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하지만, 2주째 - 정확히는 내가 초절정 감기몸살을 겪어내고 난 후부터 - 일이 별로 없다. 팀에 1인 추가 인원이 배치된 지 2개월 남짓 되긴 했지만, 꼭 그 때문에 내 일이 줄어들었다고 할 수는 없고, 그저 전반적으로 일이 줄었다.

일이 줄어드니 직딩인 나로서는 좋으면서도 싫은 이율배반에 시달린다. 심심하게 노는 걸 유독 좋아하는 지라, 이런 편안함이 참 좋은데, 이렇게 밥 값 안하고 지내도 되나 싶어 노심초사하니까 그렇다. 눈치 보지 말고 살자, 고 외치면서도 눈치는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이 심정. 으흐흑. 지금 이 순간도 누가 벌컥 문을 열고 와서 내가 이 짓 하는 거 볼까봐 10% 정도는 긴장 상태에서 타이핑 중이다.

이런 날들엔 유유히 짐 싸서 휙 하니 휴가를 가도 좋으련만, 3월이라는 단어는 어째 그런 엄두를 못 내게 한다. 휴가는 한겨울 아니면 한여름이어야 한다는 이상한 편견은 어디서 나온걸까. 3월에는 모든 걸 시작한다는 편견은 학교 입학식 때문이겠고.

아무튼 그런저런 노라리 노라리 시간에서, 하루종일 컴과 지내야 하니, 알라딘 서재 보다가 궁금한 싸이트들은 다 들르고 있다. 웬디양님 서재에서 본 루나파크(www.lunapark.co.kr) 가보고, 꽃양배추님 서재에서 본 김혜리 기자의 블로그(http://blog.cine21.com/imagolog?&pageNo=11) 가보고...

나이 먹어 그런지, 취향의 탓인지, 개인적으로 김혜리 기자의 블로그가 훨 재미있다. 루나파크의 그림은 귀엽지만 내가 좋아하는 류의 그림이 아니고, 어떤 일화는 공감이 되는데 어떤 일화는 너무 시시하다. 웬디양님처럼 사소한 것에 감동하지 못하는 내 타고난 퍼석함과 심드렁함 때문이겠지.

김혜리 기자의 블로그는, 듣던대로 참 아늑하고 단아하고 냉철하고(다른 이에게가 아니라 김혜리 본인에게만) 따스하고 매력적이다. 별 것 아닌 글 같은데 다 읽고 나면 엄청난 가독력을 주는 글이었구나 싶고, 갑자기 띵 하는 감동도 오고 그런다. 게다가 잊고 있었던 배우들이랑 가슴 떨림이 불현듯 찾아오면서 약간 행복한 마음도 된다.

그 중 자신이 썼던 일기를 되돌아보는 포스팅이 있었는데, 나도 문득 내 일기들을 다 어쨌던가 생각해봤다. 지금 쓰는 일기는 기껏 싸이 다이어리에 일촌공개나 비공개로 푸념을 적는 정도의 일기이고, 한 때 열심히 내 머릿속 모든 이야기들을 쏟아내곤 했던 일기장들이 있었다. 아마 고교시절에 제일 치열했을 것 같다. 그것들은 잘 버리기 대장인 내가 버얼써 옛날 옛적에 버렸지만, 그 때 했던 생각들은 내 뇌 한 쪽의 저장고에 잘 모셔져 있다. 이상하게도, 그것만큼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했던 사랑에 대해 꾸질꾸질 적었던 것들은, 거개가 기억나지 않는다. 특히 작은 에피소드들, 당시에 너무 슬프고 너무 졸렬하고 너무 기대했던, 혹은 너무 반짝였던 에피소드들이 그 대상과의 헤어짐 이후에 뚝 하고 끊어진다. 이건 분명 지극한 자기보호본능이 만들어낸 해리성 기억상실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 자신 이해 되지 않는다. (남들은 더하지)

한 때는 정말 열심이다가 , 어느 때 부턴가 아니야 싶다고, 그게 뭐 그리 큰 트라우마라고, 온갖 보호본능이 작동해서 뚝 끊어지고 그럴까.

요즘은 사랑하는 사람이 더 사랑스럽고, 보고 싶은 사람이 더 보고 싶은 좋은 병에 걸려 있다. 수년이 되었는데도 자꾸만 손가락 하나도 더 보고 싶어서 아릿한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번인 거다. 그러다 문득, 이것조차 나중에 예의 사랑처럼 잊으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되어서, 조급증이 난다.

조급해서 좋을 건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데.

낮에 사무실 직원들에게 하린군 이야기를 하면서, 조소를 들었다. 자기 애 이야기를 하면서 나처럼 태연하게 '우리 하린이는 너무 멋있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정말 멋있어' 라고 말하는 엄마가 별루 없기 때문에 그럴 거다. 그런데 진짜 멋있는데 어쩌지. 아하하.

아무튼 요새 이런다. 좋은 것들이 점점 더 좋고 싫은 건 더 싫어진다. 당연한 건가? 아니, 고쳐 말하면 좋은 것에 대해선 비판력을 완전 상실하고, 싫은 건 좋아해보려고 노력을 안한다.  원래 그랬나? 아니다, 아냐,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나쁜가? 아니다 이 상태가 나는 좋다.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나? 별로 아니다. 됐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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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i 2008-03-26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라리 노라리 시간. ㅎㅎㅎ 노는 시간이 생기니 신조어를 발명하시는.. ㅋㅋ
그게 직장에서 쉬는 틈이 있대도 눈치보여서 본격적으로 놀지도 못하잖아요. 책을 볼것도 아니고, 영화를 볼 것도 아니고. 일을 한번에 확 몰아서 해치우고 나면, 짬짬이 노는시간 한몫으로 몰아서 집에가도 좋다! 이럼 좋을텐데요..^^
근데 짬짬이 놀고 계시니까, 업데가 잦아서 좋으네요. 헤헤. (저두 신끼 있어요. 예지몽 꾸거든요. 진짜예요. +_+ 별로 신통한 예지는 못하지만요.ㅋ )

치니 2008-03-27 08:41   좋아요 0 | URL
노라리노라리, 저는 어디서 들어서 써먹은건데, 신조어는 아니공. 헤헤
마하연님으로서는 먼 옛날 이야기 같겠네요.
아앙 부러워요.
예지몽, 저도 꾸긴 꾸는데 꼭 나쁜 일이 생길 때만. 흑.

웽스북스 2008-03-26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으면서도 싫은 이율배반 완전 공감이에요
일 많을 땐 죽을 것 같다가, 좀 한가해지면 으흠, 잉여인간인가 뭐 이런생각 들고 ㅎㅎ

루나파크에 다녀오셨군요 루나파크는 헤헤거리며 시간 보내기 좋은 곳인데
치니님께는 잘 안맞을 수도 있지요 제가 사소한 일에 워낙 감동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구요 ㅎㅎ 그냥 좀 애가 유치찬란한 걸수도 있어요 ㅋㅋㅋ

그런데 저 지금 막 김혜리기자 블로그 들어가고 있어요 (덕분에 알았어요 흐흐)

치니 2008-03-27 08:43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웬디양님은 그 좋으면서도 싫은,을 분명 이해하실 거라 믿었어요. 흐흐.
잉여인간 말씀하시니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 생각나네요 (아 또 삼천포 ㅋㅋ).
루나파크는 재미는 있었는데 여운이 아무래도 김혜리 기자 쪽이 쎄더라구요. ^-^ 웬디양님도 소감 올려주세요.

chaire 2008-03-2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교시절의 다이어리가 가장 처절했던 거 같아요. 그때는 죽이고 싶은 것도
적지 않게 있었고, 간절하게 희구하던 것도 있었죠. 희망도 절망도 치열하게 하던 시절.
지금은 그중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니, 늙은 게 맞겠죠. 요즘의 일기는 그래서
간혹 희멀건한 흰소리 같다고 느껴요. 잘 쓰지도 않지만.
유치한 거 싫어했는데 그게 외려 좋은 거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혜리 씨 블로그, 가봐야겠다.

치니 2008-03-27 10:12   좋아요 0 | URL
네 , 지금껏 생각나는 것 중 하나는, 스스로의 위선과 가증스러운 가면 때문에 몹시도 괴로워했다는 것. 타협하면 안될 거 같은, 나라도 그래야만 이 세상이 변혁될 것만 같은 생각을 막 하고 그랬죠.
지금은 뭐... 말 안해도 아시죠? ^-^;;
혜리 씨 블로그, 저때문에 (아니 실은 꽃양배추님 때문)몇명 방문자 늘었겠네요. ㅋㅋ

토니 2008-03-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언니들이 제 일기를 자주 훔쳐봐서 엄청나게 큰 자물쇠를 달았던 기억이 나요. 매번 콤비네이션 번호 맞춰가며 열어 일기 쓰는게 어찌나 번거롭던지. 무슨 국가 기밀이 담겨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스워요.

언니 글은 편하면서도 나름 흡입력이 있어 읽을 때마다 즐거워요. 전 이제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어요. 옛날 고집과 열정은 다 어딜가고 그저 몸뚱아리 편하면 다예요. 전 제가 이렇게 싱거워질 줄 꿈에도 몰랐어요.




치니 2008-03-27 11:37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장에서 '몸뚱아리 편하면'이라는 리얼한 표현에 혼자 소리내어 웃습니다. 하하.
일기에 자물쇠가 달려 있는 일기장도 있었드랬죠.
저는 혹시 누가 집에서 볼까봐 친구에게 맡기기도 했었어요.(그렇다면 친구는 봐도 됨? 예스 ㅎㅎ)
그야말로 끄적임일 뿐인 글인데 흡입력까지나...아무튼 감사해요. :)

네꼬 2008-04-0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댓글의 10%가 바로 그래요.

치니 2008-04-02 16:20   좋아요 0 | URL
아앙, 네꼬님.
멍청한 치니씨, 지금 무지 헷갈려 하고 있어요.
'그래요'가 뜻하는 게 무얼까 하고... 내 글을 내가 다시 읽어도 도무지 어떤 걸 두고 말씀하신건지 잘 모르겠어요.
불쌍한 중생을 위해 시적인 함축에 대해 약간 설명해주심 안될까요.

네꼬 2008-04-02 19:12   좋아요 0 | URL
((으앗 제가 창피. 제멋대로 써버렸다니.))

"지금 이 순간도 누가 벌컥 문을 열고 와서 내가 이 짓 하는 거 볼까봐 10% 정도는 긴장 상태에서 타이핑 중이다."

저도 10% 정도는 긴장한 상태로 댓글을 썼다는.....

=3=3=3



치니 2008-04-03 08:44   좋아요 0 | URL
ㅋㅋㅋ 네꼬님,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선생님 말씀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느니라'였어요.
못알아들은 제가 센스 부족이죠.
아무튼, 지루한 일상에서 10% 긴장하면서 요런 댓글 다는거 너무 깨소금이에요. 헤헤.

nada 2008-04-06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 없는 사람, 살짝 서러워질라고 해요.ㅋㅋ
그래도 저 기타 치는 얄쌍한 손목은.. 머, 멋있잖아요. 이런. =.=

치니 2008-04-06 13:05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이 아이를 갖는다면 - 쑥스러운 상상 헤헤 - 게다가 아들이라면, 분명코 하린군보다 멋진 구석이 있으리라 장담해요.
왜냐면, 모든 어머니는 고슴도치 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