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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평점 :

눈
덮인 산장,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과연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주로 음울한 미스터리나 서스펜스를 쓰는 소설가
인자야 도모야.
그는 그림책 작가인 아내 유메코와 함께
야쓰가타케 남쪽 기슭의 산장에서
신작 <어둠의 여인>의 성공을
축하하며 와인을 마시고 잠이 든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아내는 자취를 감춘 채 신발과 옷, 휴대폰이 사라지고
컴퓨터, 자동응답기 겸용 팩스기까지 모두
불통이다.
게다가 인자이의 귀를 자극하는 말벌의
날갯소리가 들린다.
예전에 말벌에 쏘인 적이 있는 그는 벌 독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이번에 또 쏘이면 아나필락스 쇼크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런데 눈보라가 몰아치는 11월
하순에,
그것도 해발고도 1,000미터가 넘는
산에
어째서 말벌이 돌아다니는
것일까?
인자이는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추리를 거듭하며
산장 곳곳에서 자신을 덮쳐오는 말벌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데….
<검은 집>, <13번째
인격>, <악의 교전> 등으로 유명한 '기스 유스케'의 최신작(2013)입니다. '기스 유스케'라고 하면 "모던 호러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소개되는데, 정확하게 모던 호러는 어떤
장르를 말하는 것까요? 정확한 뜻을 말해주는 사전이 없네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호러'와 차갑고 간결한 도시적(현대적)인 감각을 주로
일컫는 '모던'을 합쳐서 이해하면 될까요? 아니면 "인간의 욕망과 광기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라는 설명에 힌트가 들어
있을까요?
<말벌>이 '호러소설'인 것은
분명합니다. 시종일관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 분위기가 작품을 뒤덮고 있습니다. <말벌>은 수수께끼와 같은 물음, 오리무중인 범인,
마지막 반전 등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미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밀실
트릭'을 살짝 비튼 설정과 살해도구로 '말벌'이 등장하는 것이 새롭습니다. 보통은 외부와의 소통이나 개입이 전혀 불가능한 '밀실'에서 숨겨진
살인트릭을 추리해가는 것이 밀실 트릭인데, <말벌>은 생존도구가 숨겨긴 '밀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그립니다. 밀실 트릭이
'어떻게 죽였는가?'에 초점이 있다면, <말벌>은 살해도구가 숨겨진 밀실(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독자의 심장을 쫄깃하게 합니다.
<말벌>이
독자에게 던져주는 수수께끼는 이것입니다. 주인공 '인자야 도모야'의 아내는 왜 자취를 감추었는가? 지난 밤,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누가, 왜, 산장 안에서 밖과 소통할 수 있는 기기(휴대폰, 컴퓨터, 팩스기까지)를 모두 불통으로 만들었는가? 그렇게 한 목적은 무엇인가?
눈보라가 몰아치는 11월 하순에, 해발고도 1,000미터가 넘는 산장에 어떻게 노랑말벌(말벌 중에 덩치가 제일 작지만 공격성은 제일 강해 인명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벌, 21)과 장수말벌이 활동할 수 있는 것인가?
말벌에 쏘인
적이 있기 때문에 다시 쏘이면 쇼크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인자야 도모야'. 그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 그의 아내 '유메코'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벌을 이용하다니, 거기에 특별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고통을 주고 싶기 때문일까?
설마! 유메코가 내게 그렇게까지 깊은 원한을 품을 이유가 있을까?"(54)
그런데
저자는 자신이 설정해놓은 '말벌'이라는 트릭이 독자들을 설득하기에 부족하다 싶었나 봅니다. 독자들이 던질만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그것은 처음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커다란
의문이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방법으로는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성이 부족한 데다 산장 안에 부자연스러운 공작의 흔적이 남게
된다"(145). 그리고
살해도구로 '말벌'이라는
번거롭고 불확실한 방법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변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피해자가 악전고투하는 장면이 서스펜스의 재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미노 게임처럼 치밀한 계획을 하니씩
풀어나가는 장면에는 미스터리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기묘한 쾌감이 있다. 범인은 일그러진 귀족적 취미라고나 할까, 범행 시각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피나 브랜디를 마시며 피해자가 죽길 편안히 기다리는 것이다"(148) 이
작품은 "왜
말벌인가?"가 추리소설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데 견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나를 움직이는 것은 말벌에 대한 분노와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은 욕망뿐이다"(108). <말벌>이라는
작품을 재밌게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를 뽑으라고 하면 '악의', '인격', '정보'를 꼽고 싶습니다. 반전의 묘미를 떨어뜨리는 스포가 될 수도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기스 유스케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악의'와
'인격'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결국
생사를 가른 것은 무기나 식량이 아니라 정보였다"(28)는 한 문장의 힌트처럼, <말벌>은 말벌에 대한 '정보'가 범인을
'추리해내는' 재미를 대신합니다. 솔직히 독자의 뒤통수를 후련하게 내려치는 극적인 반전의
묘미는 다소 부족합니다. 사건을 추리해내는 탐정의 역할이 반전의 재미를 살려야 하는데, 결말쯤 누군가가 등장해 사건의 전말을 고백(!)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자가 진범이다'는 그 '의외성'의 미덕이 오히려 독자들을 김빠지게 만들어버린다고 할까요. 열광할 만큼의 임팩트는 다소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