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 기간 쌓아온 관계, 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은 적이 여러번 있다.

관계가 형성되고 소위 정이라는 것이 쌓이면, 처음 관계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직한 상대의 각별한 매력은 종종 잊혀지고, 상대적으로 내 매력을 상대에게 발산하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게 되며, 가식이 덜해지는 대신 냉정한 분석이 더해지면서 '충고'라는 말로 상대의 인생살이에 자잘하게 끼어들어 간섭하기를 서슴치 않는 것도 당연해지는 - 순차적인 관계의 주기가 마뜩치 않았다고 할까.

그러나 , 그 오랜 기간 쌓아온 관계의 '오랜'을 유지하는 가장 큰 비결이 위와 같은 무의식적인 게으른 관계 유지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은 것임도 잘 알고 있다. 즉 미워도 고와도 내 친구는 역시, 내 남자/여자는 역시, 라는 마음을 가질만한, 적어도 그런 눈을 맑게 지니고 있어야만, 오랜 관계는 깨지지 않더라는 거다.

소설 속의 두 남자의 우정도 처음에는 그런 것만 같았다. 한 여자를 둘 다 사랑했고, 둘 다 그녀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것을 알아도 괘념치 않는 쿨 가이들이었으며, 각자 기자와 음악가라는 소위 잘 나가는 인사들이라 영역도 다르고 성공도도 비슷해 질투할 꺼리도 없는, 그저 가끔 더 자주 만나지 못하고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그런 이상적인 관계였으니까.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한낱 - 그래, 나는 굳이 '한낱'이라고 적었다 - 도덕성 때문에 깨진다. 깨질 뿐 아니라 파국으로 치닫는다.

기자 친구는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에 정치인이자 자기도 사랑했던 여자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인생을 평생 망칠 계획에 사로잡혀 있고, 음악가 친구는 위대한 작곡 혼을 불사르느라 산에서 홀로 위험에 빠진 여성을 못 본 채 했다.

정말, 도덕성이 그만큼이나 중요해서 이들 둘의 그 오랜 탄탄한 우정이 깨져버린걸까?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행동을 하는데, 내가 말릴 때 듣지 않는다고해서 나는 '이제 그사람은 내사람이 아니야, 그사람은 응징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할 권리가 있을까?

상대에 대해 응징이라는 생각까지 할 때, 과연 나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되는지 우리는 스스로를 보다 자주 검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작가는 소설을 읽고 독자들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해주길 노골적으로 바라는 스타일인 듯. (아직 이 작품 한 권만을 읽어서 확신할 수 없지만) 그의 입장에서 독자들이 생각해보길 원한 것이 이 소설에선 꼭 짚어 어떤 것이었을까 알 수는 없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단숨에 읽을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빨리 읽고 오래 여운을 남기는 소설로서 메시지를 강렬하게 주고 싶었던 것 만큼은 분명해보인다.

그러나 메시지는 기대한 만큼 강렬하지 않았고, 나는 이전에도 했던 생각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떠올려 또 다시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들을 막연하게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암스테르담은 내게 여운을 주기보다는 잊고 있던 생각거리를 던지는 데 의의를 주었을 뿐, 감동이 2% 부족한 소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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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8-09-0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옹, 뱅기~ 어데 다녀오신거야요? ㅎㅎ

치니 2008-09-02 13:44   좋아요 0 | URL
헤헤, 자랑할 기회를 주신 니나님, 감사 (꾸벅)
휴가로 빠리에 다녀왔어요.
지금도 아삼삼 그 짧은 추억에 정줄놓.

니나 2008-09-02 22:34   좋아요 0 | URL
캬오, 아삼삼~ 부러워라^-^

chaire 2008-09-0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큐언이 좀 그렇더라구요. 굉장한 메시지라기보다는, 잊혀졌던 혹은 무관심했던 것을 끄집어내서 약간의 불쾌감을 준달까요. 근데 그 불쾌감을 곱씹어보게 만든달까요. 친구라는 관계들의 허구성도 허구성이지만, 암스테르담이라는 장소로 상징되는 허구성 같은 것에서 약간 생각이 복잡해지더라구요. 휘몰아치는 감동을 주는 작가는 아닌 거 같은데, 디테일한 문장력과 인간을 탐색하는 기법 같은 데선 귀재를 갖고 있다 싶더군요.

어쨌거나 비행기에서 읽으면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비행기도 그러니, 우주 시대가 오면 독서는 꽤 어려운 노동이 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불현듯 하고 앉았습니다. ㅎㅎ.

여행은 즐거우셨겠지요? 이제 남은 건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것이려나요...? 파이팅입니다!

치니 2008-09-02 13:4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chaire님이 작가의 어떤 부분 때문에 매큐언을 놓았다 다시 들었는지, 어떤 부분 때문에 놓았었는지, 왠지 짐작이 갔어요(아주 살짝이지만)
디테일한 문장력/인간 탐색 기법에 대한 귀재를 가진 점, 저도 인정이 되는데, 때로는 약간 지나치다 싶은 - 뭐랄까 그냥 단순하고 깔끔하게 묘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 장면도 있었긴 했구요.
전체적으로는 동의해요. 비행기가 문제였던 것이 꽤 설득력 있는게, 너무 건조하고 어두운데서 불 하나 키고 읽으니까 눈이 뻑뻑하고 금세 피곤하여 디테일에 더 집중이 안되는거 같았거든요. 느긋하게 읽었다면 이거 정말 제대로다 하는 표현이나 탐색의 노력들이 속속 눈에 더 많이 띄었을텐데요.

여행은 무척 좋았어요. 가히, 제 인생 쵝오라고 할 만큼. ^-^
회사는 이번달까지, 헥헥, 이거 시간이 왜 이리 느린지...^-^;;

nada 2008-09-0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셨군요, 오셨어!
인생 쵝오의 여행은 도대체 어떤 건가요?
심히 질투를 느끼며 손톱으로 벽을 긁어내리는 꽃양배추입니다. -_-
'비행기'라는 3음절 단어가 너무 황홀하게 보여요.

저는 '체실 비치에서' 한 권을 읽었는데요.
도대체 말이 너무 많다는 느낌?ㅋㅋ
그리고 카이레님이 말씀하신 그 묘한 불쾌감.
작가라는 작자들이 하는 일이란 게 원래 세상 모든 불쾌감을 까발리는 거겠지만
뭐랄까. 나는 이렇게까지 인간을 알고 싶지는 않구나. 그런 생각도 좀 들었어요.
하지만 역시 천생 작가는 작가구나, 참 잘도 써제낀다..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여행 이야기, 그냥 넘어가실 건 아니지요? 히~

치니 2008-09-03 08:54   좋아요 0 | URL
헤헤, 꽃양배추님이 질투해주시니까 왠지 수줍으면서도 으쓱하네요.

"작가라는 작자들이 하는 일이란 게 원래 세상 모든 불쾌감을 까발리는 거겠지만
뭐랄까. 나는 이렇게까지 인간을 알고 싶지는 않구나. 그런 생각도 좀 들었어요.
하지만 역시 천생 작가는 작가구나, 참 잘도 써제낀다.. "
-> 이게 바로 딱 제 느낌이랑 99% 같은데, 전 왜 리뷰를 이렇게 밖에 못 쓰고 말았을까요, 흙. 역시 꽃양배추님의 예리한 감상은 항상 저를 울립니당.

여행이야기는 헹 - 올리자니 쑥스러워서 원.

푸하 2008-09-04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얏~ 잘 돌아오셨어요.

치니 2008-09-04 08:36   좋아요 0 | URL
푸하님도 잘 지내셨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