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튼 3부작 - 박스 세트 - 파리에 간 고양이, 프로방스에 간 고양이,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고양이
피터 게더스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내가 노튼이라면 - 이 3부작 세트의 주인공 고양이 이름이다 - ,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은 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지혜와 차분한 고상함,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귀엽고도 도도한 외모,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궤뚫고 행동하는 통찰력, 자신에게 쏟아지는 플래쉬 세례를 겁내지 않고 즐기는 당당함, 그럼에도 교만하거나 오바 하지 않는 진중함을 두루 갖춘 노튼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고양이 노튼이 아니라)치니다.
타고나기도 어리석고, 고상함과는 거리도 멀고, 귀엽고도 도도한 외모 같은 것은 꿈꾸기에도 이미 늦었고, 통찰력도 젬병이며, 조금만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어도 괜시리 오바하기 일쑤다.
그러니 호들갑을 떨었다 해도 스스로 이해를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모든 호들갑은 우연에서 기인했다.
지난 8월말에 휴가를 맞아 파리 여행을 다녀왔고, 여기저기 프로방스에 대해 막연한 로망이 있다고 떠들어 댔으며, 고양이는 아니지만 같은 반려동물인 개, 그러니까 우리 두리에 대해서도 떠들어댔었다.
이 모든 것을 합한, 그러니까 내 로망과 내 경험과 내 특별한 애정 같은 것이 다 포함된 책 세트가 어느날 툭 하고 내 책상에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메시지 하나 없이,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택배 상자 안에, 모르는 전화번호와 사용하지 않는 웹싸이트가 보내는 이의 이름으로 적혀서.

때는 추석 전날이었으니, 우선 거래처를 떠올려 봤다. 거래처가 내 파리 여행이나 내 로망, 사생활 따위를 알 리가 없다. (발설한 적이 없으니까)
다음으로는, (솔직히 민망하긴 하지만) 알라디너들을 떠올려 봤다. 콩스탕스님처럼 일면식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주 오시는 지도 몰랐던 알라디너분이 친절하게 책을 보내주셨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왜 아무런 메시지가 없는 것일까.
그 다음으로는, 친구들을 떠올려 봤다. 친구들은 나를 잘 알기는 하지만 책을 비밀리에 부쳐줄 이유가 더더군다나 없다. 서프라이즈 이벤트 같은 걸 즐기는 친구도 별로 없거니와, 그랬다 해도 책이 도착할 즈음에는 뭔가 신호가 있었을 거다. 아니 이제쯤에는 그게 나야! 할만하지 않은가.
다음으로는, (이런 행운이 내게 온다는게 이상하지만) 그야말로 나도 모르게 경품 응모가 되어서 (이런 경우 있다는 소리는 어디서 주워들었다), 오*뮤직 출판사업부가 나에게 띡 책만 보낸 것일 거라는 추측이 가장 타당성 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 그렇지만, 왜 그 중에서도 파리, 프로방스, 고양이 일까.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뒤로 한 채 추석 연휴 동안 세권의 책을 다 읽었다. 이젠 우연의 음악이야 어떻게 흐르든 상관 없다. 누가 되었든 나에게 보내준 사람에게 그냥 감사한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미소 짓고, 낄낄 거리고, 울었던 시간들이 아깝지 않을 뿐더러, 소중하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이 한 인간의 삶을 통째로 변화 시키는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들었고, 보았지만, 여행기이자 성장 소설이기도 한 이 세트는 재미와 감동이 남다른 데가 있다.

유일하게 못마땅한 대목은 우리 두리와 같은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가끔 멍청하고 우둔하고 먹을 것만 밝히는 큰 동물 쯤으로 묘사한 것인데, 종종 영물이라 일컬어지기까지 하는 고양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역지사지 해보면 그렇게 보일 것 같기도 하니, 최대한 관대하게 넘어가주기로 했다.

내 생각에 반려동물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인간과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훨씬 콩깍지가 오래 (아니 평생) 안 벗겨진다. 내가 키우는 ㅇㅇ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가끔, 이런 맹목적인 사랑을 인간에게 주었다가 받을 마음의 상처 때문에 애완동물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만, 어쩌겠는가, 인간은 가장 약하고 외로운 동물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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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8-09-1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감각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란 없다'는 문장을 알려준 책. 고양이건 사람이건 개건 체온이 있는 것들은 다 약하고 외로워요. 태그에 (눈물의) 동의.

치니 2008-09-19 11:35   좋아요 0 | URL
아, 네꼬님도 읽으셨군요, 하긴 대문에 고양이 사진을 걸어놓은 네꼬 고양이가 이 책을안 읽었을 리가 없겠네요. ^-^
동물도 외롭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겠지만...사람만큼 이기적으로 상대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 같아요.

2008-09-19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9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da 2008-09-1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굴까. 저도 궁금해 미치겠어요. (응? 미칠 것까지야?)
암튼 치니님은 복도 많으셔요.
스포일러를 알아버렸지만, 그래도 읽어야겠어요.
쿨 치니님을 울렸다는데.^^

치니 2008-09-19 14:02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미치겠다 라는 말이 나오더니, 이젠 완전히 출판사에서 준 걸로 믿고 있어요.ㅋㅋ
실제 읽어보시면 저 정도는 스포일러가 전혀 아니라고 말씀하시게 될 걸요. 훗.
쿨 치니라는 말을 또 쓰시니, 네꼬님 볼까 무서버요. ㅠㅠ (그 이유가 궁금하시면 웬디양님 글에 단 네꼬님의 덧글을 보시랍, 네꼬님은 이 세상에서 쿨 한 사람이 제일 싫다고 그랬다구요)

비로그인 2008-09-19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랄까, 전 `고양이만이 이 세상 최고의 동물임' 이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말투가 이전 표지만큼이나 거슬렸어요. 물론 그정도야 개인의 호오에 따라 나뉠 수 있는 의견 중 하나라고 봅니다. 표지가 바뀌었군요. 정말, 천만다행이란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 같아요. 그전의 표지는 정말, 구매욕은 둘째치고 독서욕까지도 뚝뚝 떨어뜨려줬거든요. 후훗

치니 2008-09-19 15:08   좋아요 0 | URL
작가 개인사가 자잘하게 나오니까 거슬리는 것을 일일히 적으면 족히 한 페이지는 나와요, 그럼에도 감동해줄 수밖에 없는 것이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가 싶어요.
예전 표지는 전혀 모르는데, ㅎㅎ Jude님의 평소 심미안에 비추어보면 어떨 지 짐작이 가네요.

mooni 2008-09-21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때 저예요. 하고 나서면 금방 믿으실 것같아요...ㅎㅎ 안보낸 선물, 보낸양 가로챌 훌륭한 기회! 라는 생각이 들지만. (실은 진짜 저예요. 히힛) 좋으셨겠다. 공짜로 얻었는데, 거기다 재밌기까지!! 보통 걍 주는 책들은 잼없잖아요. +_+


치니 2008-09-23 10:12   좋아요 0 | URL
마하연님이라고 하면 안 믿길거 같아요, 제가 아는 마하연님은 그렇게 미스테리하게 사람 애간장 태우는 분 아닌 거 같아서...^-^;
보통 걍 주는 책들이 재미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책 욕심 많아서 대개 무조건 받죠. 흐흐.

chaire 2008-09-2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가 그냥, 아무 쪽지도 없이, 저렇게 예쁜 짓을 할 리가 없어요.
그 출판사 직원이 평소 치니 님을 흠모했다면 모르지만.
대체 누굴까요? 뒤늦게 이 글을 읽은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아, 차라리 제가 보냈으면 이렇게 궁금하지 않았을 텐데. 흐흐흐.
누군지 알게 되심, 전면광고 부탁드려요.

프로방스, 저도 가고 싶군요.



치니 2008-09-23 10:14   좋아요 0 | URL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으니, 아마 출판사나 오*뮤직에서 보낸 것이 맞는 듯 하고요, 아무런 연락을 못 받은건 강력한 스팸 차단 기능 때문에 메일이 사라진 게 아닐까 싶고...지금은 그렇게 마음 정리했어요. ^-^
음악이나 출판 쪽 싸이트를 하도 싸돌아다니니, 아마 자동 응모 같은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출판사 직원이 저를 흠모! 으흐 ,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만, 이건 결코 아닐 거라는데 내기를 걸고 싶어집니다요.

프로방스, ㅠㅠ 너무 가고 싶어요.

로드무비 2008-09-2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햄스터를 키워보니 그 기분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3부에서 죽을 노튼을 생각하며...)

전 창비 독자평가단을 하다가 연장 여부를 묻길래 안하겠다고 메일을 보냈는데요.
그 정도 결정을 내리는 것도 어렵더라고요.(아무래도 공짜책에 대한 미련이......)
고맙게도 그동안 감사했다며(리뷰도 많이 떼먹었는데) 마지막으로 또 책을
한 권 보내왔더군요.(창비 매너 짱~)

프로방스 책 저도 두어 권 사둔 것 있는데.
신이현이 쓴 책은 보셨어요?^^





치니 2008-09-27 23:21   좋아요 0 | URL
오옷, 역시, 로드무비님은 무려 독자평가단이시구나.
전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리뷰를 떼먹더라도, 막상 써주시는 리뷰는 그야말로 일품이니까, 감사했겠죠. 창비도 다 보는 눈이 있을테니까. ^-^

신이현의 <알자스> 관련 책 말씀 하시는거라면, 아직 못 읽었어요.
좋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는데...이 참에 한번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