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 - 길 위에서 마주한 찬란한 순간들
청춘유리 지음 / 상상출판 / 2016년 9월
평점 :
용기, 어디서 얻냐고요?
저는 딱 두 가지였어요. 보슬비가 내리는 늦저녁, 빗방울과 함께 반짝이는 에펠탑 아래에 서
잇는 제 모습하고요. 고3 시절, 새벽 6시 TV 프로그램에서 봤던
에스토니아 탈린의 호두 파는 아가씨를 만나는 것.
그 두 가지를 상상하니 미치겠는 거예요. 하고 싶어서요. '진짜 꿈꾸던 것들을,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살면 행복할까?' 하는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거든요. 지금 안 하면 영영 못하겠다 싶고,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그런 생각들이 내가 눈을 떴을 때 펼쳐진다면 어떤
느낌일지 정말 궁금하기도 했어요(154-155).
"21살,
진짜 청춘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에 오글거리지만 이름 앞에 '청춘'을 붙이는 게 계기가 되어" 본명보다 "청춘유리"로 더 잘 알려진 여행가
'청춘유리'는, 이미 청춘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sns 스타라고 한다. "18살, 아직은 엄마 품이 좋을 작은 소녀가" 일본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첫 발을 디뎠고, 그것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당당히 '청춘 여행가'라는 타이틀을 이름 앞에 달았다. <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는 그런 '청춘유리'가 세계를 여행하며 '길 위에서 마주한 찬란한 순간들'을 기록한 청춘 여행기이다.
그녀의
여행 에세이는 친절하지 않다.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는 설렘과 두려움을 시작으로, 그녀는 갑자기 용산 상가에 가서 중고 DSLR 카메라를 사기도
하고, 공항에 서 있기도 하고, 더블린 시티행 버스에 앉아 있기도 하고, 아일랜드에서 '오페어'가 되어 일을 하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가지도 않고, 기행문처럼 소상한 여행기록을 남기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편 일기 같은, 여행의 단상들이다.
요즘
멀쩡한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잘 살고 있던 집을 팔거나 전세금을 빼고, 휴학을 하거나 진학을 미루고 여행길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이들 덕분에?) 언제부터인가 여행은 이제 우리에게 돈이나 시간, 정보나 동행이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 바로 이 책도 그러한 용기를 통해 탄생한 책이며, 그러한 용기를 북돋우는 책이며, 그러한 용기에
도전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누군가는 그 용기를 부러워 할 테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탓할 수도 있고, 또 도전을 결심할 수도
있겠다. 유독 이렇게 용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용기'만 있다면 그녀의 경험들, 감상들, 특별한 추억들이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짜릿한 가능성
때문이다. 누군가의 경험을 엿보는 것으로만 만족하기에는 우리의 일상이 너무 무료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소중하기에.
"아가씨는 월급이 얼마야? 얼마나 일해야 이 시계 살 수 있어? 여기서
일
하면 이런 거 사고 싶고 그렇지 않아? 어떡해, 우리 딸은 복 받은
거네"(76).
"금문교에서
그콧 메킨지의 'San Francisco'를 듣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쉴 틈 없이 아르바이트"를 할 때, 알바생과 고객으로 만난 한 아주머니가 한
말이란다. 우리가 여행이라는 낯선 경험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 아닐까. 내 삶을 남루하게 하는 일상의 비루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 말이다. 폭력이나 다름 없는 한 아주머니의 무례함을 보며 차라리 여행의 고단함과 불안함을 견디는 것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바로 그런 순간에 여행이 고파진다.
누군가가 내게 왜 이런 길을 택했느냐고
물어본다면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죽기 전에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가
없기를.
죽기 전에 내 삶은 행복했다 자부할 수
있기를.
죽기 전에 누군가 내게 참 좋은 사람이었다 말할 수
있기를.
화려하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근사한 삶이었다고
웃으며 떠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라고(78)).
지금
우리는 우리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우리 욕망과 꿈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발견된다고 믿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오직 자신의 안의 욕망에
집중하며, 그 욕망을 표현하고 성취하라고 속삭이는 사회말이다. 한 사회학자는 이것을 "표현하는 개인주의"라고 부른다고 한다. 일관성 없는 내
안의 욕망에만 충실한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기에, 이런 책을 읽으며 여행 충동이 일 때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단지 그녀(청춘유리)와
똑같은 경험, 무작정 낯선 세계 속으로 떠나는 것인지 되묻곤 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말한다, 단지 여행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고, 그래서 성장하게 된 '마음'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삶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열심히 채워가는 그녀를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인생의 가치'였다. 나는 다른
누구가 아닌, 먼저 나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가치말이다. 요즘 이렇게 용감한 청춘들에게서 배우는
것들이 많다. 정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을 던져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렇게 살고 싶다'는 선명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 청사진은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시작과 도전과 실패와 관계와 부딪힘과 넘어짐 속에서 완성된다는 힌트와
함께. 이제라도 보다 분명한 그림을 그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면, 이 책을 잘 읽어낸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