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린고양이처럼 솔직해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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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평점 :
나더러 직접 만들라고 하면 실제 작가에 비해서는 비슷하게나마 구현 못할 책, 음악, 영화들에게 대중은(우리 독자는) 참 편하게도 이러쿵저러쿵 감상을 말하고 오해를 일삼고 내 취향에 맞으면 완성도와 상관없이 편애하고 맞지 않으면 역시 완성도와 상관없이 미워하며, 심지어는 내용의 잘잘못을 따지기도 한다. 대개 그런 온전하게 방만한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 지라, 괜스레 까탈을 피워도 작가에게 조금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작가로 나설 거였으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기준점을 높게 잡는 편. (그렇다, 어차피 내가 작가가 못될 바에야 이미 작가로 나선 사람들에게는 부러 기준점을 높게 잡고 심통을 부리는 질투 비슷한 감정도 없다고는 말 못하리)
요즘은 더구나 블로그를 운영하다가 책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일견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빼고 다듬는 일만으로 (만으로, 라고 쓰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대단한 노고가 들어가고 머리가 아픈 작업이긴 하겠지) 책 한 권이 떡 하니 나오는게 왠지 아쉬운 마음도 있었고, 대부분의 블로그 글이 사적인 잡담이나 개인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다소 관심도가 높아 수집한 정보들을 공유하는 수준일 수 밖에 없는데, 이미 인터넷에서 만인에게 배포된 그런 글을 묶어놓고 책으로 소유해야 할 가치가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긴 서론을 죽 뺀 이유는, 지금 이 책 - 굴라쉬브런치 - 라는 한 번역가의 동유럽여행기가, 내 그런 의심스럽고 괜시리 점수를 짜게 주는 독서 경향을 보란듯이 무너뜨려주었다는 걸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책은,
- 언뜻 블로그의 확장판처럼 보이지만 이런 블로그가 있다면 그냥 인터넷에서 슬쩍 보여졌다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글이었을테니 예의 아쉬움이 충분히 채워지고,
- 내 취향과 지은이의 취향이 대개 비슷한 가운데, 그 취향이라는 것이 여행에 대한 정의 혹은 여행하는 방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책, 음악, 영화 혹은 실컷 과장해서 인생을 사는 자세로까지 너르게 펼쳐지는 판국에 그 모든 것을 명징,담백,유쾌,진지,유머러스,통찰을 버무린 버리기 아까운 문장들로 고스란히 옮겨주고 있으니 난데없이 대변인을 둔 것처럼 든든하고 고마운 마음까지 들고,
- 많은 여행기들이 기록과 감상이라는 두 가지 추를 저울대 위에서 내렸다 올렸다 하느라고 산만해지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여행 그 자체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오류를 범하는 가운데 지루해지는 속성을 되풀이 하지 않고 있어서, 내가 읽은 그다지 많지 않은 여행기 도서들 중에 단연 최고로 재미있으며,
- 이는 어쩌면 작가의 직업이 번역가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일본의 동시통역사 '요네하라 마리'여사가 여행을 하면서 썼던 경험담과 에세이들이 그러하듯, 작가 역시 뿌리깊은 한국인이라는 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객관성을 줄곧 유지하는 여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 마리 여사가 그랬던 것처럼 윤미나 작가도 여행기 뿐 아니라 번역가로서의 갖가지 경험을 소재로 멋진 다음 책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는 대목이다.
첫문장을 읽는 순간, 야곰야곰 아껴먹어야지 싶었던 이 풀코스 가정식 만찬 (레스토랑의 그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나는)같은 책을 결국 몇 시간 만에 다 읽어버리는 와중에 귀를 접어야 할 페이지가 너무 많아져버려 초장부터 포기하고 각주가 달린 영화/음악/책들 중에 내가 이미 본 것들만 빼고 접어두었다. 마음이 즐겁게 바쁘다, 어서 그것들을 보고 어떤 부분과 정서가 동유럽의 바로 그 장면들과 겹치는 지가 궁금해서. (그 리스트를 보려면 먼댓글 타고 가서 부지런한 다락방님 글을 보시면 됩니다 ~ ^-^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치니)
아, 물론 여행기 본연의 치명적 매력인 '읽다보니 어느새 그곳에 무조건 가야할 것 같다'는 뽐뿌질은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아니 더욱 찬연하게 발현, 이제 나는 다른 덴 몰라도 체코만이라도 안 가고는 못 배기겠다. 그런데 언제 뭔 돈으로 가누, 으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