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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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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불순함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 유니폼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 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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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새마을운동을 조금이나마 겪었던 세대로서 잠재의식 속에 뼈아픈 거부감이 남아 있어선지, 나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것일 지라도 끝말에 '운동' 자가 들어가면 무조건 싫다는 생각부터 든다. 정부에서 나서서 주관하는 국어순화운동이나 영어조기교육 정책에서 비롯된 각종 운동은 물론이요, 주로 민간이 주체가 되는 걷기운동도 장애인 관련 캠페인도 환경 캠페인도, 뭐든 '자, 우리 모두 모여서 생각을 한 데로 모아모아 같은 행동을 합시다'라는 결의가 감지되면 지레 겁이 난다. 그 운동(무브먼트)과는 의미가 다른 운동(스포츠)인 학교 내 청백전 같은 것도 딱 질색이라 국민학교 시절 운동회에서 비교적 모범생인 내가 그 대중적인 광기와 경쟁을 피해 숨은 장소는 늘 양호실이었고 아무리 세상에 분한 것들이 많아 피가 끓어도 결국 데모대의 군집이 두렵기만 했으니(단지 군사정권 하의 무시무시한 압력 뿐 아니라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압박 자체가 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이 쯤 되면 나의 집단주의 혐오도 고종석씨 못지 않다.
나 같은 인간이야, 평생 이런 마음으로 살아왔으니 이 책에 나온 대개의 문장에 거부감이 들 리 없고 오히려 감탄을 거듭하며 그의 언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주장에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는 편이지만 그가 온 책을 통털어 때로는 조롱을 섞고 때로는 비탄에 잠기기까지 하면서 쌍수를 들고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 혹은 자신이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애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을 구절, 반론에 반론을 거듭해도 그 논쟁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평균의 정서'를 무시하는 구절도 꽤 된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논쟁거리에서 단 하나 불변하지 않는 사실, 즉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 낸 도구로써 우선 존재한다는 전제 하나로도 충분히, -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든 하지 않든 - 언어를 다루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을 일독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생각해보라, 기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작업에서 언어가 도구로서의 기능을 잃거나 그 기능을 일견 조금 무시하고 다른 기능을 우선시 할 때 나타날 불편함과 폐해를.
사족이지만, 이 책의 주장에 닿아있는 맥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에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트위터의 장단점을 가지고 잡담을 하던 끝에 한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트위터가 철학 책에 등장하는 순간 트위터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즉, 당장의 현실 속에서는 완전히 구세대에 속한다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언어 뿐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시대의 많은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가진 도구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가까이는 이메일에서부터 조금 더 오래 전 컴퓨터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도 학자들은 너무 많은 걱정을 했다. 이 컴퓨터 때문에, 이메일 때문에, 피씨 통신 때문에, 우리 인류에게 큰 문제가 생기기라도 할 것처럼. 다급해 하지도 말고 속지도 말자, 이 모든 것은 그 확장가능성을 차치하면 기본적으로는 역시, 도구이다. 당대에 나오는 모든 것들을 수용해야만 편리한 것도 아니고 오래된 것을 부둥켜 안고 살아야만 내가 가진 것들을 지켜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핸드폰 대신 전화기, 트위터 대신 긴 글, 자동차 대신 버스, 이렇게 자꾸만 갈라 놓지 말았으면 한다. 각자 그들 도구 중 내게 가장 잘 맞는 것을 골라 내게 가장 잘 맞는 형태로 만들어서 쓰면 되는 것. 모든 도구는 변형과 왜곡의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그 운명이다. 확장된 그것들의 기능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뿐 아니라 순기능도 물론 있지만) 때문에 도구 자체를 비난하고 그것들이 섞이는 다양성을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