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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100쇄 기념 특별판 리커버)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데 왜 가장 깊은 고통의 상징인 오두막에서 만나자는 것일까?"(102)
2009년 펑펑 울며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7년 동안 키운 동생 같은 강아지를 잃었고, 동물병원의 실수로 감염이 되었다는 분노가 상실의 고통과 뒤섞였고, 고통스러워하는 강아지를 붙잡고 며칠을 눈물로 기도했지만 결국 응답되지 않은 기도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실망까지 더해져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버릴 것 같은 상태로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그 <오두막>이 전 세계를 강타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화 되었고, 이렇게 100쇄까지 인쇄되어 새로운 번역본으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오두막>은 "출판계에 기현상"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자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열다섯 부의 복사본에서 시작된 원고가 오로지 입소문만으로 "46개국에 출간되어 2천만 부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더 많은 책을 주문해서 주위에 나눠주는 일이 되풀이 된 결과라는데(440-441), 그 기현상에 저도 한몫 했음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바입니다. 저 역시 책을 읽고 더 많은 책을 주문해서 주위에 나눠주었고, 한동안 제 선물 목록 1호는 오직 이 책이었습니다.
"당신이 그 일을 벌어진 않았지만, 멈추게 하지도 않았죠"(205).
이 책에서 "오두막"은 "가장 깊은 고통의 상징"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 가장 깊은 고통의 상징, '거대한 슬픔'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그 고통의 한복판으로 초대하는 책입니다. 그 고통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계시고,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사랑과 용서와 치유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맥'에게 '오두막'은 사랑하는 막내 딸이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에게 유괴되어 잔혹하게 살해된 장소입니다. 바로 그곳으로 자신을 찾아오라는 '파파'(하나님)의 쪽지(초대)는 주인공의 가슴에 거대한 슬픔보다 더 크고 통렬한 고통과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셨죠? 왜 날 여기 부른 거죠? 하필이면 여기에서, 왜 여기에서 만나자는 거죠? 내 아이를 죽인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나요? 나마저 갖고 놀아야 했나요?"(123)
<오두막>은 인류의 DNA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의문에 답하는 책입니다. "신(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몽을 거둬가지 않으시는 걸까?" 하는 의문말입니다. 인생을 덮쳐오는 고통은 언제나 신에 대한 분노로 연결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분노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은 자신이 태초에 이 세상을 만들었으며, 자신은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했다고 하면서 왜 폭력에 희생되도록 두고 보시는가, 모든 악몽을 멈추게 할 힘이 있는데도 왜 두고 보시는가" 말입니다. 어쩌면 상실과 폭력의 고통보다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건, 바로 이 '원망', 신을 향한 정당한 원망일겁니다. 이 책의 주인공 맥이 그랬고,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정당화하지 않아요. 구원해요"(208).
<오두막>은 종교적인, 더 정확하게 말해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 책입니다. 그러나 종교를 증오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적 신앙의 역동을 이해해야 이 책이 전하는 감동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데, 그 감동은 바로 종교적인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과정 속에서 보다 생생하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오두막>을 읽고 많은 지인들에게 선물을 한 이유는, 읽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힘(독서치유)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사랑과 공의(심판)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하나님의 신비를 이처럼 아름답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고, 신학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두막>은 하나님을 "체구가 크고 빛이 나는 흑인 여성"으로, 성령님을 "체구가 자그마한 아시아계 여인"으로 예수님을 "중동사람 같은 외모에 작업복 같은 옷을 입고, 연장이 담긴 벨트에다 장갑까지 끼고 있는 남성"으로 설정하여, "서로에 대해 사랑을 품고 그로 인해 완전함을 얻는"(170) 관계 속의 하나님을 아주 매혹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사랑의 춤'으로 표현했던 신학적인 설명을 아름다운 문학으로 재탄생시킨 느낌입니다. 하나님을 심판하는 심판관의 자리에 앉아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떨쳐내고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과정이 압권입니다. 또한 초판을 읽었을 때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스토리뿐 아니라 문장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재번역의 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상상하거나 이해하는 것 이상의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어요. 나에 대한 믿음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안에서 좀 쉬도록 해요"(165).
<오두막>은 결국 치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작고 불완전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님 수준의 큰 그림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작은 신뢰가 있다면 전부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그 믿음 안에서 쉼을 얻을 수가 있다는 걸,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고통의 상징이 치유의 상징이 되는 역설적이고 신비로운 <오두막>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신앙교육을 통해 배우고 상상했던 하나님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랑과 자유와 용서와 평안이 고통 속에 서 계신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뜨겁게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받도록 창조되었어요. 그러니 당신이 사랑받지 않는 것처럼 산다면 그게 바로 당신 삶을 제한하는 거예요"(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