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는 폭행을 일삼는 남자친구를 신고했으나 그가 가벼운 벌금형을 받는 데 그치자, 스스로를 보호할 생각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그녀를 응원하는 이들보다 ‘멍청한 여자’ ‘남자 신세 망친 여자’라는 비난하는 이들이 더 많다. 진아는 악성 댓글 중에서 그녀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한 한 줄을 발견하고, 그것을 단서 삼아 혹은 핑계 삼아 고향으로 내려간다. 댓글을 쓴 사람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진아는 대학시절은 물론 시골에서 보낸 어린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뜻밖의 사실을 마주한다. 그것은 그녀의 친구들, 나아가 그녀 자신조차도 강간의 피해자였다는 것과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깊이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맥락을 들여다 봐.”(진아의 상사가 사건 이후 진아에게 한 말)

Vs 여러 화자 또는 주체의 엇갈린 진술, 순서가 뒤섞인 회고


이진섭이 왜 폭행을 저질렀는지, 즉 진아가 왜 맞았는지 ‘맥락’을 살피라는 종용은 결국 진아를 ‘맞을 만한 여자’로 만든다. 맥락은 가해자가 폭력성을 갖게 된 이유를 추적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명백히 발생하였고 여전히 있는 피해 사실을 지우고, 맥락에서 피해자의 잘못을 캐낸다. 그 반대편에서, 작가는 일관되지 않은 서사 방식을 채택한다. 이것은 ‘믿을 만한 사람, 일관된 사람’으로 보이는 가해자(진섭, 동희)와 달리 두서없이 말하고 감정적이며 믿기 어려운, 어리고 지위가 낮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전략으로 보인다. 가해자와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게 하는 것. ‘소설’이 사건에 대응하는 방식.


그런데 이렇게 흩어진 시점, 여러 화자가 진술하는 방식은 피해자의 감정 분출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진아는 진섭의 폭행과 수많은 2차 가해의 피해자로서 댓글 작성자를 찾아내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그녀 자신의 과거가 뜻밖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무심코 저지른 냉대와 사소한 거짓말, 간절했던 소망이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오래 전 동희가 자신에게 저지른 것이 강간이었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그리고 두 사람.


● 유리 : 사랑과 관계를 갈구하는 불안정한 그녀를 남자들도 여자들도 무시하고 쉽게 경멸한다. 주인공 진아조차 유리를 거의 잊고 지내다가 ‘진공청소기’를 언급한 악성 댓글 때문에 떠올린다. 이어 유리는 다른 사람들의 험담에 가까운 증언으로 묘사된다. 진아가 떠올리는 유리의 마지막 모습도 여러 차례 번복된다. 회식 자리에서 아예 못 본 것으로(69쪽 ‘그것이 끝이었다’), ‘7-38’이라는 숫자가 성폭력 피해자 상담 번호임을 안 뒤에야 당시 유리가  ‘진아야, 나 좀 도와줄 수 있어?’라고 말한 것으로, 마침내 동희가 유리를 강간했음을 알고 나서야 자신이 그 마지막 순간에 유리를 확실하게 외면했던 것으로 기억이 구체화된다. (또는 인정하게 된다.)


● 동희 :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일을 주도하고 싶은 자, 통제하고 있다고 확인하고 싶은 자,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선점하고 싶은 자, 실리를 따져 교수가 되고자 하는 자, 기꺼이 조직의 정치에 몸을 굽히는 자, 강간하는 자.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이에 뭐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너 피해의식 있어.’ 교수 이강현 앞에서 늘 주눅이 들어 최선으로 충성한 뒤에 이런 말을 듣는다. ‘너도 원한 거잖아. 원해서 해놓고 왜 이래.’ 



단아는 편지를 쓰고, 유리는 일기를 쓴다. 수진은 책을 읽고, 미영은 대자보를 쓴다. 그리고 진아는 수사를 한다. 그들의 '자기만의 방식'은 잊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말하고 쓰고 알리는 것들이다. 그런 뒤에야 우리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간을 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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