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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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800매에 달한다. 

나온 지는 30년이 훌쩍 넘었다. 

제목은 잊혀진 부조리극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조금쯤은 해학적인 풍자를 기대하게 한다.  

작가는 아이큐 170 천재로 화학을 전공했다가, 동양철학을 공부했다가,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영작문을 가르치다가, 다시 철학을 공부하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전기치료 고문을 받아 기억을 약간 상실하는 고통을 겪은 뒤 이 책을 쓴다. 그리고 말한다. 122군데 출판사 중 121군데에서 거부당했지만 1군데에서 출간을 수락했고, 결국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단 한 군데의 출판사만 필요하지 않느냐고. 그러니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정신병원을 포함하는 약력에서 유추, 선병적 기질과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일 거라는 짐작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자신만만한 말투다.

이런 기본 지식을 덥썩 안겨주는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과연 초반에는 예상대로 무언가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잠깐, 이런 문장을 읽으면 일종의 자기계발서 중 별난 개인 경험과 철학 개론을 버무려 그 수준을 높인 책일 뿐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만일 당신이 무슨 일을 서둘러 처리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일에 더 이상 애정을 쏟을 만큼 관심을 갖지 않고 어서 다른 일로 옮겨가기 바라고 있음을 의미한다.  
  - 64쪽

그런데 곧이어 유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서문에 작가가 조심스러우나 엄중하게 이 책 속의 나보다는 정신병원에 가기 전의 나였던 '파이드로스'가 사실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사회적이거나 반사회적인 경계는 - 정신병자는, 정말 미쳐서라기보다는 사실상 반사회적이라서 격리하는 경우가 많다 - 더 이상 긋고 싶지 않다는 식의 선언을 염두에 두게 하면서 머릿 속이 조금씩 뱅글뱅글 돈다.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이 책은 자서전적인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게 쓰여 있다) 

   
  자연의 볍칙이란 유령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명품이지. 논리의 법칙이나 수학의 법칙도 또한 유령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명품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게 다 인간의 발명품이지. 심지어 이 세상의 모든 게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생각까지도 말이야. 인간의 상상력을 떠나 존재하는 세계란 그것이 무엇이든 있을 수 없지. 모든 게 다 유령인 셈이야. 고대에는 모든 게 다 그렇게 인식되었어.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바로 유령들이지.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면 바로 이 유령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야. 모세, 부처, 플라톤, 데카르트, 루소, 제퍼슨, 링컨 등등이 모두 다 그런 유령이지. 아이작 뉴턴은 상당히 괜찮은 유령이야. 아마도 최상의 유령 가운데 하나일걸. 우리들의 상식이라는 것은 바로 이같은 유령들, 수천수만의 유령들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아. 유령들, 그리고 더 많은 유령들의 목소리 말이야.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유령 말이야.  
  - 77쪽

이 때만 해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책은 사회로 돌아온 나로부터 점점 그 옛날의 파이드로스에게 기억을 집중하고 강연을 하면서, 파이드로스가 고대희랍의 철학을 배우던 당시 소피스트를 궤변론자가 아니라 진정한 수사학을 정립하여 결국 후대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철학가로 언급하는 부분에서 정점을 이루어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울부짖게 만든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을 비교한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비교한다. 그들이 수사학과 변증법을 가지고 놀았던 이야기를 한다. 문학에나 쓰이는 것이라고 경시되었던 수사학을 변호한다. 변증법을 미워한다. 변증법을 미워하는 논리는, 변증법이라는 자체를 또 변증해야만 하는, 그런데 그걸 변증할 도리는 아무 데도 없다는 원천적인 불가해 속에서 이론, 즉 합리화의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파이드로스는 '질 質'에 미쳐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질이란, 합리화나 이론과 상관이 없는 어떤 것이다. 아니 그걸 초월해야 하는 어떤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파이드로스는 그토록 변증법을 비롯한 모든 철학에서 합일하는 이론적 철저함을 기대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분개하는가. 이 모든 이론과 진술, 주장들이 결국 자신의 질을 망치고 세상을 퇴보 시켰다고 믿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어서 철학을 내팽개치지 않고 거기 앉아 무엇을 하고 있으며 여적 이런 책을 쓰면서 독자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 이딴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페이지마다 튀어나오니 도무지 내용에 집중을 하기 힘들었다. 

책이 나왔을 때 논란이 무성했다는 후문이 적혀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끄덕이면서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참으로 난감했다.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묘한 책이니. 일독의 가치가 있는가도 고민스러웠다. 글쎄, 나는 그저 피어시그만큼 머리가 유별나게 좋지 않아 미치지도 않고 더 파고들 지적 능력도 되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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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1-04-08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얘기 한참 나올 때 제목이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무슨 책이 이렇대요~

치니 2011-04-08 19:27   좋아요 0 | URL
글을 적고나서 또 생각해보니,
적어도 모터사이클 관리술 측면에서는 제목만큼 내용이 좋아요. 선은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흑.

파고세운닥나무 2011-04-0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꾹 참고 읽어대니 쫌 알것도 같던데요^^
물론 '꾹 참는' 독서법 때문에 완독은 아직 하지 못했네요^^;

치니 2011-04-08 19:16   좋아요 0 | URL
파고세운닥나무 님은 눈치 채셨군요, 제가 꾹 참고 읽었다는 사실을! ^-^;; 그러고보면 저는 참는 걸 절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인데, 이 책을 다 읽었다는 자체가 이 책의 가치를 말해주는 듯도 해요. 결국 끝이 어떻게 되는가가 너무나 궁금했으니까 재미는 없었다고 할 수 없는 거죠.
님의 리뷰도 읽었어요. 물론, 저보다 훨씬 잘 이해하셨더라고요. ^-^; 부러웠습니다. 아 참, 올려주신 사진을 보니 피어시그는 심지어 션펜을 닮았어요!

파고세운닥나무 2011-04-08 20:45   좋아요 0 | URL
작가의 근래 모습은 도인풍이던데 말이죠^^; 말씀하시니 정말 숀펜과 어슷비슷한데요?
리뷰에서도 철학 얘기를 하시던데, 이 책에 철학 얘기가 좀 많죠? 철학 전공한 여자친구에게 이 책 읽다 뭣좀 물어버려고 했더니 본인도 재미없다며 넌더리를 내더라구요. 저도 철학 얘기 따라가는게 고역이었어요~

turnleft 2011-04-0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아레테"라는 개념을 소개하는 부분이었어요. 제가 이해하기엔 아레테라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더 나아지기를 지향하는 자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을 주체와 분리하는 소크라테스 식의 '진리'에의 추구 대신, 모든 것이 자신과 합일되는, 그래서 대상과 주체가 함께 발전하는 '질'의 추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거든요.

피어시그는 서구 문명의 기본이 되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주체를 소외시키거나 거꾸로 객체에 대해 무관심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문제는 이러한 서구의 철학적 근본을 허무는 사유가 결국 그 문명 내에서 자라난 스스로의 토대 또한 허물고 있었던거고, 마침내는 일종의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었던게 아닐까 생각이 되더군요.

암튼 100% 이해했다고는 절대 말 못하지만, 저한테는 꽤 인상적이고 강렬한 책이었습니다 :)

치니 2011-04-09 14:27   좋아요 0 | URL
턴레프트 님의 이 짧은 댓글이 전체를 정말 잘 요약해주네요.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정리가 되었어요. 특히 마지막 부분, 결국 그 문명 내에서 자라난 스스로의 토대 또한 허물고 마침내 일종의 파열음을 낼 수 밖에 없었다 - 이 말이 정답이지 싶어요!

인상적이라는 말씀에도 동의! :)

네오 2011-04-0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책을 선택하게 됐어요? 표지부터 정나미가 철절 떨어지던데요~ 예쁘게 꾸며으면 스킵했을지도 모르지만~ 요네하라 마리 신간 어떨것 같나요^^

치니 2011-04-09 14:29   좋아요 0 | URL
아마도 알라딘에서 누군가의 리뷰를 보고 선택한 듯한데, 그분이 아마 연랑 님이었던가? 지금은 헷갈립니다. ^-^;
표지는 저로서는 괜찮았는데요. 흐.

마리 여사의 신간은 언제나 흥미 유발, 함 읽어볼 생각이에요. :)

에디 2011-04-11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특히 좀 직업적인 의식을 가지고 (이 책을 추천하는 대가들이 꽤 있거든요) 보다보니 뒤로 갈 수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싶었어요. 그런데 첫번째 인용구는 자기계발적인가요? 저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 )

치니 2011-04-11 14:28   좋아요 0 | URL
직업적인 의식이요? 우와 그럼 에디 님은 설마 모터사이클 정비...사? ㅎㅎ
제가 아는 에디 님의 직업과 연관시켜보자니 언뜻 어떤 의미인지 짐작이 안 가요.
중반까지는 상당히 괜찮다 쪽으로 마음이 가다가, 후반에서 완전 헤매는 바람에 이 책 뭥미, 이래진 거 같아요.
자기계발적이지만 마음에 들어서 메모해두었던 인용구에요. ㅎ 근데 자기계발서에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한단 생각이 들어서.

에디 2011-04-12 20:24   좋아요 0 | URL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와 이 책이 자주 오르내리죠. 앨리스가 압도적으로 많이 거론되지만...


치니 2011-04-13 13:42   좋아요 0 | URL
오륜서는 일단 모르는 책이니 패스하고,
앨리스가요? 흐음....어찌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책 속에서 앨리스를 언급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네요. 어후, 아무래도 이 책은 제가 오독한 부분이 많은 듯.

차좋아 2011-04-12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고, 라고 퍼뜩 떠오르는데 맞아요? 저 이책 읽어요 말아요 치니님??

치니 2011-04-12 13:53   좋아요 0 | URL
으음, 제가 뭐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서도 ^-^;; 평소 차좋아 님을 보면 여러 방면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지라 한번 읽어 볼 호기심이 일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모터사이클 관리술 쪽에서는 아마도 저보다 훨씬 공감이 많이 갈 수도 있고요.
다만 이 책의 두께 때문에 들고 다니기에도 무겁고 누워 들기에도 마땅치 않고 책장이 잘 넘어가지도 않는다는 사실만 미리 알립니다. 그래도 읽으시겠다면 제가 보내드릴게요! 부러 사시기엔 또 금액도 만만치 않으니. :)

차좋아 2011-04-12 17:51   좋아요 0 | URL
이히히^^ 좋아요 감사해요 치니님 선듯 보내준다하시고.

하지만 너무 두껍고 또 모터사이클은 관리는 아직 관심없고 그래서 안 보내 주셔도 돼요^^ 선물 받은 듯한 기분이에요 ㅎㅎ

치니 2011-04-13 13:42   좋아요 0 | URL
ㅎㅎ 넵, 나중에 관심 생기면 말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