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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로운 인연이 내게 새로움을 줄 수 있을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면
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142).
이토록 '솔직한' 산문집이라니. 그 솔직함에 놀라 '산문집'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다시 확인을 해봐야했습니다. 촌스러울 정도로 이 책이 픽션이냐 논픽션이냐에 집착했던 이유는 누군가의 은말한 연애를 관음증 환자처럼 몰래 훔쳐본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작가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보지 못할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또 무엇인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인디밴드에서 보컬'도' 맡고 있는 이석원 작가의 두 번째 산문집입니다. 산문집 특유의 자유로운 형식 속에서, 굳이 구분(?)을 하자면 40대 이혼남으로 살고 있는 작가가 참으로 우연하게 다가온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을 일기를 쓰듯 써내려갔습니다. '브릿지존스의 일기' 남성 버전같은, 그 남자의 일기입니다.
(지금) 모해요? 까지도 괜찮지.
시간이 되냐는 뜻일 수 있으니까.
그치만 (오늘) 모했어요? 로 넘어가면 곤란해.
친구 사이에 물어볼 말은 아니니까(181).
사랑은 그녀(그)와의 게임 같은 줄다리기일까요? 아니면 나홀로 싸워야 하는 내면의 전쟁일까요? 사소한 몸짓, 사소한 말 한마디도 중요한 의미를 품지 않은 것이 없고, 정답도 없는 그 의미를 해석하느라 홀로 씨름을 하며 날밤을 새는 것은, 그녀(그)도 내가 그녀(그)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는지 증거를 찾고 싶은 것일테지요. 더구나 분명히 선을 긋는 상대와 이미 그 선을 넘어가 버린 내 감정이 충돌하고 있을 때, 사랑은 아프고, 깔끔하게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아프니까 사랑이라는 것을 또 아프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작가는 "마음은 놔두고 몸만 기형적으로 친해지"(189)는, 사랑인지 아닌지 모를 모호한 관계 속으로 빨려들며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 이 모든 게 한 번 뿐이기 때문. / 사랑도 고통도 / 하늘도 꿈도 바람도"(192).
뭐해요?
언제 들어도 좋은 말(384).
작가가 말하는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뭐해요?"라는 그녀의 연락이었습니다. "뭐해요?"라는 단 세 단어 문자로 나를 떨리게 하는 사람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주책스럽게도 직업은 의사이며 성이 김씨인 그분과 잘 사귀고 있는지 작가에게 자꾸면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일.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세계가 넓길 바란다.
내가 들여다볼 곳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가끔은 세계가 전혀 없는 사람도 있더라.
그러니 상대의 입장에서 내가 품은 세계는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도 한 번쯤 생각을 해봐야 한다(84).
책을 읽는다는 것이 그것을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만남이라면, 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세계와 세계와 만나는 일이라면, 동갑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석원' 작가는 내게 아주 낯선 세계이기도 했습니다. 제법 밑줄까지 쳐가며 이 책을 읽었는데, "들여다볼 곳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기억될 것 같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신변잡기처럼 가볍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그의 문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며, 한 자 한 자 파내려가듯이 진심을 담아낸 생에 대한 그의 치열한 고민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되는 사람에게는 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그의 책에 등장할게 될지 모를 위험이 도사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