에디 2011-04-14 08:32   좋아요 0 | URL
네 셸비의 레퀴엠 맞아요. 작년즈음에 아름다운 가게에서 새거나 다름없는 레퀴엠을 2권 발견하곤 다 샀거든요. 하나는 선물하고 다른 하나는 친구가 본다고 가져갔는데 (어차피 안봤을게 확실함) 돌려받으면 다락방님 주소를 알려주세요.


chaire 2011-04-12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꽃양배추 님의 꾐에 넘어가서 ㅋㅋ 나는 왜 쓰는가를 사서 첫장을 열었다가,
으마, 잼날거같아, 하고 깜짝 놀라서 도루 덮어놨답니다...ㅋㅋ
할일이 많은데 열었다가는 덮기 싫을 거 같아서...
오웰 진짜 멋진 남잔가 봐요.

치니 2011-04-13 13:3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깜짝 놀라죠, 증말.
저는 <나는 왜 쓰는가>를 비행기 안에서 읽으려고 가지고 갔었는데, 열어보니 생각했던 그런 에세이가 아니잖아요, 글쎄. 그래서 일단 덮고 나중에 여행지의 숙박하던 집에서 천천히 읽었어요. 다 읽는 데는 결국 한달이 걸렸던 거 같아요. 덮기 싫기도 하지만, 죽죽 읽을 수도 없어요. 이게 한 장을 읽으면 생각할 게 너무 많아가지고.
암턴 카이레 님도 어서 읽어보셔요 ~

nada 2011-04-1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귀여우세요, 카이레님.
잼날 거 같아서 깜짝 놀라 도루 덮는 그 기분 알아요.ㅋㅋㅋㅋㅋ

이성적으로 존경심이 드는 작가는 제법 많은데, 심정적으로 반하게 되는 작가는 많지 않은 거 같아요(적어도 제 경우에는요).
저는 오웰을 존경하기 이전에, 인간 오웰에게 반했어요.
그냥 이 남자가 너무너무 좋드라구요.
이 남자는 진짜다, 그런 느낌이 팍 왔어요.
심지어, 오웰이 아내가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는 것마저 마음에 들더라구요.
그토록 외로움을 잘 타고 그토록 약한 남자가 자신을 시련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글과 삶을 서서히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이 진정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이 남자는 완벽하지 않아서 매력 있어요.

나는 왜 쓰는가 읽다 보니까 걍 닥치고 빠순이 해야겠다, 바로 느낌 오던데요.ㅎㅎ
보니까 신간도 나왔고! 완전 행복!

치니 2011-04-13 13:40   좋아요 0 | URL
나도 나도요!
아아, 이렇게 표현했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꼭 꽃양배추 님 댓글을 읽었음 좋겠어요. 존경하기 이전에 반한 그 느낌, 진짜다 그런 느낌. 맞아, 그거에요.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그 부분도 그렇고, 입양한 아이 잘 돌본 거랑, 심지어 위건부두의 지저분함을 이야기하면서 병 돌려 마시기를 언급할 때 '나는 여전히 누가 입댄 음료수나 먹을 것에 입대는 건 너무 싫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좋아요. 한마디로 주제파악을 넘 잘하는 남자랄까.

히, 저도 신간 기대중.

다락방 2011-04-13 14:17   좋아요 0 | URL
아우, 저 집에 가는길에 서점에 들러 조지 오웰 책 뭐든 하나 사야지 원, 안되겠어요. ㅎㅎ

치니 2011-04-13 14:33   좋아요 0 | URL
우왓, 다락방 님, 어떤 거 먼저 읽으실 거에요? 아, 괜히 내 맘이 분주해져요.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먼저 읽으시는 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이해하는 데 편하긴 한데. 둘 다 괜찮지만 일단 동물농장은 먼저 읽지 마시라고 하고 싶어요. 동물농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사람의 사상 변화를 알아야 되거덩요.

다락방 2011-04-13 15:10   좋아요 0 | URL
치니님. 저 [동물농장]과 [1984]는 몇년전에 이미 읽었어요. 어쩌죠? ㅠㅠ

치니 2011-04-13 15:51   좋아요 0 | URL
어쩌긴요 ~ 그럼 그냥 위건부두랑 나는 왜 쓰는가 중 땡기는 걸로. :)
저로서는 그나마 조금 쉽게 읽히는 쪽이 위건부두였어요.

에디 2011-04-14 08:33   좋아요 0 | URL
카탈로니아 찬가?

다락방 2011-04-14 14:59   좋아요 0 | URL
카탈로니아 찬가. 그것도 있구나. 알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