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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지? - 옛날, 옛날에 동양 여성들은 이렇게 살았다네
E. B. 폴라드 지음, 이미경 옮김 / 책읽는귀족 / 2016년 2월
평점 :
"서양에서는 여성이 남자의 동반자로 인식되는 반면, 동양에서는 여성을 남자의 노예이자 노리개로 생각한다. 서양에서는 여성에 대한 존경이 숭배 수준까지 높아진 적도 있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여성이 진정 인간이었던 적이 있는지에 관해 곧잘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307).
독일의 이집트어 학자인 에르만의 이 말이 처음에는 좀 의아했습니다. 이 말만 들으면 서양에서는 여성 차별이 없었던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대 페미니즘 역명의 선구자로 불리는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는 "여성의 존재가 보잘것없으며 여성이 남성에게 노예적 복종을 하는데 대하여 항의"했으며, <여권의 옹호>라는 책을 통해 "여성이 독립적이지 못하고 남성 의존적이며 무능하게 비쳐지는 이유는 선천적이고 자연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별적인 사회 구조 속에 양산된다"는 것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영국 여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인터넷을 통해 '여성혐오' 현상이 위험수준으로 번져가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여성혐오는 오늘날의, 그리고 동양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도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을 만큼 뿌리가 깊으며, 17세기부터 20세기 서구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을 받아왔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분명 서양에서도 여성차별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위에 인용된 에르만의 한마디는 전에는 품어보지 못한 질문을 하나 던져주었습니다. '같은 여성차별을 겪었어도 서양에서의 삶과 동양에서의 삶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어서 와,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지?>는 전설과 신화를 포함한 고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극서에서 극동지역까지, 종과 횡으로 큰 그림을 그리며 동양여성들의 삶을 고찰합니다. 100년 전에 나온 책이며, 저자는 침례교 목사이자 성서문학을 가르쳤던 서양인 남성이며, 미국에서 총 10권의 시리즈로 출간된 '여성' 이야기 중 제4권에 해당되는 책을 국내 최초로 번역한 것입니다. 성서와 전설, 신화, 역사사료는 물론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특징들까지 호방하게 훑어내려가며 동양여성들의 삶의 특징들을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분석하기보다 특징적인 모습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주기 때문에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옛 이야기를 듣듯 구수하게 읽히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서 와, 이런 이야기 처음이지?>가 보여주는 동양여성의 지위와 삶을 보면, 우선 지역별로 여성의 위상에 차이가 있으며, 무엇보다 종교의 영향이 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브라만교나 이슬람교를 주요 종교로 삼고 있는 나라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이 책이 깨닫게 해준 가장 의외(!)의 사실은, 고대 동양여성들의 지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머니'의 지위가 높았다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창세기(구약성서)에 기록된 사라(아브라함의 아내)의 성대한 장례식 장면은 '여성을 존중하는 히브인들의 태도'를 보여주며, 유대 여성들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존경스러운 위치에 있었다(108)는 점도 새삼 달리 보였습니다. 또 하나, 구약의 십계명에서 규정하고 있는 '부모공경' 계명을 보면, "어머니를 공경하는 의무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의무와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짚어냅니다. 이처럼 "율법에서 내세운 여성의 위상 덕분에 히브리 여성들은 그밖의 다른 셈족이나 동양 민족의 여성들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서게 되었다"(95)고 분석합니다. 여성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는 남성을 살해한 범죄와 마찬가지로 혹독하게 처벌했다는 것도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93-97).
고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여성의 지위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히브리와는 달리 여신이 있었는데, 고대 북유럽 신화에서도, 그리스에서도, 그리고 바빌로나아인들에게도 지하세계의 진정한 왕위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181-184).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죽은 자의 영역에서 여성의 힘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심지어 어떻게 제왕적 성격을 띠고 있는가?"(183)
이 밖에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금수저 여성이 오히려 덜 자유로웠다"(193)는 것입니다. 상류층 여성은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으며, 그들의 단조롭고 고립된 생활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만한 작업으로 정원이 만들어졌다는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동양의 결혼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결혼 성사 과정에 부모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남자 형제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옛날에는 결혼은 당연히 남자와 한 여자가 아닌, 두 명 이상의 남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약에 따라 성사되었다"(51)는 것도 오늘의 결혼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또, 힌두 문학에 나타나는 여성을 주목하며 "동양의 어떤 나라도 문학에서 여성을 그렇게 높은 위치를 부여하거나, 문학에 대한 여성의 기여도 또한 그처럼 높은 나라는 없다"(268)는 설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서 와, 어린 이야기는 처음이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제를 남겨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설명대로라면, 동양여성의 삶은 오히려 고대에 누렸던 지위를 점점 잃어가는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시 그 원인을 파헤친 논문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적어도 동양여성의 지위면에서 보면 인류는 퇴행의 역사를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교적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히브리인(유대인), 이집트 여인의 삶이 그 증거입니다. 저자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여성의 지위가 유대 가족 사이에서조차 이스라엘의 독립과 힘을 보였던 시절만큼 높은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며, "특히 아들들에게서 예전에는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어머니에 대한 공경이 사라졌다. 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자 형제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고 그렇게 취급당한다. 동양의 모든 여성은 이런 열등한 대접을, 하늘이 그들을 남자가 아닌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일종의 형벌이라 여기며 참으로 잘 견뎌온 듯하다"(112-113)고 덧붙입니다. 동양 여성 중에 훨씬 더 독립적이고 어머니의 지위 역시 높이 존중되었던 이집트 여인들의 지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이집트에서도 여성의 교육은 안타까울 정도로 방치되어 있다. 심지어 고대 여성의 교육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슬람 국가들은 대개 여성들을 엄격하게 열등한 위치로 내몰거나 비하하기도 한다"(246) .
"어느 나라에서나 여성의 상대적 지위는 나라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리고 이러한 잣대를 동양에 적용해보면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결과가 드러난다. 여성이 성서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히브리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높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15).
저자는 "여성의 지위에 따라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이 보인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100년 전이니, 이 말은 100년 전에 한 것인데, 100년이 지난 지금 저자가 다시 우리를 본다면, 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문화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최근 종영한 '시그널'이라는 드라마에 이런 명대사가 나옵니다. "설마 거기도 그럽니까? ...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지요. 그죠?" 이 책의 저자가 우리에게 묻고 싶은 말은 아닐까요?
<어서 와,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지?>는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재미있게 읽힙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기에 그림에 비유하면 정밀화라기보다 대략적인 스케치에 가깝습니다. 정말한 고찰에 한계를 지니기도 하지만, 이렇게 큰 그림으로 동양여성의 삶을 그려주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과 비교하여 읽을 수 있는 서양여성의 삶에 관한 책도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번역하는데도 많은 지식을 요했을 것 같은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옮긴이의 주'가 친절하고도 고마웠습니다. 다만, 성서에 등장하는 이름의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점은 살짝 아쉬움으로 남기도 합니다(예를 들면, '입다'를 '예프타'라고 한다든지, '에스더'와 '에스델서'를 혼용한다든지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