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영혼의 부름을 따라 걷는 모든 이는 순례자다"(작가의 말 中에서).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소개하는 여행 서적이나 에세이를 많이 보았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이 책을 택했다. 서영은 작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상문학상을 통해 만난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나를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서영은, 역시 그녀였지만, 전혀 다른 그녀였다! 나는 아직도 어떨떨한 충격에 빠져 있다. 아름다운 산티아고를 목소리 높여 찬미하지도 않고, 뒤 이어 걸을 순례자를 위해 친절한 여행 가이드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고, 문학적인 내공이야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것이지만 미학적인 문장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다. 정직만 남았다. 마치 그녀의 알몸을 마주한 것처럼 거침없는 내면의 고백에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혼자 삭혀야 할 속마음을 어쩌시려고 이렇게 낱낱이 털어놓으신 것일까. 게다가, 순전히 개인적이고 신비한 종교적 색채까지.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듯 거침없이, 가감없이, 느끼고, 보고, 생각한 그대로 알몸을 드러내셨다. 

2008년 9월, 그녀의 나이 66세에 유언장까지 남겨놓고 길 위로 나섰다. 그리고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인생에서 두 번의 큰 위기를 ’걷기’로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는 그녀는 이번에도 ’걷기’를 선택했다. 

"그 순간 나는 작가로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너무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을 느꼈다. 삼사 때문에 밀쳐놓았던 원고를 다시 책상 위에 펼쳐놓으면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제 분명해졌다. 생활비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써 심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한 번이나 두 번으로 족했다. 그 이외의 것은 사양했어야 했다.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뿌리치지 못한, 내 안의 더 내밀한 속임수는 무엇이었을까?"(16) 

이것이 그녀를 길 위에 서게 했다. 누가 무어라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느꼈을 자기 환멸, 무력감. 나는 이 부분에서 마구 감정이입을 하고 말았다. 어느 날, 문득 정신차리고 돌아보니 내가 서있는 자리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성직자’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전혀 성스럽지 않은 나의 일상이 나를 옥죄이고 있다. 내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해주는 듯한 선생님의 고백이 반가웠지만, 그런 마음은 바로 접혔다. 서슴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안락한 집밖으로 나와, 낯선 길 위에 맨몸으로 선 서영은 선생님은 내게 해답이 아니라, 좌절이었다. 여전히 제자리를 뭉기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나는 이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서영은 선생님을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손위 제자와 함께 걸었다. 이미 그 길을 걸어보았던 제자가 동행을 자처한 것이다. 선생님은 그 동행을 ’치타’라고 부른다. 그 ’치타’가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 (사실 수제비 사랑이 뜨거운 그 작가가 궁금하여 산티아고 여행기를 냈으며, 서영은 선생님보다 손위인 저자를 찾아보다 포기하기도 했다.) 한 사람 말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갈등의 내막인데, 서영은 선생님은 이 동행과의 갈등을 순전히 자신의 시각에서 보고 느낀 대로 밑바닥까지 털어놓는다. 걷는 동안 그렇게 선생님의 속살이 풀어지고 풀어진다. 

"산티아고는 길이며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119).

서영은 선생님은 순례자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순례자가 되었다. ’걷기’라는 단순 행동을 통해 내면에 길을 내었고, 그 길로 이끄신 신과 교감했다. 노란 화살표 방향을 걸으며,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된 순례자는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순례자는 자신을 비워내고 있다. 전혀 새로운 것으로 다시 채우기 위함이다. 그것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는 당대의 권좌에 올라있는 대작가의 여행기라기보다, 한 순례자가 자기를 벗어던진 구도의 역사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독자에게 이것이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나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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