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완주나 국토대장정 같은 큰일을 해낸 적이 없는 탓이겠지만, 나에겐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일이 대체로 아주 사소한 일들이다. 처음으로 형광등을 내 손으로 갈았을 때, 책상을 옮기면서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컴퓨터의 모든 선을 제대로 연결했을 때(짜릿!), 오이냉국에 간장의 양을 정확히 맞추었을 때, 동거녀들이 열지 못한 주스 병 뚜껑을 열었을 때, 술을 잔뜩 마신 다음 날 아침, 헤어진 남자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등이 그렇다. (내가 겸손하니 망정이지 사실은 굉장히 많은데 적당히 적어본 거다.)

다음 주면 회사에서 자리 이동이 있다. 쌓여 있는 책들을 옮길 생각을 하니 새 부서원들 보기가 민망해서 일주일 동안 매일 조금씩 집에 가져오기로 마음먹고 일요일 내내 방을 치웠다. 그런데 아무리 치워도 어찌 된 영문인지 방은 더 어질러지기만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세상에 고양이 한 마리 사는데 웬 짐이 이렇게 많담!)에 둘러싸여 망연자실 서 있노라니 청소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책장이 모자라다는 것! 약 20분간 고민한 끝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책장을 사러 나섰다. 마침 집 근처에 가구 공장이 모여 있는 동네가 있어 전에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내가 사려는 것처럼 조그만 책장을 파는 곳을 찾지 못해 포기했더랬다.


하지만 이번엔 나름 비장. 정 안 되면 이 길로 내처 홍대 앞 가구거리에 가서라도 사 오리, 그런 각오로 재도전한 것이다. 처음 두 군데 가게에서는 “그렇게 작은 책장은 이 동네에 없어요. 그런 건 그냥 동네 시장에서 사시죠” 라는 퉁명스러운 대꾸가 다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네꼬 씨가 아니다. (물론 이번엔 작정해서 그렇고, 평소엔 매우 쉽게 포기한다.) 세 번째 가게에서 드디어 마음에 맞는 책장을 발견! 책장이라고는 하지만 너비 40 높이 120의 사단 책꽂이 두 개, 이단 책꽂이 한 개다. 호기롭게 값을 치르고 뒷좌석과 트렁크에 실린 책꽂이를 보고서야 퍼뜩 드는 걱정. 이걸 어떻게 옮기지!


지하 주차장에서 3층 네꼬 씨 집까지 계단 하나에 "이놈의 계단!" 한 번, 계단 하나에 “다 왔어!” 한 번, 계단 하나에 “미쳤어!” 한 번을 번갈아 외치면서, 세 차례에 걸쳐 책꽂이 운반 완료! 세 번째 책장을 옮긴 뒤에는 맥주 한 캔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다. 그래도 성공은 성공이다!


새 책장에 책들을 다 꽂고 방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방에서 나가 문을 닫았다.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열어 보니 정돈된 책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다시 문을 닫는다. (외출했다 들어오는 상황 시뮬레이션 후) 방문을 열어보니 깜짝 놀랄 만큼 깨끗한 책장! 다시 문을 닫는다. (손님이 오셔서 “아 여기가 네꼬 씨가 쓰는 방?” 하는 상황 시뮬레이션 후) 방문을 연다! 보란 듯이 깨끗한 방! 다시 문을 닫는다. (이번엔 TV 보다가 ‘들어가서 책 읽어야지’ 하고 들어오는 상황 시뮬레이션) 문을 연다. 독서 분위기 쵝오!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 만큼 기분이 좋다! 으하하하하하. 세상에 나만큼 유능한 고양이가 또 있을까? 응? 아무리 공정하게 따져봐도 역시 내가 제일인 것같다. 완전 으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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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30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30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8-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오늘 대박 사랑스러움이에요! 인증샷은 어디 있나요. 책장 구경하고파요^^
정말 와락 안아주고 싶어요(>_<)

네꼬 2007-08-30 08:21   좋아요 0 | URL
안아주세요! 안아주세요! =3=3=3 (달려드는 거예요.) 인증샷은 다음달에 올릴게요. 으어어어엉. 나 울면서 말할 사연이 있어요. ㅠㅠ ♡

마노아 2007-08-31 02:40   좋아요 0 | URL
아니 왜요! 어여 이리와요. 내 품에서 울어요. 내가 보듬어 줄게요!!

네꼬 2007-08-31 09:10   좋아요 0 | URL
정말로 마노아님이 이러시면 울컥한다니까. >_<

2007-08-31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31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31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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