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그 번쩍하는 순간

 지난번에 <비밀의 숲>을 점심시간 마다 야곰야곰 읽는 재미를 잠깐 페이퍼에 끄적인 뒤로, 일주일이면 3-4번 가던 그 커피전문점에 한 2주 뜸하게 안갔더니 다 읽지도 못했는데 그예 책장에서 사라져 있더라. 

그래서 다른 책은 없나 하고 빈곤한 - 잡지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소설은 두 권, 미술이나 디자인 관련 책 두 권이 꼴랑 꽂혀 있다 - 책장을 들여다보자니 소설 두 권 중에 한 권은 역시 하루키다. (이 쯤에서 이 집 주인이 하루키를 꽤 좋아하는군, 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갈 때마다 음악도 일본인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흘러나오는 것이, 한 마디로 왜색이 짙군, 하면서 주인이 들으면 살짝 황당할 결론을 내림) 

아무튼 그래서 집어든 책은 이 책. 

 

 

 

 

 

 

 

이 책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최근의 하루키 사진을 봤는데, 엄허, 이 사람이 그 사람인지 몰라볼 정도! 하루키도 늙는구나. 



<출처: 알라딘 '렉싱턴의 유령' 책 소개 중 '저자 및 역자 소개'>  

이 따위 저질 사진 비교는 그만하고, 책 이야기를 하자면, 오! 하루키는 역시 단편 체질인가 싶게 읽는 재미가 완전 삼삼하다. 최근 이렇게 가독성이 좋은 단편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짧은 길이 내에서 인간의 깊은 어딘가를 탐구하는 동시에 세계나 인류, 사회적인 문제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공력이라니, 하루키는 역시 대단하구나 싶다. 

훔, 그런데 그런 하루키를 왜 자꾸 유부초밥이나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점심시간에만 살짝 만나는데 만족하는지, 그러니까 왜 맘 잡고 진지한 독서를 하는 대상이 안되는지 생각해봤더니, 아유 여러번 읽어도 도무지 적응 안되는 그의 영어 사용 문체가 가장 큰 문제다. 그리고 고상한 취미들, 재즈나 클래식을 알아야만 그가 글 속에서 표현하는 그 느낌을 온전히 알 것 같은, 그러나 끝끝내 다 알지 못할 거 같다는 예감 속 소외감으로 인해, 에이 하면서 그가 섬세하게 골라서 치밀하게 문장에 삽입했을 것이 분명한 브랜드 명들은 건너 뛰고 읽고 말아버리게 된단 말이다. 그렇다고 이걸 스노비즘이라고 치부하기에도 석연치 않다. 아 하루키씨, 이거 참, 이래저래 당신 작품에는 무념무상으로 올인하기 힘든 저 같은 독자들의 심정을 아실랑가요. 

사족: 며칠 전 KBS 1 FM에서 클래식 방송을 듣던 중, 하루키의 최근작 IQ84에 나오는 (지금은 당연히 이름을 잊은) 모모 음악가를 국내 초빙, 콘서트를 연다며, 실제로 일본에서는 그 모모 음악가의 씨디 판매량이 급증하여, 그의 일생을 거쳐 판매한 양을 단 한 달만에 훌쩍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소설 혹은 작가의 음악에 대한 영향력을 언급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자면, 하루키씨는 자신이 책 속에 소개한 모든 음악들의 저작권자들에게 약간의 수수료를 받아야 할 지도. (헤 - 농담입니다. 저 요새 삐뚤어져서 이래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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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2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렉싱턴의 유령] 정말 좋지요? 저는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 [일곱번째 남자]를 가장 좋아해요. 그 단편을 읽고 하루키 작품을 다 읽어버리기로 마음먹게 됐었어요. 왜 그 소년일 때 친구가 태풍에 휩쓸려 죽는 걸 목격하고 다시는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다가 아주아주 어른이 되어서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는데 그 장소의 파도를 보면서 자신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상처가 치유된다는 식의 글이었는데요, 와, 제가 다 가슴이 뻥- 뚫리는 거에요. 어엇, 이게 뭐지, 이 사람 정말 좋잖아, 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치니 2009-08-30 12:07   좋아요 0 | URL
무서운 영화 절대 못보는 저로서는 '유령'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괜히 쳐다도 안봤던책인가봐요. 그런데 막상 첫 단편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보니, 오 하루키 책들 중 이 책이 유난히 좋구나, 그런 생각이 들대요.
다락방님이 왜 그렇게 열렬히 좋아했나도 알겠구요. ^-^
[일곱번째 남자]까지는 아직 진도 못 나갔지만 가슴이 뻥 - 뚫렸다는 거, 짐작 갑니다.하루키의 재능이에요, 분명.
지금까지는 저는 [침묵]이 제일 좋았어요.

니나 2009-08-2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결국 아주 많이 하루끼를 사랑하게 되었거든요. 긴시간에 걸쳐.
렉싱턴의 유령에서 아직 토니 타키타니 밖에 안 읽었는데
언능 다 읽고 이번에 나온 신간도 봐야겠어용 ㅎ

치니 2009-08-30 12:09   좋아요 0 | URL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 - 뭔지 알 것 같아요.
전에 어떤 분이 하루키는 애증의 대상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도 공감이 되구요.
결국 사랑하게 될 만큼 깊은 여운을 남기다가 갑자기 그저 그런 글을 써버리는 하루키, 저에게도 애증까지는 아니지만 아리송한 분으로 계속 남아 있었어요.
하지만 니나님처럼 결국, 그렇게 될 지도. ㅎㅎ

토니 2009-09-07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하루 휴간데.. 책 사러 갈까합니다. 언니 덕분에 또 좋은 책 한권 알게 되었네요. 감사해요! 꾸벅 ^^

늘 저에겐 휴식같은 이 공간이 오늘은 더 친숙하게 더 편안하게 느껴지네요. 언니 신경숙 씨의 엄마를 부탁해 읽어보셨어요? 언니 생각은 어떤지 좀 알고 싶네요. 읽으셨다면...

치니 2009-09-08 09:11   좋아요 0 | URL
앗, 휴가군요. ^-^ 휴가에 책을 사러 가는 건강한 토니님.

전 신경숙의 책을 읽지 않은 지 좀 오래 되었는데, '엄마를 부탁해'는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인 것 같아서 안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