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 - 다시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옛이야기
이강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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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후이거나 가을 어름에 서 있는 모든 이들과 이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머리말 中에서)


이 책의 표지에는 "다시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옛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파를 견디며 주변을 돌보느라 나를 잃고 살아온 그대여 / 옛이야기의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노닐다 보면 / 새로운 꿈들이 물결 따라 흘러와 그대를 일으켜 세우리"라는 싯구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언제인가 40-50대 주부들이 모인 세미나 장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상담학을 전공한 동료가 그날의 강사였는데, 강의가 끝날 무렵 참가자들에게 모두 눈을 감고 자신의 오른쪽 눈을 움직여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오른쪽 눈이 여기에 있구나" 깊이 느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강사는 시간을 두고 아주 천천히 코, 왼쪽 어깨, 배꼽 순으로 이동하며 평소에 잊고 지내던 자기 자신을 충분히 느껴보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는 일에 치이다 문.득. 갑자기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섬짓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나'를 느끼는 순간 '내가 누구지' 하는 낯선 공포가 찾아들 때가 있습니다.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오를 때면, 저만치 멀어져버린 청춘을 깨닫고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내 모습이 서러울 때가 있습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는 "세파를 견디며 주변을 돌보느라 나를 잃고 살아온 그대"를 초청하는 책입니다. "옛이야기의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잠시 노닐자"고 손짓합니다. 그리하면 "새로운 꿈들이 물결 따라 흘러와 그대를 일으켜 세우리"라는 따뜻한 약속을 건넵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는 현자의 지혜문학처럼 읽히는 글입니다. 저자는 '옛이야기' 속에서 삶의 지혜, 삶의 해학, 삶의 성숙을 길어올립니다. '별주부전'이나 '선녀와 나뭇꾼' 같이 익히 아는 옛이야기도 있고, 숨은 옛이야기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가진 특별함은 '옛이야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고 풀어내는 '해석의 힘'에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메시지를 가진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새로운 관점은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고, 생각의 전환은 같은 인생인데도 그것에서 전혀 다른 가치,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내줍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으며 내 안에 가득 차오르는 깨달음은 '안달하며 살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조급함을 버리면, 안달할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실패한다는 것은 그만큼 경험이 축적되는 일이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안목도 높아지는 일입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지만 살아서 영웅이 될 수도 있습니다(26). 저도 이제 꽤 살긴 살았나 봅니다. 어릴 때는 머리로 암기했던 '새옹지마'의 교훈이 이제는 가슴으로 끄덕여지니 말입니다.
 

"행운은 오래된 것들을 따라 자연스레 흘러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나의 오래된 것들, 오래되어 함께한 것들, 함께해서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은 나의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된다"(42-43).

지혜는 얻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는 뜻인가 봅니다. <허망한 꼴, 우스운 꼴>이라는 이야기에 보면(69-72), 지혜로운 메추리가 등장합니다. 옛날, 여우가 길을 가다가 메추리를 만났습니다. 메추리는 자신을 살려준다면 배가 터지게 먹게 해주겠다고 여우에게 약속을 합니다. 그때 마침 광주리에 들밥을 이고 가는 촌 아낙을 만납니다. 메추리는 그 아낙 앞에서 폴짝 뛰었습니다. 아낙은 메추리를 잡으려고 들밥을 내려놓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습니다. 헛고생을 한 아낙이 다시 광주리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여우가 들밥을 배불리 먹고 난 뒤였습니다. 이것이 '허망한 꼴'입니다. 이번엔 메추리가 '우스운 꼴'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길가에 옹기장수 형제가 옹기 짐을 나란히 지고 걷고 있었습니다. 메추리는 앞서 걷던 형의 옹기 짐 위로 뛰어올랐고, 동생은 그것을 보고 작대기를 들어 메추리를 내리쳤습니다. 순간 메추리는 날아가고 옹기만 박살라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이든 일단 제 것이 되면 그것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의 메추리 때문에 들밥을 내던지고, 옹기를 깨버린 것처럼, 우리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좇느라 정작 내게 있는 것의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그것의 소중함은 잃은 뒤에야 깨닫게 된다는 것에 인생의 슬픔이 있고, 비극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좇아가려고 하는 것말고, 이미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전에게는 감사하지 못했던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되는 걸 보니, 이제 제법 '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가 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여유'를 갖게 된다는 뜻인가 봅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다 보니, 불안한 상황에서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급함이 덜어지고, 난처한 상황에서도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내공이 생기는 듯 합니다. 특별히 옛이야기에 담긴 혜안과 묘수가 나를 웃게 합니다. 시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내에게 "아버지를 내다 팔자"고 속여서 "값을 높게 받으려면 무엇보다 몸이 좋아야 하니 좋은 음식으로 매 끼니 잘 차려 드리고 맘 편히 해드리자"는 어느 남편의 꾀처럼(123-127), 혜안과 묘수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빚어지나 봅니다.

<도사 위에 사냥꾼> 이야기에서(53-58) 저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던지고 새롭게 거듭나는 것에 있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 합니다. 이제 나는 쇠하는 일만 남았나 싶어 우울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 책이 내게 위로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누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해도 나는 거절할 것 같습니다. 이제 앞으로 걸어야 할 날을 더 많이 생각하겠습니다. 물결과 같이 흘러, 이제껏 건너온 강물을 마저 다 건너려고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으며, 차분하게 생각을 다지고, 인생을 다지고, 걸어온 길과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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