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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데리다는 조심스럽게 사유하였다.
책들의 홍수 속에서 그리고 내가 곧 진리요 길이다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회오리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정신 차리고 살아가는 방법을 데리다에게서 새삼 배웠다. 데리다는 니체를 읽을 때 맹목적으로 빠져들지 않았다. 그리고 섣불리 판단하고 옳다 그르다 결론짓지 않았다. 빠짐없이 읽고 오랜 시간 동안 읽고 열심히 읽고 끊임없이 파헤치며 읽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읽고, 니체의 말로 니체의 모순을 발견하고 니체를 해체시켰다. 니체뿐만 아니라 하이데거, 마르크스, 프로이드 따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면 앞 다투어 갑론을박하는 요즘과 사뭇 달랐다. (물론 데리다의 사유가 무르익은 뒤에는 용감하게 갑론을박을 시작했다.)


데리다는 치열하게 꿈꾸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은 데리다 훨씬 전부터 회자되었던 말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생겨난 후 변화하다가 결국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 속에 현재로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의식 속에 현재,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를 꿈꾸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존재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니체와 하이데거에 이은 데리다의 사유다. 다만 데리다는 절대적인 존재의 도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했다. 이것은 니체와 하이데거에서 벗어난 데리다의 사유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오리라고 희망한다는 것은 오리혀 절망이겠지만,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올 때까지 치열하게 행동하게끔 하는 채찍질이지 않을까 싶다.


데리다는 죽어서 세상에 이름을 남겼고 나에게 “눈멂”을 남겼다.
데리다는 2004년에 죽었다. 그러나 <데리다 평전> 속에 나오는 수많은 저서들, 수많은 철학자들, 수많은 개념과 정의들은 앞으로도 인류가 살아 있는 한 계속 반복될 것이며, 그 수많은 것들 속에서 유독 나에게 반짝였던 데리다의 “눈멂”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 반복될 것이다. “타자는 볼 테지만 나는 볼 수 없는 것, 나 자신에 대해 놓치는 것을, 타자에서 본다. 이 눈멂은 개인들에게 자신보다 더 큰 공동체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눈은 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울고 눈물 흘리기 위한 것이다. 나를 나 자신에 대해 눈멀게 하는 그 눈물은 타자에로의 시선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데리다가 과거의 사람들을 사유하고 절대적인 존재의 도래를 꿈꾸었던 것처럼 나는 데리다를 사유하고 얻은 공동체를 위한 눈물 흘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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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7-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좋아 님, 소설 분야 신간 평가단 아니셨어요?^^

전 인문은...특히 데리다 따위(?)는 마냥 어려웠었는데,
머리에 쏙 정리되는 멋진 리뷰예요~^^

차좋아 2011-07-20 00:47   좋아요 0 | URL
멋진 리뷰라니... ㅎㅎㅎ 읽느라 정리하느라 고생 좀 한 책이었는데 진짜 고마운걸요^^
데리다 따위(!) 다시 안 읽을 거예요.ㅋㅋㅋㅋ

인문 분야 평가단이지만 저는 소설이 훨씬 좋아요^^

동우 2011-07-2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향편님의 절창입니다.
"데리다는 죽어서 세상에 이름을 남겼고 나에게 눈멂을 남겼다."

향편님.
우리, 사조에 현혹되지 말고 지식에 압도되지 맙시다.
세상 책들 구름처럼 읽읍시다.
조르바스럽게 삽시다그려.

새로이 접하는 것들 모두 조르바스럽게 감탄으로 맞으면 되지요. ㅎㅎㅎ

차좋아 2011-07-24 00:28   좋아요 0 | URL
조르바 읽으며 동우님 생각을 했었어요. 동우님이 조르바라면 제가 그 친구(카잔차키스)라도 될테니 말이죠.
부산에서의 조우, 해변, 한밤의 흥청거림. ㅎㅎㅎ 크레타의 바닷가만 할지 못 할지 그건 모르지만 그날 광한리의 바닷내도 좋았습니다.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