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
김세윤 지음, 최승근 옮김 / 두란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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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임명받은 자라는 자기이해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127-128).

 

"예수, 그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오고 오는 세대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우리는 영원한 형벌에도, 영원한 구원에도 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지금까지 전하고 선포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정작 이 땅에 발 딪고 살았던, 예수, 그는 자신을 누구라고 인식했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신성)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를 신격화하고 종교화한 것은 초대 교회의 작품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던 그분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인식했을까요? 김세윤 박사님의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게 된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를 아무 의심 없이 전하면서도, 예수는 자기 이해를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김세윤 박사님의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은 논문을 쓰기 위한 사전 작업(?)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주게를 연구함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물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종합한 저자의 개요적인 논지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신학생일 때 이 책을 읽었을 때와 목회자로서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감회가 사뭇 다릅니다. 신학생일 때는 지적 논리를 따라가는 학문적 호기심이 많았다면, 목회자로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우리가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진정성 문제, 우리의 해석은 올바른가 하는 자기 비판적 책 읽기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가 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었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 하나만 붙들어도 충분하겠지만, 성경의 깊이는 알고자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목표 지점은 더욱 멀어지는 기분입니다.

 

이 책의 논의와 논지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칭호를 통해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통해 예수님은 자기를 어떻게 이해했고, 또 그 칭호가 내포하고 있는 예수님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는 자신을 어떤 메시아로 이해했는가, 그가 자기 칭호로 표현하고자 했던 자기이해가 예수의 메시아적 이해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묻습니다.

 

 

예수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를 사용하여 종말에 하나님의 새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를 "우리 아버지"로 부르고 그의 사랑과 풍요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했다"(270).

 

학자들 중에는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실제로 사용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9). 왜 "예수는 그리스도다, 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등과 같이 "예수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라는 칭호를 사용한 케리그마적 형식이 발견은 없는 것일까(47) 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들이 교회의 창작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예수 시대 당시에 묵시적 '사람의 아들' 메시아 사상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이 책은 원래 1983년 독일에서, 그리고 1985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최근 연구"라는 말은 1983년 어간의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이 주제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오늘날까지 이 책에 실린 논의 이상으로 발전된 내용이 없다고 하니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는 신약시대 이전에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메시아적 칭호가 없었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70). 김세윤 박사님은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길게 이끌어가는데, 사실 이 부분은 신학생이 아닌 일반 독자가 소화하기 다소 까다로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피로물인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다시금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그의 사랑과 풍족함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는 자신이 이 구원을 이루도록 예정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다니엘 7장을 통해서 이렇게 자기를 이해했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치 칭호를 사용하면서 그 이해를 표현했다. 그리고 이사야 42-61장에서 예언된 야훼의 종의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그 이해를 성취했다"(199).

 

"그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의 분명한 특성(자기이해)을 보여주는 예수의 자기 호칭입니다. 예수는 그의 메시아적 자기 이해를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메시아, 다윗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전통적인 메시아적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칭호들은 정치적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당시의 기대를 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이해한 메시아의 개념을 표현하기에는 적절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했던 메시아적 개념과는 상이한 독특한 메시아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219). 그런 점에서 "그 '사람의 아들'"은 완벽한 칭호였습니다(271). 왜냐하면 예수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신적 인물의 관점에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의 자기 칭호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이 하나님에 대한 아바-호칭, 하나님 나라(basileia) 선포, 메시아적 자기 인식이라는 세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된 예수의 자기 이해와 잘 일치된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색다르고 이해하기 어려운 칭호는 예수께 매우 적절했을 뿐 아니라,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자기 칭호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칭호로 이보다 완벽한 칭호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는 누구인가?", 나아가 "예수, 그는 자신을 누구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고 싶다면, 우리는 그 해답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초청합니다.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은 힘써 여호와를 알려고 하는 책입니다. "연구원으로서 수행한 연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가 소화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논증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복음을 맡은 사람이라면 한 번은 진지하게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아마도 현대 '고전'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오래 사랑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세윤 박사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이런 신학자, 이런 신학서적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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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튜이션 - 40년간 연구한 인지과학 보고서
게리 클라인 지음, 이유진 옮김, 장영재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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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최선의 선택이 언제나 최고의 의사결정은 아니다!

 

 

평소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나는 어쩌다 물건을 하나 사려고 하면 머리에 쥐가 난다. 무슨 상품이 그렇게 다양한지, 합리적인 소비를 원한다면 두루마리 휴지 한 묶음만 사려고 해도 비교, 분석해봐야 할 정보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웬 꼼수를 그렇게 부리는지, 묶음 갯수는 같은데 롤 길이가 다르고, 높이가 다르고, 질이 다르고, 가격이 다르다. 평소에 쓰던 걸 사는 것이 쉽겠지만, 쇼핑에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 합리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붙들리면 내 머릿속은 자동으로 비교, 분석에 돌입한다. 그 선택의 과정 속에 낭비하게 되는 시간까지 계산에 넣어야 합리적인 소비인가? 아, 골치가 아프다.

 

사람들은 어떻게 탁월한 결정을 내리는가? 의사결정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에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테이터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 합리적인 선택을 이끌어내는 분석적 의사결정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촉"에 의한 선택, 직관적 의사결정이 그것이다. 일핏 생각하기에는 분석적 의사결정 과정이 안전하며 믿을 만하다는 인식이 있고, 직관적 의사결정은 다소 모험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인튜이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직관적 의사결정"의 힘이 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꼭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한다.

 

저자가 첫 번째로 연구한 사람은 '소방관'이다. 그는 첫 번째 프로젝트로 소방관을 인터뷰하며,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사가 걸린 결정을 내리는가에 주목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탱크부대 장교들, 미 해군 장교들, 간호사들의 의사결정을 지켜보며, 어떻게 그토록 다급한 상황 속에서, '초능력'으로 여겨질 만큼 놀랍고도 현명한 결정을 그토록 신속하고 능숙하게 내릴 수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바로 <인튜이션>, 즉 직관의 힘이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직관의 힘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는 분석적 의사결정 과정이 코메디가 될 수 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골든타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내놓라하는 전문의들이 모여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동안 응급한 환자의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에서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분석한다고 문제를 붙들고 있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러 할 때, 바로 더 나은 방식을 찾도록 해주는 것이 '인튜이션'이다.

 

그렇다면 직관의 힘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학습될 수 있는 것인가? <인튜이션>에서 찾아낸 답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의 축적으로 직관의 힘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직관의 힘을 기를 수 있는 방법으로 맥락을 포착하는 멘탈 시뮬네이션, 문제를 해결할 '정곡'을 찾아내는 레버리지 포인트,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 스토리의 힘, 유추와 비유, 팀마인드의 힘을 소개한다. 이런 것들을 자연주의 의사결정이라고 한단다.

 

<인튜이션>은 직관의 힘을 응용하는 두 가지 차원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비교가 필요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예리하게 판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훈련과 관계"된 것이다(416). (적절한 비유인지 잘 모르겠지만, 책의 심오한 설명을 나의 생활 수준으로 끌어내려 적용을 해보자면) 첫 번째는, 휴지 하나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상품 정보를 비교하는 것보다 주변의 입소문이나 경험치에 의한 선택이 더 전략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두 번째는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가정했을 때, 많은 시간 전문지식을 교육시킨 후, 그 전문지식에 의존해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을 하는 것보다, 필요한 전문지식을 기반으로 경험을 축적하며 운전의 '감'을 익히는 훈련이 더 현명한 결정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분석적 의사결정보다 직관적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는 말은,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면 사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럼에도, <인튜이션>이 우리에게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합리성이나 논리성을 맹신하는 '지적'인 사람들을 한 방 먹이는 책이기 때문이고, 빅테이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데이터를 더 꼼꼼하게 분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생각들을 빠르게 통합할 수 있는 능력, 즉 직관의 힘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튜이션>은 '40년간 연구한 인지과학 보고서'이다. 의사결정 과정을 연구하는 학도들에게는 연구 과정을 날 것으로 읽는 자체로 즐거움이겠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이론을 한 번 씹어서 생활 속에서 이론을 찾아내고 적용해볼 수 있는 방식으로 풀이를 해주었다면 더 즐거운 책 읽기가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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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화 속 역사 읽기
플라비우 페브라로.부르크하르트 슈베제 지음, 안혜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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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예술과 역사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조망함으로써 예술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을 서로 다른 형식으로 말하거나 재해석했는지를 반복해 논증할 것이다"(9).

 

 

우리는 주로 역사를 말과 글로 배우지만, 어떤 역사들은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때가 있습니다. 말로 배우는 역사의 비극보다 아버지를 잃은 어린 아들의 무표정이나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담은 한 장의 그림이 더 절절하게 우리 가슴을 울리고, 전쟁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현란한 숫자보다 널부러진 시체 더미의 침묵이 그 참상을 더 간명하게 전달해주기도 합니다.

 

<세계 명화 속 역사 읽기>는 역사를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해보려는 시도입니다. "기원전 1792년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석비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를 그린 잭 휘튼의 작품까지 굵직한 세계사를 통크게 훑었습니다. 저자는 "일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예술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책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세계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하더라도 미술사에서 명작이 탄생하는 데 영감을 주었던 사건들은 이 책에 포함시켰다"고 밝힙니다(8). 그리고 그 좋은 예가 15세기 우첼로가 그린 <산로마노전투>라고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책을 빠르게 훑어보니 세계 명화에 담긴 세계사는 전쟁, 정복, 혁명으로 점철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앞쪽의 그림이 대부분 전쟁의 승리와 정복을 찬양하는 그림들이라면, 후반부로 갈수록 전쟁의 참상이나 잔혹함을 고발하는 그림이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서문을 잘 읽어보면, 아마도 그 갈림길이 되는 사건은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18세기까지는 역사를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예술가와 후원자 사이의 돈독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은 호전적인 예술(예술가가 원하는 쪽으로 사회나 정치가 변화하는 것을 미화해 표현)의 시대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8).

 

"예술과 역사적 사건은 언제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예술은 때로 권력을 이상화하고 찬양하는 수단으로서 역사(이야기)를 이용하기도 하고, 역사의 폭력성과 잔혹함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인류가 겪은 일상사에 대해 증언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깨달아집니다.

 

<세계 명화 속 역사 읽기>는 "예술과 역사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조망함으로써 예술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을 서로 다른 형식으로 말하거나 재해석했는지를 반복해 논증할 것이다"(9)고 기획 의도를 밝힙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설명 외에 그 논증이 충분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 다소 아쉽습니다. 여기에 실린 그림들은 역사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 작품들입니다. 명화를 통해 역사를 읽고 배운다는 시도가 신선했고, (충분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림에 표현된 작가의 의도가 어떤 역사적 해석을 담고 있는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교과 과목으로 배울 때는 지루하기만 했던 세계사가 세계적인 명화 속에서 입체감을 가지고 되살아 납니다. 명화나 역사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놀이 삼아 천천히 감상을 하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잊혀질 만큼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는) 화가들이 기술적으로 그림만 잘 그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배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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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사람들 - 인간의 차이를 만드는 정서 유형의 6가지 차원
리처드 J. 데이비드슨 & 샤론 베글리 지음, 곽윤정 옮김 / 알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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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총을 장전시키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것은 환경뿐이다"(166).

 

 

70억 명이 넘는 지구인을 6가지 카테고리 안에 분류해 넣는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가 아닐까 의심부터 든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6가지 정서 유형으로 인간의 차이, 행동방식 등을 어느 정도 설명해낼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더 놀라운 발견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자연과학적 자기 이해는 인간을 분해하고 또 분해하는 과정 속에서 난도질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고, 사회과학적 자기 이해는 인간을 비주체적인 어떤 것으로 대상화하여 내가 나로부터 소외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자연과학에서 발견한 법칙처럼 인간이 인간을 설명하는 딱 떨어지는 법칙은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법칙화(또는 공식화) 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듯하다. 그래서 학문은 더욱 발전을 하고, 그 과정 가운데 인간 이해에 대한 폭이 조금씩 조금씩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예술이요,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님의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과학적 관점의 인간 이해이다. 신경과학계의 거장과 과학 전문기자가 집필한 책을 평할 만한 과학적 지식이 내겐 없으므로 감상 수준의 글밖에 쓸 수 없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고 고백한다.

 

<너무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행동방식과 심리 상태, 그리고 건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서'이고, 삶에서 일어나는 경험에 대한 개인마다의 일관된 반응양식이 바로 '정서 유형'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기분과 구분되며, 객관적인 실험을 통해 측정 가능하다. 이 정서 유형은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복탄력성(역경으로부터 얼마나 빨리 혹은 천천히 회복되는가?), 관점(긍정적인 정서를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가?), 사회적 직관(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보내는 사회적 신호를 감지하여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 자기 인식(자신의 정서를 반영하여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 맥락 민감성(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는 정서적 반응을 얼마나 능숙하게 조절하는가?), 주의 집중(의식의 초점을 얼마나 정확하고 명확하게 맞추는가?)

 

잠시 딴소리를 하자면, 뇌와 정서의 연관성을 밝히는 실험에서 매우 재미있는 설명이 나온다. 19세기 프랑스의 해부학자인 뒤셴에 의하면, "진정으로 행복한 미소는 입과 근육이 아닌 눈 근육이 움직일 때 지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와 수다를 떨 때 상대방의 눈 근육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한다. 웃을 때 눈가 부분에 잔주름이 생긴다면 진짜 웃음을 웃고 있는 것이고, 눈가의 잔주름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웃음이 아니라 단지 예의상 짓는 미소일 뿐이란다(68). 눈 주변의 근육은 의지를 따르지 않는다(69). 이러한 실험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정서와 뇌의 활성화 간이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발견이다.

 

<너무 다른 사람들>에서 주목할 만한 설명 중 하나는 "우리의 정서적 혹은 심리적 운명이 유전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환경"에 따라", "우리의 세포에 있는 유전자에 도달해 그것을 끄거나 켤"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아닐까 한다(166). 타고난 유전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험이고, 정서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많이 한 것이 문제라면 긍정적인 경험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하나의 치유책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뇌의 차이가 정서 유형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전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은 뇌에 우리가 의도하는 특별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 명상을 제안하기도 한다.

 

어느 상담사가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에게 이런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마음을 읽는 일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읽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했는 부분은,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새롭게 얻은 과제가 있다면, 나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해(유형화된 정서 반응) 어떻게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기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심리학 계통의 책을 읽을 때마다 얻게 되는 하나의 결론은 우리 삶은 사실 마음먹은 대로, 믿음대로, 생각대로 되어진다는 것이다. 마음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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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닮은 집, 삶을 담은 집 - 현실을 담고 ‘사는 맛’을 돋워주는 19개의 집 건축 이야기
김미리.박세미.채민기 지음 / 더숲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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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에게 "어떤 집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선뜻 돌아오는 대답이 "멋진 집"이랍니다. 그런데 "어떤 멋진 집을 원하느냐"고 되물으면 건축주의 말문이 막힌답니다. 자신이 원하는 집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없다는 거지요. (서문 中에서)

"내가 커서 아빠처럼 어른이 되면" 우리 집은 내 손으로 짓고 싶었습니다. "울도 담도 쌓지 않은 그림 같은 집" 말이죠. 또 "내가 커서 엄마처럼 어른이 되면" 우리 집은 내 손으로 잘 꾸밀 자신도 있었습니다. "넓은 뜰엔 꽃을 심고 고기도 기를 수 있는" 그런 집으로 말이죠. 그런데 현실은 참 팍팍하기 그지 없네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그야말로 '집장사'를 위해 지은 집입니다. 비슷한 크기, 비슷한 모양으로 지은 원룸형 공동주택입니다. 젊은 시절 건축사업을 좀 하신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순전히 '집장사'를 목적으로 날림으로 지은 흔적이 곳곳에 보인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나만의 공간으로 작은 땅 한 평 소유할 수 없고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꾸밀 수 없는 형편을 생각하면 혼자 처량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쁜 집, 공간이 살아 있는 집, 개성이 있는 집을 보면 저절로 눈이 가고, 마음이 가고, 손이 갑니다.

 

<삶을 닮은 집, 삶을 담은 집>에도 그렇게 저절로 손이 갔습니다. <집이 변한다>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된 글을 책으로 모은 것이라는데, 실려 있는 사진만으로도 "우와", "우와" 감탄이 흘러나왔고, "팔자 좋은 사람들 이야기지" 하는 괜한 투정도 흘렀습니다. 여기에 담긴 19개의 건축 이야기는 모두 자신의 '삶'에 맞는 '집'을 맞춤형으로 지은 것입니다. 땅에 모양에 맞춰 오각형의 땅에 오각형집을 짓고, 삼격형 땅에는 삼각형집을 짓고, 몸이 불편하여 외출을 꺼리시는 아버지를 위해 통유리로 속이 훤히 보이도록 지은 집도 있고, 고정관념을 깨는 멋진 다가구, 다세대주택의 완성도 높은 건축 이야기도 있고,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처럼 지은 집 이야기도 있고, 거주자의 의지에 따라 쓰임이 바뀌는 "기분 좋은 불편함이 스며 있는" 전원주택 이야기도 습니다. 수록된 사진과 도면을 볼수록 집의 내부를 더 엿보고 싶은 아쉬움이 커집니다. (그러나 사적인 공간을 이 이상 공개하기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결국 <삶을 닮은 집, 삶을 담은 집>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집은 곧 삶이라는 것, 집을 짓는 일은 삶을 디자인 하는 일이라는 것, 그것을 깨우쳐 주고 싶은 듯합니다. "이 책이 집을 사는(買) 것'에서 '사는(住) 곳'으로 바꾸는 하나의 디딤돌이 됐으면 합니다"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조용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멋진 집'에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멋진 집'이란 무엇일까요? <삶을 닮은 집, 삶을 담은 집>은 바로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다른 사람의 멋진 집'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보다, '나만의 삶을 담은 집'은 어떻게 꾸며질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도', '도', '도' 하나의 소리만 내는 지루한 노래처럼, 멋대가리 없는 집들. 그 속에 저마다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개성 있는 집들이 하나 둘 지어져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우리 삶에 즐거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삶을 닮은 집, 삶을 담은 집>은 집에 대한 가치를 엉뚱한 데서 찾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톡톡톡 두드리는 즐거운 자극입니다. 가고 싶지만 길을 찾지 못해 막연한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줍니다. 삶은 담은 집, 부디 내 삶에도 그런 행운이 깃들여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즐거운 상상을 계속 해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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