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하철입니다
김효은 글.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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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알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책,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책, 바쁜 현대인에게 휴식을 권하는 책, 그런 책이려니 짐작했다. 한편으로는 어린이들에게 '지하철 이야기'가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의심도 했고, 그렇다면 어른을 위한 책인가 보다 지레짐작을 했다. 책을 (여러 번) 읽고 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나의 짐작은 어느 정도만 맞았다. 주제도 내용도 어쩌면 새롭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책이 주는 감동은 당황스러울 만큼 훌쩍, 예상을 뛰어넘었다. 어른을 위한 책 아닐까 했던 짐작은 절반만 맞았다. 어른도 어린이도 읽을 수 있는, 읽게 될 책이다. 우리나라 그림책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반갑고 고맙다.


먼저 그림이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것은 단순히 색감이 좋다, 구도가 대담하다, 색다른 시도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에 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앉고 선 자세가 개성 있고, 땀냄새가 날 듯한 셔츠며 주름진 얼굴들이 솔직하게 그려졌다. 작가는 얼마나 오래 관찰하고 얼마나 많이 그려봤을까. 사실 작가의 성실함이 언제나 아름다운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니다. 그림책에서는 심지어 그 성실함이 독자에게 부담을 안길 때도 종종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어쩌면 이 그림의 가장 큰 미덕은 작가가 자신의 공을 어떻게든 숨겼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숨겼을까. 그런 게 솜씨라는 걸까.


지하철 안의 풍경과 새로 지하철을 탄 사람의 사연을 그린 장면이 반복되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지하철 문을 반쯤만 열어서 이번엔 누가 탈까 기대하게 하는 점도 재미있고, 승객은 회사원, 해녀, 구두수선공,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워서 그 사연도 제각각이다. 그렇게 지하철과 세상이 연결된다. 이 그림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속표지도 등장하기 전 지하철이 땅속을 달리는 그림이다. (이 책은 속표지 앞에 면지를 제외하고도 무려 네 장면을 넣었다. 구성도 대범하다.) 땅속을 달리는 지하철을 옆에서 본 것인데, 나는 이 그림을 보고서야 그동안 한번도 지하철을 이런 각도로 떠올려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을 뚫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달려가는 지하철이라니. 이어지는 속표지의 제목 '나는 지하철입니다'와 연결되어 시작부터 뭉클한 기분이 든다. 물론 압권은 (스포일러가 될까 봐 말할 수 없지만) 독자가 드디어 지하철에 탄 사람 하나 하나의 얼굴을 헤아리게 되는 그 장면이다.


지하철에 타는 승객들에게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듯 익숙한 주제다. 그런데 작가의 글이 담담하고 그림이 모든 것을 말해주어서 오히려 독자는 마치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집중하게 된다. 두 아이의 엄마인 유선이가 자신의 엄마에겐 막내딸이라는 것도, 거침없이 말하는 듯한 이동 상인 구공철 씨가 다음 칸으로 넘어갈 때 "벌게진 뒷목을 스윽" 쓸어내리는 것도, 일자리를 찾는 듯한 청년이 쓸쓸하게 생각을 되뇌이는 것도 모두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맞다. 그림책에서 뻔한 교훈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이 메시지는 따뜻하고 깊은 데다 분명하다. 글이 같은 결을 유지하도록, 작가와 편집자가 같이 손으로, 여러 번 손으로 다듬었을 것 같다.


요 몇 년 간 창작 그림책이 종종 '세계 시장'을 의식하고 만들어지면서 우리 어린이의 생활과 멀어지는 듯해 서운했는데 이 책이 그런 마음도 풀어주었다. 일하는 어른들, 때로 지치는 어른들, 그래도 열심히 사는 어른들의 생활을 보게 하는 점에서 어린이가 보면 좋겠다. 당신이 그렇게 살고 있는 어른들이라면 이 책은 바로 그런 당신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또 잘 만들어졌다. 표지의 오톨도톨한 종이와 지하철 노선도를 연상시키는 재미있는 작가 이름 글자도 본문의 그림과 구별되면서 또 잘 어울린다. 특히 놀란 것은 본문 디자인이 보여준 자제력이다. ('절제된 디자인' 정도로는 표현이 부족할 것 같다.) 이야기의 화자는 지하철과 승객들로 구분되는데(지하철도 '나는' 하고 승객도 '나는' 하는 셈) 놀랍게도 디자이너는 서체를 구분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톤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도 책을 읽으면서 이게 지하철의 얘기인지 승객의 얘기인지 헷갈리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글자의 색이 조금, 아주 조금씩 다르다. 지하철의 이야기는 늘 검은색이고, 승객의 말은 그 페이지의 주조색에 따라 회색이나 남색 등으로 바뀌는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이렇게 세심하게 설계된 디자인 덕분에 독자인 내가 한 권의 예술품을 갖게 되었다.


덧붙여 '초판 한정'이라는 스토리북 얘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그림책의 부록 책자는 작품 해설인데 이것은 말 그대로 '스토리북'이다. 자세히 얘기하지 못한 승객들의 사연을 차근차근 풀어낸 책. 그것조차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도록 디자인되었다. 여기서 커팅은 꼭 지하철 창문을 닮았다. 가만, 부록에 커팅이라니 이거 제작이 까다로울 텐데. 혹시 그래서 초판 한정일까,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앞장 서서 칭송하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 (작가 및 출판사와 아무 관계 없음.) 그러니 혹시라도 나의 글 때문에 이 책을 사시는 분은 초판 한정 스토리북을 챙기시면서 이 네꼬의 공을 알아주십사 당부 드린다. 나는 이 책의 작가와 편집자, 디자이너와 제작부, (온라인에서는 스토리북의 장점이 잘 안 보이는데도 애써 홍보하고 있을) 마케팅 담당자들처럼 겸손하지 않으므로, 나는 꼭 공치사를 해야겠다.


올해가 두 달이나 남았지만,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책이 나의 올해의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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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4 1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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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1 2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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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1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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