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아침에 일어나면 한숨이 나온다.
다름이 아니라, 날씨가 너무 좋아서. 도대체 이 좋은 날씨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만족할 수 있을까, 되도 않는 고민을 안겨주는 날씨.
일을 하다니, 아니 될 말. 거래처의 누군가와 신경전을 한다거나 책상 머리에 앉아서 컴퓨터와 씨름을 한다거나 하다못해 집구석 틀어박혀 책을 읽는 것도, 다 해서는 안될 짓처럼 느껴지는 건, 오버일까. 이런 날씨에는 일단 바람을 맞이할 바깥, 걸어갈 수 있는 한적한 거리, (여행 씩이나 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이런 정도의 소박한 일탈이 만인에게 허용되어야 비로소 한시름 놓을 거 같다는 것도, 역시 나만의 오버일까.
아무튼 와중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면서 산책을 대신 했다고 믿고, 도서관 벤치 아래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바람 쐬는 사람들을 흘깃 보면서 나도 그 바람을 나누었다고 믿고, 결국은 침대에 등짝을 붙이고 먼지 풀풀 날리는 책이나 읽는 게으름을 구차하게 변명할 길 없는 이눔의 가을 날씨.
서론이 길었다. 사실은 그 게으름에의 방기 속에서 그나마 읽었던 침대 맡 책들 중 두 권에 대한 감상을 끄적이려고 했던 것인데.
저자의 말빨 (아니 글빨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쩐지 말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니 그냥 말빨로)을 익히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어서인지, 유쾌 통쾌 상쾌는 오래 가지 않았다. 블로그의 글이거나 짧은 지면을 활용한 단문이 아닌 이상에는, 책 안에서 느낌표가 자주 등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예의 유쾌 통쾌 상쾌의 과잉 기호처럼 느낌표가 난무하여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전체적으로 참신하다, 에 그럭저럭 한 표를 행사할 만 하다.
사실 현재 내 처지가 백수이다보니, 묘수를 좀 찾아볼까 하는 얄팍한 계산에서 읽게 된 책이라 원전 <임꺽정>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들이댄 독자로서의 오독이 꽤나 많았을 거라 짐작되지만, 고미숙씨의 청소년 대상 강의 톤에 힘입어 일천한 지식에도 나누려는 메세지를 가감없이 받아들이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다 읽고나서는 늘 그러하듯, '그래서 어쩔까'라는 숙제가 남는데, 달인의 경지에 이를만큼 무엇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남에게 뻔뻔하게 기대어 먹고 사는 것이 아직도 못할 짓이라 여기는 폐쇄회로는 여간해서 부서지지 않는다. 이리하여 나는 '아마 안될 거야'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만, 이 사회의 많은 젊은이들이 고미숙씨가 권하는 자세로 '공부'하는 것에는 대찬성.
그 공부를 할 수 있는 청년들이 많아져서 패배주의를 감추는 낙관이 아니라 진정 힘 있는 낙관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지면, 무임승차 할 자신은 있다. (쓰고보니 이게 더 뻔뻔하군요)
고미숙씨가 느낌표 팍팍! 으쌰 으쌰 팔을 걷어부치게 만드는 힘을 줬다면, 오정희의 이 단아한 산문집은 그 힘을 (어쩌면) 확 무색하게 만든다. 어차피 고미숙씨의 책이 '문학'작품으로 나선 것이 아니므로,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두 책을 연달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무색해졌다는 표현까지 하게 된 것.
사회 속의 나를 전제로 깔았던 전자의 책에 비해 이 책은 오롯이 문학가로서의 나를 전제로 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랑 나랑 불가분의 관계임을, 다른 말로는 이 작가의 개인적인 살림과 소설가로써의 고뇌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여실히 토로하면서, 제목 그대로 그 마음의 무늬들을 살피며 결을 따라 빼곡하게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산문집이다.
간혹 (노파심에서 하는 말로) 촌스럽다 느껴질 정도의 정직한 글쓰기에의 자세, 그 자세로 인한 누구도 알 수 없는 괴로운 나날들, 그 나날들 속에서 아랑곳 없이 (남들 눈에는 태평하게 보일 수 있을 만큼은)이어지는 살림, 그 속에서 갈기갈기 찢겨진다고 목 놓아 울어도 모자랄 판에,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아직도 진정한 문학에의 길을 찾아 헤매는 고행의 끈을 놓지 않는 초로의, 이제는 더이상 소설을 쓰기 힘들어 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의 고해성사는, 잠깐 보면 소녀 취향이고 들여다보면 서늘한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난 시지프스의 비극이다. 그 비극을 승화하여 언젠가 척 하니 누구도 쓰지 못한 소설을 써내는 작가를 만난다면, 그것은 범속에서 예술을 유흥으로 누리려고만 하는 내게, 적어도 며칠은 잠못 이루게 하는 각성일테니, 부디 건필하시길, 내 안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자꾸만 작가에게 '쓰라는' 텔레파시를 보내라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