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우리 차 - 계절별로 즐기는 우리 꽃차와 약차
이연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차'(茶)라고 쓰고, '건강'이라고 읽는다,
마음까지 맑게 하는 우리 차 백과사전!

 
차(茶)는 내게 '여유로움'과 동의어이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곧 여유롭다는 표시이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여유가 있어야 즐길 수 있을 만큼 차는 내게 '번거로운' 것이기도 하다. 다도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차는 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티백(tea bag)으로 차를 마시기도 하지만, 어쩐지 짝퉁같고 괜히 반칙같은 느낌이 든다. 

얼마 전, 동료가 이웃에게 얻었다며 꽃잎을 동동 띄운 따끈한 차 한 잔을 건네주었다. 투명 유리잔에 우러난 꽃잎의 향과 빛깔이 은근하면서도 강렬했는데, 그것이 '목련꽃차'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목련꽃을 차로 마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에 관한 질환에 좋다며 봄에 꽃잎을 따서 말려둔 것을 나누어주었단다. "매연 많은 곳의 도심 목련꽃을 딴 거 아니야? 마셔도 돼?" 했더니, 살짝 눈을 흘긴다. 귀한 것을 주었는데도 못 알아보고 얄미운 말을 한다고 야단만 맞았다.

<사계절 우리 차>를 받아들고 제일 먼저 '목련꽃차'를 찾아보았는데, 동료에게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목련차에 대한 자료가 드물어 "우아하고 고고한 목련차를 마셔본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38), 그 귀한 목련차를 마셔보았으니 말이다. 꽃차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붉은 꽃을 피우는 자목련에는 독성이 있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하는가 보다. 책의 저자는 "차로 마실 때는 독성이 우러나지 않으니 염려 놓아도 된다"고 일러준다. 


  




<사계절 우리 차>는 우리 차에 대한 백과사전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차에 관한 이야기, 차로 즐기는 꽃(다른 재료도 있다)에 대한 정보, 차의 효능, 차를 만들고 즐기는 방법까지, 책을 만든 정성과 노력과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꼬박 10년하고도 두어 해 더" 걸린 원고와 사진이 책으로 나온 것이니, 다도의 정신으로 만든 책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사계절 우리 차> 덕분에 "흔히 접하는 것으로 유백색 꽃을 피우는 백목련은 중국이 고향이고, 제주도가 고향인 우리 목련이 순수 토종"이라는 것과, "우리 목련은 꽃 색이 하얗고 꽃잎도 아홉 장이다. 여섯 장인 백목련보다 세 장이 많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일본의 아이누족은 목련 껍질을 달여 차로 마신다는 기록이 있"고, "우리의 한의서에도, 진통과 소염, 두통, 치통에 도움이 되고 코와 관련된 각종 염증에도 특별히 효과가 있다"고 한다. "껍질에 있는 효능이 꽃이라고 없을 리 없다"는 대목이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한의원의 자문에 의하면 "목련차는 여자들의 자궁병에 좋다"고 하니 이제 목련꽃을 더 귀하게 대해야겠다. 동료는 말린 꽃잎을 뜨거운 물에 우려주었지만, <세계절 우리 차>는 생 꽃잎을 흐르는 물에 살짝 헹구고 꽃술을 뗀 다음 우려 먹으라고 권한다.

"근세 중국의 석학 임어당은 '차는 하늘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고 극찬을 했다. 물질문명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지금에도 차는 4대 장수식품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한결같은 찬사로 우리는 약초의 뿌리를 달여도 차라고 했고, 잎을 우려 마셔도 차라 하고, 꽃을 띄워 마셔도 차라 했다. 심지어 커피까지 가배차라 했다"(27).

<사계절 우리 차>는 제목 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제철의 향과 맛과 효능을 그대로 즐길 수 있도록 우리 꽃차와 약차를 소개하고 있다. "개나리꽃차, 목련꽃차, 생강나무꽃차, 진달래꽃차, 복사꽃차, 제비꽃차, 민들레꽃차, 벚꽃차, 매발톱꽃차, 도라지차, 솔잎차, 햇차, 뽕잎차, 모시차, 검은콩차" 봄에 즐길 수 있는 차만 이 정도이다. 꽃차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도라지차, 검은콩차, 청매실차, 수박차, 메밀차, 보리차, 포도차, 다시마차, 무차, 모과차, 석류차, 생강차"도 있다. 이런 꽃도 차로 마실 수 있구나 감탄스러운 것 중에는 무궁화꽃이 가장 신기하고, 수박 겉껍질을 깎아내고 흰 속만 남겨서 차로 끓여먹는 수박차가 눈에 띈다.

 

  



 

 

<사계절 우리 차>에서 보고 그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된 차가 있는데, 바로 "서민과 함께하는 영양차, 무차"이다. "가을에 나는 가을무를 두고 세간에서는 인삼이나 보약이라고 부른곤 한"단다(164). 그 효능을 보고 평소 무를 하찮게 대했던 나의 태도를 반성했다. 무는 "소화기능을 원활하게 하고", "공복에 마셔도 부담이 없고", "비타민B군과 비타민C 등의 영양소가 풍부하면서 만복감을 느낄 정도의 양을 먹어도 칼로리가 굉장히 적어 비만을 해소하는 데에 효과적인 식품"이며, "식이섬유와 수분이 풍부해 체내 노폐물의 배설을 촉진시키고 변비도 예방"하고, "기침과 천식에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 약이 없던 시절에는 무를 씹어 먹으면서 기침을 잠재우기도 했다"고 한다. 또 무는 재밌는 성질을 가졌는데, "원래 날것인 무는 소염작용을 해 몸을 차게 하지만 무에 열을 가해 조리하면 그 반대로 몸을 따뜻하게 한다. 예를 들면 생으로 먹는 무는 술 마신 다음날 취기로 인해 위에 열을 가지고 있는 경우, 염증을 막고 열을 식히는 작용을 한다. 반대로 어묵에 넣어 삶은 무는 몸을 덥혀준다." 그래서 "급성 타박상이나 염좌 등에는 무즙을 그대로 사용해 열을 식히고, 만성관절염 등에는 데운 무로 혈액순환을 촉진해 통증을 가라앉힌다. 때문에 무차는 여름내 땀이 빠져나와 차가워진 속을 달래주는 차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구하기도 쉽고 값도 저렴한 장점까지 있으니 정말 사랑받아 마땅한 무다.


 



만들기도 간편해서, 
1. 무를 길이 2cm, 폭 1cm 크기로 썰어 전자레인지에 돌려 바싹 말린다.
2. 말린 무를 방앗간에서 볶아 온다. 뻥튀기처럼 튀겨도 된다.
3. 찻주전자에 조각내어 튀긴 무 3개를 넣고 뜨거운 물 150ml를 부어 2분간 우려 마신다.


환절기 목 건강에 좋은 차(도라지차), 우울증을 치료하는 차(원추리꽃차), 신장염 치료 약재로도 쓰이는 차(아까시꽃차), 피로회복과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는 차(장미꽃차) 등 차를 마시는 습관은 그야말로 건강을 마시는 습관이다. 증세에 따라 마시면 좋은 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차의 효능만을 한 눈에 파악하도록 편집, 디자인을 해주었면 좋아겠다. <사계절 우리 차>는 "꽃차에 대한 자료가 빈약한 시절이어서 가까운 한의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꽃 박사에게 물어보고, <식물도감>, <동의보감> 등 고전들"을 스승 삼았으며, "만들어서 직접 마셔보고 그 느낌을 표현했다"고 한다. 저자는 "책에 실린 꽃차, 약차 대부분은 내 손으로 키운 꽃과 나무들로 인체실험을 마친 검증된 마실거리이니 안심해도 된다"고 일러준다.

<사계절 우리 차>를 마시려면 부지런해져야겠다. 귀찮은 생각도 들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건강을 지켜주는 이렇게 좋은 차가 지천에 널려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차보다는 커피에 익숙하고, 손내밀면 쉽게 잡히는 인공 쥬스가 더 가까이 있지만, 건강한 취미 하나 가져봐야겠다. 건강은 물론 일상까지 향긋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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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사회와 그 적들 - 좋은 시민들이 들려주는 우리 사회 이야기
김두식 외 지음 / 알렙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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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가올 2012년을 준비하라?

 
아는 동생이 5개월째 월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 등에 사연을 올려 집주인의 명예가 훼손(?)되면 법적으로 불리해진다고 하니 내용은 생략하지만)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동분서주하던 동생은 맞닥뜨린 현실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나라 법은 집주인 편이야!" 자신이 법을 더 잘 안다(?)고 말하는 그 집주인은 오히려 느긋하단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소시민의 생활에 파고드는 우리 사회의 불량지수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여당이 다시 정권을 잡자 부자들만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을 때, 내가 바로 그 부자에 속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말문이 막혔던 적이 있다. 소시민이 체감하는 사회의 불량지수는 정책이 아니라, '뇌구조'를 완전히 갈아엎어야 비로소 길이 좀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막막한 수준이다.

<불량 사회와 그 적들>은 불량 사회에 대항하는 지식인들의 '말'을 담은 책이다. (완전히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런 목소리를 '팔아' 먹고 사는 무리에 대한 불편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사회'를 위해 고민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과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는 지식인들의 '말'이 고맙다. <불량 사회와 그 적들>은 잘난 척이 아니라, 그 진정성이 느껴져서 더 고마웠다. (섣부른 환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외치고 싶다.)

<불량 사회와 그 적들>은 불량 사회에 맞서 개혁과 대안을 말하는 지식인들을 불량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며, 이 책에 목소리가 실린 열세 명의 인터뷰어들을 '좋은' 시민이라고 명명한다. 불량 사회의 적을 자처하는 '좋은' 시민이라는 것이다. "이들 열세 명의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 더 나아가 2012년이 한국 사회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약육강식의 '승자 독식 사회'로 갈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공동체에 기반을 둔 '복지 국가'로 갈 것인가?" 이것이 <불량 사회와 그 적들>이 다루는 주요 쟁점이면서, 골자이다. 핵심 키워드는 '복지'.

"좋은 사회가 뭔가요?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사회인가요? 아닙니다. 어떤 사회에서 한 명이 모든 걸 가지고 나머지가 거지처럼 살아도, 그 한 명이 엄청난 부를 소유한다면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는 부자 나라일 수 있습니다"(22, 장하준 교수님의 말).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복지를 설명하며, 무상 급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아이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가 입을 상처가 얼마나 클지"(26)까지 생각하는 장하준 교수님이 너무 든든하고 고마워 눈물까지 날 뻔했다. "돈 없는 애들한테 평생 갈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돈 있는 애들도 그냥 무상 급식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왜 못 알아듣나요?"(27). 정말 왜 못 알아 듣나요!!! "한국 사람들은 복지가 돈이 남아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하며, 우리가 가진 '복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이렇게 꼬집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복지' 하면 미국의 선별 복지만 떠올립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하듯이, 정말 굶어 죽을 것 같은 몇 사람에게 몇 푼 쥐어주는 식으로요. 무상 급식에 반대하는 이들한테도 바로 복지에 대한 이런 천박한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해요"(27). "천박한 인식"이라는 표현에서 솔직히 질끔했다. 내가 가진 복지에 대한 인식도 그 범주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불량 사회와 그 적들>을 읽고 나니, 먼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 입장부터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2012년 대선은 선별 복지(시장 복지) vs. 보편 복지 구도가 가장 큰 쟁점이 될 것이라고 <불량 사회와 그 적들>은 진단한다. 2012년이 한국 사회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는 책임있는 투표를 해야 한다. 단순히 수동적인 투표가 아니라,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 먼저 깨닫고, 뜻을 세우고, 행동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모든 국민이 '자신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모두 함께 잘 사는 좋은 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가 해야 할 첫째 행동은 "복지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아주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복지 국가가 만들어지려면 복지 세력이 있어야 하죠. 복지 국가를 원하는 시민과 복지 국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지키려는 정치 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복지 동맹을 형성하고 버틸 때, 복지 국가가 가능합니다"(185, 최태욱 교수님의 말). 우리가 옳다고 믿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금을 더 낼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도정일 상임대표는 "책 읽기를 매개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바꾸어낼 시민의 힘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불량 사회와 그 적들>이 내게는 그러한 책 읽기가 되어주었다. 이지아-서태지 사건의 폭로가 젊은 세대의 투표율을 낮추려는 정치권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루머에서도 배울 수 있듯이, 불량 사회를 고집하는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깨어있는 관심'이 아닐까 한다. <불량 사회와 그 적들>의 목소리는 곧 나와 너,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될 쟁점들이다. 함께 배우는 자세, 고민하는 자세, 참여하는 자세로 읽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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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넨이 있는 바느질 살롱 - 기분 좋은 내추럴 생활 소품 만들기 행복한 손놀이
김미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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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좋아하세요?


이 살롱에 초대받고 싶다,
일상이 행복해지는 시간!

 

옆동네까지 평정하며 돌아다니는 골목 대장이었던 내가 친구들을 경악시켰던 일대 사건이 있었다. 며칠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나를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나는 이모에게 뜨개질을 배우며 털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릴 때마다 한 올 한 올 서로 얽히며 늘어나는 모양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마치 새봄에 새싹이 흙을 뚫고 올라오는 모양을 보는 듯 신기하기만 했다.

학교 다닐 때도 배움의 하나로, 의무적으로 우리는 바늘과 실을 손에 잡았지만, 바느질을 배우고, 단추 달기를 배우고, 자수를 배우고, 뜨개질을 배우는 일이 나는 재밌기만 했다. 중학교 때는 수업시간 외에 절대 다른 시간에 바느질을 하지 말라는 담임선생님의 엄중한 경고가 있었는데도, 나는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책상 밑으로 몰래 바느질을 하고, 뜨개질을 하는 '간 큰 학생'이었다.

바느질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머릿속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오만 가지 생각을 잊을 수 있고, 털어버릴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는 문제들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쉴 수 있어 좋았다. 이런 것이 취미의 힘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 내게는 '바느질'이었다. '진학'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바느질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지만, 바느질은 언제나 삶의 작은 로망이었다. 그러다 직장엘 다니면서 또 '사고'를 친 적도 있다. 사무실 물품을 사러간 문구점에서, 간단한 십자수로 만들 수 있는 열쇠고리와 같은 소품이 내 눈에 뜨인 것이 화근이었다. 십자수를 배워본 적도 없는데 무작정 몇 개를 사들고 와서는 서슬퍼런 선배들이 득실거리는 사무실에서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너무 열중하는 모습이 신선했는지(?) 다행히 큰 야단은 안 맞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참 철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니 <리넨이 있는 바느질 살롱>과 같은 책이 보이면 내 눈이 반짝반짝한다. 실제로 직접 만들어보지 못한다고 해도 책을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리넨이 있는 바느질 살롱>은 마 소재의 리넨, 면 소재의 광목 등의 원단을 이용해 손바느질로 생활 소품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교본 같은 책이다. 따뜻하고 편안해 보이는 원단에 예쁜 모양의 단추, 레이스, 아플리케, 바이어스테이프, 수 등으로 멋을 낸 것이 아기자기 하면서도 독특하다. 책에서 보여주는 작품들을 보니 원단과 손바느질이 주는 부드러움과 포근함이 리넨 생활 용품의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리넨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생활 용품이 참 다양하기도 하다. 실용적인 것도 많지만 생활에 멋을 더하는 특별한(!) 아이템이 눈에 들어온다. 생활의 멋을 더하는 룸슈즈, 다용도 주머니, 필요에 따라 수면안대, 블랭킷, 나만의 특별한 방석, 보온물주머니커버, 다이어리커버, 북커버&책갈피, 생활의 격을 높이는 줄자 케이스, 가위집, 소잉파우치, 바네파우치, 통장지갑, 카드지갑 등 앙증맞은 작품들이 참 특별해보인다. 이 밖에도 개성과 감각을 뽐낼 수 있는 부엌 소품 아이템들, 피크닉 용품, 패션 액세서리들과 함께 패턴 도안까지 실려 있어 직접 만들기에 도전해보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리넨이 있는 바느질 살롱>에서 직접 만들어보도록 추천하는 아이템들 대부분은 돈을 주면 간단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이지만, 나만의 개성과 정성을 담아 직접 만들었다는 '특별함'은 절대 살 수 없는 가치이다. 솜씨가 좀 있다면 특별한 선물로도 그만일 듯하다. 그러나 비록 솜씨가 좀 모자라더라도 한 땀 한 땀 장인의 정성(!)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명품이 아닐까.

지난 해, 원형탈모라는 무시무시한 병(!)을 앓게 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무서운 세력인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증세가 겉으로 들어나고 나니, 그제야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마음의 여유도 찾을 수 있는 '취미'를 하나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치열하게 성취해야 할 '일'이 아닌,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엄마와 함께 원단시장부터 한 번 나가봐야겠다. 안 하던 바느질을 하겠다고 나서면 엄마가 말릴 것 같기는 하지만, 엄마와 함께하는 원단시장 데이트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즐겁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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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사는 법
박완서.한말숙.김양식 외 지음, 숙란문인회 엮음 / 연암서가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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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양분하는 가장 일반적인 범주 중에 하나가 '남자'와 '여자'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러한 구분은 '차별'이 된다. 같은 문학, 같은 예술 활동인데도 여류 문학, 여류 작가, 여류 시인, 여류 화가라고 구분 짓는 것을 불편해하는 시각도 있다. '여류 문인들'의 글이라고 하면 확실히 차별적이기는 하다. 남성과 구분 짓는 차별이 아니라, 여성 특유의 감성에 있어서 경쟁력이라고 부를 만한 차별이 있다는 말이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숙명여고 출신의 여류 문인들이 모여 구성된 '숙란문인회'가 펴낸 여성 문인의 문집이다. 박완서 선생님을 비롯한 21명의 쟁쟁한 여성 문인들을 '숙명'이란 안에서 만나니, 숙명여고 동문들이라면 학교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뻐근해질 법도 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책 제목 <행복하게 사는 법>은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서 따온 듯한데, 각기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의 글이지만 22명의 작가가 두, 세 편씩 내놓은 글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이보다 적합한 제목은 없을 듯하다.

작품을 통해 만나는 작가와 그들의 삶을 통해 만나는 작가는 다르다. 여류 문인들의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행복하게 사는 법>은 작품보다 여류 문인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어준다. 각기 다른 맛과 향을 가졌지만 정갈한 '한 상'처럼, 대선배의 글과 후배의 글이 다른 맛과 향을 뽐내면서도 여성 특유의 감성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새벽부터 부지런 떠는 일 없이 마냥 자리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게 됩니다. 누워서 두서없이 하는 생각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이 아니라 주로 지난날의 추억이고, 그 중에도 현재의 나에서 가까운 지난날이 아니라 아주 먼 어린 날의 추억입니다"(박완서의 "행복하게 사는 법" 中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고백처럼 대선배님들은 가까운 이야기보다 오래 전 기억을 더듬어 정감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어머니 세대들, 불쑥 튀어나온 전쟁이 헝클어놓은 삶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그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어떤 사랑으로 '딸'을 보듬어 주셨는지도 들을 수 있다.

"늦게 난 딸애에다가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여서 집안일이며 나라 일도 앞이 보이지 않은 때", "인생사의 기복도 명암도 아랑곳없이 넓고 넓은 백사장에서 먹고는 자고, 먹고는 뛰어 놀기만 하는 개"에 빗대어, "평생 걱정 없이 먹고 놀기만 하는 '뱃놈의 개 팔자'처럼 되라"고, 예쁜 막내 딸을 볼 때마다 "뱃놈의 개올시다", '뱃놈의 개올시다"라고 따라 하라고 하셨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것이 딸을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였음을 지천명이 훨씬 넘고 나서 비로서 겨우 깨달은 딸의 고백이 뭉클하다(12-14, 한말숙, "아버지의 기도" 中에서).

"밤 열두시에 태어났는데 여아를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은 그때부터 밤새 머리를 맞대로 옥편을 찾아가며 지으신 이름이" 박완서이다. 그러고 보니 동시대 분들에 비해 '박완서'라는 이름은 유난히 품위가 있어 보인다. "새 생명을 좋은 이름으로 축복해 주려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두 남자, 점잖고 엄하기로 집안에서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상투 튼 할아버지와 젊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38, 박완서의 "행복하게 사는 법" 中에서)라는 박완서 선생님. '간난이', '섭섭이', 아무렇게나 지어진 이름으로 살았던, 그리하여 정성드려 지어주신 이름 하나에서도 부모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는 세대, 그 세대가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세대이다.


세월이 쌓이면서 얻어지는 지혜를 우리는 '연륜'이라고 한다. 연륜의 샘에서 길어올려진 성찰과 지혜는 깊은 장맛처럼 그윽하고, 섬세하고, 깊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여인들의 감성과 단상을 통해 책의 제목처럼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그 질긴 의문과 고민 속으로 잠겨들게 만든다.

"자연과 마주보는 일에는 안경이 필요 없지...... 먼 산. 지평선. 수평선. 은하수. 낮달. 밤하늘의 별과 달. 깊은 숲. (...) '현대인은 거의 평생을 20m 이내만 보며 살아간다'고 어느 안과의사가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매달려 살아가는 것들이 TV, PC, 계산기, 전자오락, 노래방 기계, 만화책 등이 아닌가. 아득한 곳, 먼데를 바라보는 기능이 없어져 버렸는가. (...) 현대인들도 영원을 입에 담기는 하면서도 영원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허덕거리다가 갑자기 죽는다"(79, 정연희의 "새와 꽃의 살림살이" 中에서).

"그러나 꽃은 저 혼자 피고 저 혼자 시든다. 그냥 저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누구의 열광과 찬사와 갈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저의 때를 따라 제 삶을 살 뿐이다. 새는 저의 지저귐이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는 것을 모른다. 꽃은 저의 자태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누구에게 들려줄 일이 없는 새소리는 그래서 영원과 이어지고, 누구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일이 없는 꽃은 그래서 황홀하다"(83, 정연희의 "새와 꽃의 살림살이" 中에서).


여고시절, 우리는 편지를 참 많이도 썼었다. 지금처럼 문자나 이메일이 없을 때이기도 했지만, 마음에 무엇인가 차오를 때마다, 텅 빈 가슴에 부는 찬 바람이 아릴 때마다, 끝도 없는 바닥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 때마다, 무리 속에 있어도 사막에 홀로 버려진 외로움을 떨쳐버리고 싶을 때마다, 편지를 쓰고 또 썼었다. 혼자 쓰는 일기보다 누군가 이 글을 읽어줄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위로를 받았었는지 모르겠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그때 그 시절의 그런 편지 같다. 엄마에게서 온 편지 같고,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같고, 친구가 보내준 편지 같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 소위 '성공한', '잘 나가는', '많이 배운', '잘난' 여성들이라 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삶의 열기가 있고, 따스한 마음으로 공감하게 되는 사랑과 그리움이 있고, 가슴에 쩍 금이가게 하는 삶의 성찰이 있고, 곁을 지켜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열렬하게 응원하고 싶은 도전도 있다. '여류 문인'이라는 구분이 (성적인 측면의) 차별도 될 수 있겠지만, '여류'만이 품어낼 수 있는 빛깔과 향기와 감성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차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 여고시절에도 우리를 괴롭혔던 과제인데, 아직까지 정답을 찾지 못한 기분이다. 그러나 방향키로 삼을 만한 열쇠를 하나 이 책에서 발견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아무도 그의 쓸모를 발견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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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모성애와 맞짱을 뜨자는 것일까?

 
친한 여자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겨본 경험이 있는가? 내가 했던 가장 쓰라진 경험은 죽기 살기로 나를 좇아다녔던 남자가 친한 친구와 사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이다(그들은 졸업 후에 결혼도 했다). 뺏앗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상대가 친구라는 것이 몹시도 씁쓸했다.

<도둑 신부>는 철저한 계산과 거짓으로 친구를 이용하고,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친구의 남자까지 가로채가는 '팜 파탈' 지니아를 축으로 그녀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상처입은 세 여성의 삶과 사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왜 나는 지니아를 보며 안젤리나 졸리를 떠올렸을까? 브래드피트와 제니퍼 애니스톤 커플의 사랑을 지켜보며 응원했던 내게는 안젤리나 졸리가 '나쁜 년'이다. 배우로서는 그녀를 좋아하지만, 내 감정은 지금도 제니퍼 애니스톤에게만 이입된다. <도둑 신부>를 영화화하며 내 맘대로 가상 캐스팅을 해본다면 지니아 역은 안젤리나 졸리이다.

광고만 보면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지니아'가 이야기의 중심일 거라 예상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그녀에게 상처입은 세 여성이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1권을 다 읽어가는 내내 지니아는 도대체 언제 본격적으로 등장할까 궁금해하며, 이제나 저제나 그녀의 등장을 기다려왔는데 끝까지 그녀는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핵이면서 동시에 주변부로 남는다. 오히려 <도둑 신부>는 세 명의 여성이 지니아에게 어떻게 '멍청하게' 당했는지에 초점을 둔다. 그 과정에서 그녀들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이 '오늘' 그녀들의 삶과 상처를 규정짓는 단초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긴 서사가 이어진다.

작고 외소하지만 잔혹한 전쟁에 관심이 깊은 냉철한 역사학자 토니, 점성술과 영적 에너지를 신봉하며 세상의 소용돌이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 듯한 캐리스, 당당하고 거침없는 시원시원한 사업가 로즈,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점심을 같이하는 절친이다. 같은 학교 동창이기는 하지만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듯한 개성 강한 이 세 여성이 친구가 된 것은 모두 '지니아' 때문이다. 지니아에게 철저히 이용당하며 종국엔 남자(사랑)까지 뺏앗긴 쓰라린 상처가 이 세 여성을 엮는 끈이다. 어느 날, 이미 죽어 장례식까지 마친 지니아가 그녀들 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그들의 사연을 재구성해나간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1권과 300페이지를 넘는 2권을 읽어나가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팜 파탈 지니아도, 그녀에게 멍청하게 당한 세 명의 여성도 아니라 엉뚱하게도 거침없는 저자의 입담(필담)이었다. 이외수 선생님이 쓰신 <글쓰기의 공중부양>이라는 책에 보면, 단어에는 생어와 사어가 있는데, 생어는 오감을 각성시킨다고 설명한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글에 신선감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장점을 가진 생어를 활용하라는 가르침이다. 예를 들면,
"그놈은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다",
라는 문장보다는,
"그놈은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다"는 문장을 구사하라는 것이다.
<도둑 신부>의 흡입력은 토니, 캐리스, 로즈라는 세 여성에 생명을 불어넣는, 거침없이 팔닥거리는 '생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생어가 캐릭터에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빠른 템포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든다.

이 거침 없는 필력으로 지니아가 아니라, 세 여성에게 중심을 두고 있는 저자의 타킷은 모성 안에 갇혀 가부장제에 눌려 있는 여성성(여성의 자아정체성)의 각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해방을 가져오는 가장 큰 계기는 전쟁이었다고 배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다. 토니는 전쟁을 연구하는 역사 학자이기도 하다. 또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모두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여성들은 모두 2개의 이름, 즉 2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토니의 다른 이름은 그녀의 이름을 거꾸로 읽은 '트몬레프 니토'이다. 캐리스의 다른 이름은 나약하고 상처입은 과거를 봉인해둔 '캐런'이다. 로즈의 다른 이름은 카톨릭과 유대인 사이의 경계에 선 '로절린드 그린월드'이다. 심지어 로즈의 쌍둥이 딸도 그녀들을 호칭하는 다른 이름이 있고, 캐리스의 딸도 캐리스가 지어준 '오거스타'라는 이름과 오거스타가 직접 바꾼 '오거스트'라는 이름이 있다. 왜 <도둑 신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2개의 이름, 즉 2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을까? 현재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지니아는 그녀들의 억압된 자아가 하나로 합쳐진 '괴물'일까?

토니와 캐서린, 로즈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다. 모두 남성을 모성애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토니는 외인부대 같은 웨스트를, 캐리스는 병역을 기피하고 도망 중인 빌리를, 로즈는 바람둥이 남편 미치를 엄마처럼 품어주고, 돌봐주며, 기꺼이 뒤치닥거리를 한다. 심지어 토니와 캐서린과 로즈는 서로에게도 엄마 같은 친구이다. 재밌는 것은 그녀들이 모성 안에서 자발적으로 남성들에게 소비되는 것은 '사랑'이지만, 지니아라는 여성에게 소비되는 것은 '상처'요 '고통'이 된다. 그녀들을 소비하는 남성들은 '사랑'이지만, 그녀들을 소비하는 지니아는 '악녀'인 것이다.

토니는 지니아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고도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웨스트 때문에 가슴 아파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1권, 316). 그녀는 지니아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상처투성이 웨스트를 자기보다 더 걱정한다. <도둑 신부>는 뿌리 깊은 모성의 환상에 제대로 맞짱을 뜨는 분위기이다. 지니아에 빠져드는 남자들, 지니아가 가진 치명적인 매력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는 자기를 돌보는 엄마가 아니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여자에게 마음이 간다는 것이다. 지니아의 수법은 한없는 모성애가 아니라, "결핍과 굶주림과 텅빈 동냥 그릇의 이미지"(2권, 152)이다. 미치가 무엇을 요구할 틈도 없이 미치에게 무엇이든 채워주었던 로즈의 뒤늦은 각성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는 베풂과 용서와 구원을 받기만 하는 데 질려 자기도 조금 베풀고 누군가를 구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무릎 꿇은 미녀보다 더 좋은 게 무릎 꿇고 고마워할 줄 아는 미녀였다"(2권, 153).

<도둑 신부>는 여기저기서 페미니즘적 관심을 드러내며,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면, 성공한 기업가로 여사장 노릇을 하는 로즈의 고백을 들어보자. "여사장 노릇은 골치 아프다. 여자들이 그녀를 상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여자들은 그녀를 자기와 똑같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언제쯤, 떨어져 나갈지 궁금해한다. (...) 그런 그들한테 커피라도 한 잔 얻어 마시려고 했다가는 이것 보세요,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죠라는 이런 반응이 나온다. (...) 내가 엄마 몸종인 줄 알아요? 그녀는 반항기로 접어들자마자 어머니한테 이렇게 대들곤 했다. 꼭 그 짝이다. 그랬던 여자들이 남자 상사한테는 군소리 없이 커피를 대령한다. (...) 이제는 여자가 여직원을 고용하면 친구처럼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1권, 166-177).


"지니아는 어디에 있건 항상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2권, 317).

어떤 측면에서 보면, 지니아는 캐리스와 로즈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데도 그녀들이 직접 처리하지 못하는 빌리와 미치를 치워준 셈이다. (저자가 웨스트만 다시 돌려준 것이 의미심장하다.) 각각 빌리와 마치와의 관계를 '객관화'해서 보지 못했던 캐리스와 로즈는 살아돌아온 지니아를 계기로 그 관계를 다시 반추하며 자기 자신과 삶을 찾아간다. <도둑 신부> 지니아가 각성시키고자 하는 대상은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진 남성이 아니라,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지니아 때문에 상처입는 그녀의 친구, 여성이다. 그 상처가 아무리 크고 아파도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들을 사로잡고 결국 그들의 삶을 파괴했던 '도둑 신부' 지니아는 악녀가 아니라, 모든 여성을 대신해 선봉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여장군일지 모른다. 여러 모양으로 다시 환생한 지니아는 지금도 어디에 있건 항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녀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 모두 그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도둑 신부> 지니아는 오늘도, 피를 빨리고 소비되고 있으면서도 모성의 환상으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여성의 집을 찾아, 그 문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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