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 - 다시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옛이야기
이강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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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후이거나 가을 어름에 서 있는 모든 이들과 이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머리말 中에서)


이 책의 표지에는 "다시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옛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파를 견디며 주변을 돌보느라 나를 잃고 살아온 그대여 / 옛이야기의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노닐다 보면 / 새로운 꿈들이 물결 따라 흘러와 그대를 일으켜 세우리"라는 싯구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언제인가 40-50대 주부들이 모인 세미나 장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상담학을 전공한 동료가 그날의 강사였는데, 강의가 끝날 무렵 참가자들에게 모두 눈을 감고 자신의 오른쪽 눈을 움직여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오른쪽 눈이 여기에 있구나" 깊이 느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강사는 시간을 두고 아주 천천히 코, 왼쪽 어깨, 배꼽 순으로 이동하며 평소에 잊고 지내던 자기 자신을 충분히 느껴보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는 일에 치이다 문.득. 갑자기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섬짓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나'를 느끼는 순간 '내가 누구지' 하는 낯선 공포가 찾아들 때가 있습니다.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오를 때면, 저만치 멀어져버린 청춘을 깨닫고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내 모습이 서러울 때가 있습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는 "세파를 견디며 주변을 돌보느라 나를 잃고 살아온 그대"를 초청하는 책입니다. "옛이야기의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잠시 노닐자"고 손짓합니다. 그리하면 "새로운 꿈들이 물결 따라 흘러와 그대를 일으켜 세우리"라는 따뜻한 약속을 건넵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는 현자의 지혜문학처럼 읽히는 글입니다. 저자는 '옛이야기' 속에서 삶의 지혜, 삶의 해학, 삶의 성숙을 길어올립니다. '별주부전'이나 '선녀와 나뭇꾼' 같이 익히 아는 옛이야기도 있고, 숨은 옛이야기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가진 특별함은 '옛이야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고 풀어내는 '해석의 힘'에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메시지를 가진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새로운 관점은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고, 생각의 전환은 같은 인생인데도 그것에서 전혀 다른 가치,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내줍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으며 내 안에 가득 차오르는 깨달음은 '안달하며 살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조급함을 버리면, 안달할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실패한다는 것은 그만큼 경험이 축적되는 일이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안목도 높아지는 일입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지만 살아서 영웅이 될 수도 있습니다(26). 저도 이제 꽤 살긴 살았나 봅니다. 어릴 때는 머리로 암기했던 '새옹지마'의 교훈이 이제는 가슴으로 끄덕여지니 말입니다.
 

"행운은 오래된 것들을 따라 자연스레 흘러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나의 오래된 것들, 오래되어 함께한 것들, 함께해서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은 나의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된다"(42-43).

지혜는 얻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는 뜻인가 봅니다. <허망한 꼴, 우스운 꼴>이라는 이야기에 보면(69-72), 지혜로운 메추리가 등장합니다. 옛날, 여우가 길을 가다가 메추리를 만났습니다. 메추리는 자신을 살려준다면 배가 터지게 먹게 해주겠다고 여우에게 약속을 합니다. 그때 마침 광주리에 들밥을 이고 가는 촌 아낙을 만납니다. 메추리는 그 아낙 앞에서 폴짝 뛰었습니다. 아낙은 메추리를 잡으려고 들밥을 내려놓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습니다. 헛고생을 한 아낙이 다시 광주리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여우가 들밥을 배불리 먹고 난 뒤였습니다. 이것이 '허망한 꼴'입니다. 이번엔 메추리가 '우스운 꼴'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길가에 옹기장수 형제가 옹기 짐을 나란히 지고 걷고 있었습니다. 메추리는 앞서 걷던 형의 옹기 짐 위로 뛰어올랐고, 동생은 그것을 보고 작대기를 들어 메추리를 내리쳤습니다. 순간 메추리는 날아가고 옹기만 박살라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이든 일단 제 것이 되면 그것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의 메추리 때문에 들밥을 내던지고, 옹기를 깨버린 것처럼, 우리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좇느라 정작 내게 있는 것의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그것의 소중함은 잃은 뒤에야 깨닫게 된다는 것에 인생의 슬픔이 있고, 비극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좇아가려고 하는 것말고, 이미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전에게는 감사하지 못했던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되는 걸 보니, 이제 제법 '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가 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여유'를 갖게 된다는 뜻인가 봅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다 보니, 불안한 상황에서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급함이 덜어지고, 난처한 상황에서도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내공이 생기는 듯 합니다. 특별히 옛이야기에 담긴 혜안과 묘수가 나를 웃게 합니다. 시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내에게 "아버지를 내다 팔자"고 속여서 "값을 높게 받으려면 무엇보다 몸이 좋아야 하니 좋은 음식으로 매 끼니 잘 차려 드리고 맘 편히 해드리자"는 어느 남편의 꾀처럼(123-127), 혜안과 묘수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빚어지나 봅니다.

<도사 위에 사냥꾼> 이야기에서(53-58) 저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던지고 새롭게 거듭나는 것에 있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 합니다. 이제 나는 쇠하는 일만 남았나 싶어 우울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 책이 내게 위로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누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해도 나는 거절할 것 같습니다. 이제 앞으로 걸어야 할 날을 더 많이 생각하겠습니다. 물결과 같이 흘러, 이제껏 건너온 강물을 마저 다 건너려고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으며, 차분하게 생각을 다지고, 인생을 다지고, 걸어온 길과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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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이롱이 중국어 첫걸음
조일신 지음 / 제이플러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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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이롱이(容易) 중국어 회화 입문서!

 
이 교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입니다. 오래 전, 사업 때문에 잠시 중국에 머무신 뒤로 아버지는 중국어 공부에 늘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TV를 볼 때도, 우리가 미드를 즐겨 보듯이 중화TV를 즐겨 보십니다. 요즘은 환갑을 넘어 새로 시작한 학업과 관련하여 중국을 여행할 기회가 잦아지면서 더욱 중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계십니다. 특별히 전문가 수준 이상의 한문 실력이 큰 도움이 되어 일반적인 속도보다 빨리 중국어를 익히시는 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실수록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주먹구구식 공부라고 생각을 하셔서 그런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도약이 되지 않는다고 어려움을 토로하십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 학원을 다닐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회화 중심의 중국어 교재를 알아보고 있는데, 이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쁘신 아버지를 위해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학습이 가능하도록 MP3 CD가 있는 교재를 원했고, 또 듣는 것만으로는 어렵다고 하셔서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오디오북을 찾고 있었는데, 이 교재가 바로 그렇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일단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몇몇 중국어 교재들은 굉장히 딱딱하고 어려워 보였는데, 이 책은 올컬러 일러스트로 구성되어 편안하고 재밌어 보인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려워 보이는 한자가 가득한 중국어 교재보다 훨씬 접근이 쉬워 보이고, 삽화가 있어 있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혼자 공부해야 하는 아버지에게는 무엇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고 싶습니다. 

또한 기초적인 어법을 중심으로 기분 문형과 기초 회화 표현을 여러 각도에서 응용하고 반복할 수 있도록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아버지의 실력이라면 회화의 체계를 갖추면서, 정확하고 확실한 회화를 숙지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맨 처음 교재를 살펴보신 아버지는 무엇보다 '1분 스피치' 코너에 큰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긴 문장을 읽고 읽고 말할 수 있는 훈련을 따로 받아보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별책부록도 매우 알차게 꾸려져 있습니다. 간체자 소개와 함께 초급 과정에서 알아야 할 단어 128개를 정확한 필순에 따라 연습할 수 있도록 '간자체 쓰기' 연습장이 별도로 제공되고, 이외에도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단어 위크북'과 '미니 중한사전, '미니 오디오북', 'MP3 CD' 1개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환갑을 넘긴 연세에 어학 공부에 도전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그만큼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노력에 비해 성장이 더디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는 좋은 교재를 찾아드리는 것입니다. 독학으로 공부할 때에는 좋은 교재가 가장 좋은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롱이롱이 중국어 첫걸음>을 아버지께 선물해드리고 제 마음이 무척 뿌듯합니다. 교재를 끼고 다니시며 열공하시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재를 개발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교재와 함께 수고로이 흘리는 땀만큼 아버지의 중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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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T GRAMMAR : 말하기 위한 영문법 트레이닝 (교재 + CD 2장) AAT 시리즈
앤 쿡 지음, 지소철 옮김 / 윌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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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법을 들으며 공부하는 영어 '통합' 학습법!


일명 '공부의 신' 열풍으로 과목별 학습 노하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과목의 성격에 따라 그것을 정복하는 노하우는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영어만큼 많은 학습 노하우가 소개되는 과목은 없을 것입니다. 학습 노하우 열풍이 일반 과목으로 확장되기 전부터, 영어는 이미 학습 노하우 열풍의 주인공이었으니까요. 영어사전을 한 장씩 뜯어서 먹었다는 아버지 세대의 고전적인 노하우부터 문장을 통째로 암기하라, 한 가지 테이프만 마르고 닳도록 들어라, 큰소리로 낭독하라 등 날마다 새로운 버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영어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강사들 뿐만 아니라, 영어를 정복한 고수자들까지 영어를 정복한 저마다의 학습 비법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사람에게 통용된 학습 비법이 일반적으로 모두에게 동일한 효과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친구만 해도 영문법 책을 통째로 달달 암기하는 것으로 영어 정복의 첫 걸음을 뗀 경우도 있고, 하루에 몇 개씩 영단어를 줄기차게 암기하는 것으로 영어 정복의 꿈을 실현한 경우도 있고, 꾸준하게 영작문을 연습하는 것으로 영어 고수가 된 경우도 있고, 영어 성경을 필사하는 것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 경우도 있고, 미드를 즐겨보며 듣기가 트이니 영어의 문이 열렸다는 친구도 있습니다. 영어 공부 비법도 자기에게 맞는 옷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별로 각각의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나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영역과 노하우를 찾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어떤 과목이든 "한 권으로 끝내는" 참고서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여러 가지 참고서를 많이 보는 것보다, 통합적인 한 권을 여러 번 반복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해왔고, 그것으로 어느 정도 효과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영어에 대해서만큼은 한 가지 노하우만으로 영어의 전 영역을 정복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는 생각을 가져왔습니다. 원서를 읽고 해석하는 데 더 집중해야 할 공부법과 영어를 듣고 말하는 회화 중심의 공부법을 별개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하기 위한 영문법 트레이닝(AAT)>이라는 이 교재는 그런 고정관점을 깨뜨려주었습니다.

이 책의 일차 목표는 영문법 정복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영문법을 마스터하기 위해 '듣기 학습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영어 문장을 귀로 들으면서 문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지은이 앤쿡은 미국식 영어 액센트를 단기간에 쉽게 익히는 방법론을 제시한 <AAT : American Accent Training>로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은, 세계가 공인하는 영어 학습법 개발자라고 합니다. 앤쿡이 이번에 발간한 <AAT GRAMMAR>는 AAT식 문법 학습서입니다. 앤쿡은 이 책을 통해 영어 문법과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통합한 학습법을 개발해내었습니다. 문법의 틀 안에서 말하기, 듣기 위주로 영어를 깨칠 수 있도록 고안된 '통합식' 학습이 이 책의 노하우인 것입니다. 이 책을 공부할 때는 교재를 먼저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CD를 활용해야 합니다. 교재와 함께 CD를 활용하려면 CD로 들어야 할 내용을 끊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재의 중간 중간에 부분적으로 표시되어 있는 'CD 듣기'에 형광펜으로 색칠을 해놓고, 동시에 포스트-잍도 붙여 놓았습니다. 처음엔 교재를 따라가며 해당되는 부분의 CD 내용을 듣고, 나중엔 CD 부분만 모아서 들으며 연습하는 방식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매일 아침 1시간만 영어를 공부하는 데 투자를 해보려고 작심했기 때문입니다. 문법과 듣기는 물론 영작까지 통합적으로 공부할 수 이 교재를 중심으로 적어도 두 달 정도 집중적인 훈련을 해보려 합니다. 영어를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읽고, 듣고, 쓰고 말하는 어느 한 분야를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실력의 저에게는 딱 맞는 교재, 꼭 필요한 교재라는 확신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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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신발 - 아버지, 그 진달래꽃 같은 그리움
박원석 지음 / 소금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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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남겨주신 한 아버지의 크고 높은 유산!


학교 다닐 때, 예제를 미리 내주고 시험을 보는 과목들이 있었습니다. 미리 시험 문제를 가르쳐주면 누구나 쉽게 만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예상 문제에 대한 답변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험을 보게 되면,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는데도 시험 문제를 받아드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그제서야 미리 공부해 두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살아계실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부지런히 효를 다해야 한다는 것은 인생에게 주어진 예상문제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사무쳐 오는 것은 바로 어버이가 떠난 다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은, 이별의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이별이 주는 가장 잔인한 고통은 바로 그 사람을 아프게 했던 기억과 그에게 잘못했던 기억들입니다. 그리움의 두레박은 잘해준 기억은 모두 걸러내고, 오직 못해준 기억만 길어냅니다. 그리하여 그리움이 더할수록 가슴을 짓이기는 후회가 가슴에 또다른 피멍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발 용서한다고 한 번만 말씀해주세요"(69).


그러나 부모님과의 이별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효를 다하지 않으면 사뭇치게 후회하리라는 것, 이미 주어진 문제이지만 그것에 대비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신발>은 아버지를 떠난 보낸 아들이 피멍으로 써내려간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방송작가이기도 한 아들이 처음엔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발표한 아버지 이야기를, 재출간한 것입니다. 처음엔 '아버지', '어머니', '친청 어머니'를 코드로 한 체류성 작품이 유행처럼 발간되고 있어, 눈물샘을 자극하는 책이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책이 아니라, 눈물로 쓴 책이고, 이 책을 읽고난 제 가슴에는 '존경'이라는 두 글자가 깊고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참으로 훌륭하게 한 생을 살다가신 참 교육자 한 분을 우리 곁에 남겨 주었습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어린 자식이 콧물을 흘리기라도 하면 코밑이 상한다며 종이나 걸레로 닦지 않으시고, 당신 입으로 빠셨다고 합니다. 이웃들은 입으로 빤 콧물조차도 뱉기가 아깝다며 그것을 삼키신 아버지의 별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18). 아들은 이러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베풀어주신, 그 밑도 끝도 없었던 사랑이 얼마나 높고 넓고 큰 것이었는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생선뼈를 죽처럼 씹어 입에 넣어주시고, 직접 양의 젖을 짜 억지로 마시게 하시고, 아직 어린 아들을 자전거에 태워 함께 출근을 하고, 몰래 들어와 방에서 자고 있으면 어떻게 아셨는지 아들 방에 군불을 지펴주시고, 곤히 자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시며 귀하디 귀한 내 아들이라 자랑스러워 하신 아버지. 저자는 쓸쓸한 노년을 보내는 아버지를 위해, 아이를 너무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일부러 자신의 첫 아들을 키워달라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맡기었습니다. 아들의 뜻을 헤아리셨는지 부모님은 손주를 맡아주셨고, 그 누구보다 지극 정성으로 길러주셨습니다. 지극정성으로 손주를 돌봐주신 할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손주의 양육일기까지 꼬박꼬박 남기었습니다. 

<아버지의 신발>은 저자의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한 아버지의 인생은 한 아들에게 깊은 그리움으로 기억될 한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할 교육자의 위대한 발자취이기도 합니다. 1971년 일간 신문에 "제2의 방정환"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릴 만큼 아이들에게 헌신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에서 일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헌신하신 선생님이셨습니다. 사실 높고 높은 부모님의 은혜도 은혜이지만, 이 책은 우리가 우러러 봐야 할 하늘 같은 '스승'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책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떻게, 얼마나 사랑했는지 일일이 다 옮겨적지도 못하겠습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스승이 열 명만 존재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믿습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은 있어도 올리사랑이라는 말은 없는 것처럼, 사랑은 아래로 흐르고, 자식은 아무리 효를 다해도 부모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책을 읽어보면, 저자야말로 누구보다 효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보낸 아들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깁니다. 그 '죄인'의 심정이 <아버지의 신발>이라는 책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신발>은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그리움이며, 값없이 받은 사랑에 대한 속죄입니다. 그 속죄가 우리에게 유산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것은 한 아버지가 삶으로 남겨준 유산이며, 우리 사회가 소중하게 보존하고 전해야 할 값진 사회적 유산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험하고 어려웠던 시절, 밥에 굶주리고 사랑에 굶주리고 배움에 굶주렸던 그 시절, 마음에 피가 흐르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뜨겁고 넘치는 사랑으로 제자의 허기를 채워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대가를 모르는 그 순박한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참된 '인간성'의 원형이라 믿습니다. 

당신이 모두의 흰고무신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정성스레 새겨주신 것처럼, 한 발 한 발 당신이 걸어가신 그 숭고한 발자취를 가슴에 깊이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당신이 삶으로 남겨주신 유산을 묻어두지 아니하고, 아래로 아래로 흘려보내겠습니다. 삶으로 가르쳐주신 그대로 조금이라도 닮아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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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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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부름을 따라 걷는 모든 이는 순례자다"(작가의 말 中에서).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소개하는 여행 서적이나 에세이를 많이 보았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이 책을 택했다. 서영은 작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상문학상을 통해 만난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나를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서영은, 역시 그녀였지만, 전혀 다른 그녀였다! 나는 아직도 어떨떨한 충격에 빠져 있다. 아름다운 산티아고를 목소리 높여 찬미하지도 않고, 뒤 이어 걸을 순례자를 위해 친절한 여행 가이드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고, 문학적인 내공이야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것이지만 미학적인 문장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다. 정직만 남았다. 마치 그녀의 알몸을 마주한 것처럼 거침없는 내면의 고백에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혼자 삭혀야 할 속마음을 어쩌시려고 이렇게 낱낱이 털어놓으신 것일까. 게다가, 순전히 개인적이고 신비한 종교적 색채까지.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듯 거침없이, 가감없이, 느끼고, 보고, 생각한 그대로 알몸을 드러내셨다. 

2008년 9월, 그녀의 나이 66세에 유언장까지 남겨놓고 길 위로 나섰다. 그리고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인생에서 두 번의 큰 위기를 ’걷기’로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는 그녀는 이번에도 ’걷기’를 선택했다. 

"그 순간 나는 작가로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너무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을 느꼈다. 삼사 때문에 밀쳐놓았던 원고를 다시 책상 위에 펼쳐놓으면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제 분명해졌다. 생활비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써 심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한 번이나 두 번으로 족했다. 그 이외의 것은 사양했어야 했다.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뿌리치지 못한, 내 안의 더 내밀한 속임수는 무엇이었을까?"(16) 

이것이 그녀를 길 위에 서게 했다. 누가 무어라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느꼈을 자기 환멸, 무력감. 나는 이 부분에서 마구 감정이입을 하고 말았다. 어느 날, 문득 정신차리고 돌아보니 내가 서있는 자리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성직자’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전혀 성스럽지 않은 나의 일상이 나를 옥죄이고 있다. 내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해주는 듯한 선생님의 고백이 반가웠지만, 그런 마음은 바로 접혔다. 서슴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안락한 집밖으로 나와, 낯선 길 위에 맨몸으로 선 서영은 선생님은 내게 해답이 아니라, 좌절이었다. 여전히 제자리를 뭉기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나는 이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서영은 선생님을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손위 제자와 함께 걸었다. 이미 그 길을 걸어보았던 제자가 동행을 자처한 것이다. 선생님은 그 동행을 ’치타’라고 부른다. 그 ’치타’가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 (사실 수제비 사랑이 뜨거운 그 작가가 궁금하여 산티아고 여행기를 냈으며, 서영은 선생님보다 손위인 저자를 찾아보다 포기하기도 했다.) 한 사람 말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갈등의 내막인데, 서영은 선생님은 이 동행과의 갈등을 순전히 자신의 시각에서 보고 느낀 대로 밑바닥까지 털어놓는다. 걷는 동안 그렇게 선생님의 속살이 풀어지고 풀어진다. 

"산티아고는 길이며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119).

서영은 선생님은 순례자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순례자가 되었다. ’걷기’라는 단순 행동을 통해 내면에 길을 내었고, 그 길로 이끄신 신과 교감했다. 노란 화살표 방향을 걸으며,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된 순례자는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순례자는 자신을 비워내고 있다. 전혀 새로운 것으로 다시 채우기 위함이다. 그것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는 당대의 권좌에 올라있는 대작가의 여행기라기보다, 한 순례자가 자기를 벗어던진 구도의 역사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독자에게 이것이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나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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