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도 함께
존 아이언멍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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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러미 멜런이 보기에 세인트피란 주민들은 그런 식으로 조 학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평생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아마겟돈의 수학을 연구하던 진지한 괴짜의 모습은 원치 않았다. 실크 넥타이를 매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월급이 그들의 1년 수입보다 많았던 번드르르하고 제멋대로인 도시 청년은 원치 않았다. 불안해하고 심란해하던 조, 악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조, 어둠 속에 숨어서 자기만의 두려움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던 조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원치도 않았다. 그들이 고래 축제 때 추억하는 남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찬양하는 남자는 영웅이었다. 선지자였다. 세상을 구한 자였다"(15).


<고래와 함께>는 영국의 지도에서 '작디작인 발가락의 저기 저 맨 끝에 난 조그만 뾰루지"나 다를 바 없는, 콘월 주의 외딴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아침의 작은 소동으로 시작됩니다. 마을이라기보다는 촌락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세인트피란에 알몸의 젊은 남자가 긴수염고래와 함께 떠밀려오면서 평온했던 마을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그 소동이 일어난 과거와 그 소동이 전설이 되어버린 현재, 알몸의 사나이가 기억하는 과거와 세인트피란에서의 현재가 거미줄 처럼 얽히면서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가 직조됩니다. 




"외로움이 이렇게 짧게 끝날 수도 있는 걸까? 이 부둣가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불길한 예감을 느꼈건만 낯선 이가 건넨 인사 하나로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는 걸까?"(52)


"그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 알몸으로 떠밀려온 '조 학'의 사연이 좀처럼 속시원이 풀어지지 않는 가운데, 그의 이야기가 한꺼풀 벗겨질 때마다 불길한 기운이 드리웁니다. 투자은행에서 투자결정을 위한 금융투자분석가로 일하던 조 학은 자신이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이 '독감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 종말을 예견하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은행을 뛰쳐나와 그에게는 "땅 끝"이나 다름없는 세인트피란까지 떠밀려왔습니다. 조 학은 파도에 떠밀려왔다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고래구하기 대작전을 진두지휘하며 하루아침에 세인트피란의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마음을 안정을 찾아던 조 학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예견한 대로 독감 바이러스가 번질 조짐을 보이자, 이번엔 인구 300명인 세인트피란 마을 구하기 대작전에 돌입합니다.  




"혼자 있는 건 절대 좋지 않다. 하지만 혼자 있어야 한다면 친구와 함께 혼자 있어라"(321).


<고래와 함께>는 "개미 떼처럼 확실하게 힘을 합치면 인간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유한한 자원으로 문명을 건설했고 그것을 써서 없애기 바쁜 인류는 자원의 소멸과 함께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맞서야 하는, 너무 끔찍해서 저항할 생각조차 나지 않는 거대 괴물은 핵무기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이기심을 <고래와 함께>는 폭노합니다. 이기심 앞에 인간 사회의 복잡성은 최대의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한 곳만 무너져도 도미노처럼 전부 쓰러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감 바이러스' 때문에 인류가 종말을 고할 수 있는 것도 복잡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래와 함께>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연합할 때 복잡성은 유기적은 연관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창고는 거의 비었다. 고래는 죽었다. 불은 다시 켜졌다. 하지만 어떤 미래가 조 학을 기다리고 있을까?"(464)


세인트피란을 구하며 그 마을의 전설로 남은 조 학은 자신 인생의 티핑 포인트가 절박한 고래를 구하기로 결심했던 순간이라고 회상합니다. 그때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값진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역사와 함께 쌓아올린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모릅니다. 아등바등, 죽을동살동 악착을 떨어보지만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퇴장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무한 경쟁에 내몰린 우리들은 어느 순간 인간 혐오자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며, 혐오하는 그것보다 혐오자로 변한 자신의 모습에 더 경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부르짖음이 여러 형태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우울증, 폭력, 무기력.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티핑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그냥 살아가지 말고, 신념과 다른 일상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티핑 포인트말입니다. 어쩌면 <고래와 함께> 안에서 그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초반엔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 새 푹 빠져 들어 읽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섬세하면서도 광대하고, 순박하면서도 날카로운 성찰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독감 바이러스 때문에 진짜로 인류에 종말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확인하고 싶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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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스케치 - 당신의 25일을 함께 할 가볍고 즐거운 드로잉 노트
박진우 지음 / 책밥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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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의 능력은 사물을 바로 보고 그려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들어가는 말 中에서).



학교 다닐 때, 만화방에서 살던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의 취미는 만화책의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리는 것이었지요. 만화책과 정말 똑같이 그림을 그려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친구는 백지에 직접 그림을 그려넣어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친구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작품을 선물받은 듯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취미로 그림을 그디가 고등학교에 가서야, 그것도 2학년에 끝나갈 무렵에 미술로 진로를 정하고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홍대에 당당하게 합격을 했답니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친구가 그림을 그릴 때면 옆에서 저도 따라 그려보곤 했는데, 저에게는 차분함과 진득함이 부족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선생님도 "그림을 잘 그리려면 꾸준하고도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뜻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금방 포기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가 만화책을 열심히 읽은 것도 그림을 잘 그리는 비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관찰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답니다.


<1일 1스케치>를 가르쳐시는 저자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색이나 터치의 감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형태를 바로 그려내는 것이 먼저"라고 일러줍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결국 포기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원하는 대로 형태가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에 출렁이면서도, 늘 연필만 보면 습관처럼 선을 긋고 그림을 그리면서도 왜 내가 그리는 그림이 낙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원인은 여기서 찾았습니다. 끄적끄적 해보다가 원하는 형태로 그려지지 않는다 싶으면 곧 포기를 해버렸던 것입니다. 


<1일 1스케치>는 25일 동안 스케치의 기본을 연습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입니다. '25일 간'이라고 해서 25일만에 스케치가 완성되는 단기 속성 과정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지는 차분함과 진득함이 요구되는 과정입니다. 저자 선생님은 "처음에 그림을 그릴 때 알고 가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접근성과 기본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썼"다고 밝힙니다. 1일 1스케치라고 하지만, 1일 여러 장의 연습을 통해 1스케치를 배울 수 있다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취미생활로 스케치를 선택하고, 좋아하고, 또 추천하는 이유는 누구나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준비물이나 도구가 비교적 간단하다는 것, 터치나 타이핑 같은 단순 작업 이외에 손으로 정교한 작업을 할 일이 없는 저에게 손을 움직이는 놀이가 된다는 것, 스케치를 잘할 줄 알면 생각보다 일상생활에 활용도가 높다는 것 등입니다. 다이어리를 꾸밀 때도 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나만의 편지지를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다든지, 짜투리 시간도 보람차게 보낼 수 있다든지 하는 즐거움과 특별함과 유익도 있습니다. 몰두하다 보면 저절로 차분함과 진득함도 몸에 배게 할 수 있겠더라고요.


<1일 1스케치>는 그림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그림의 기본기를 다져주는 책입니다. 기본이 탄탄해야 일정 시점이 지나면 실력이 일취월장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만큼 쉽지는 않지만) 스케치의 기본기를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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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시간을 걷다 - 한 권으로 떠나는 인문예술여행
최경철 지음 / 웨일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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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대해 안다는 것은 세계의 반쪽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독특한 콘셉트의 책입니다. 처음 제목과 표지만 보고 유럽 여행에 관한 책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여행 에세이나 가이드북은 아닙니다. 유럽의 역사와 건축과 미술에 대해 시대순으로 이야기하는데, 기존의 책들과는 풀어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일단 눈에 띄는 점은, (저자의 말에서도 밝히듯이) 유럽의 역사와 건축과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예술사를 다룬 책들은 대부분 그리스를 시작으로 로마제국의 황금기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이 책은 로마 시대 이후 수많은 역사와 문화에서 재생산된 그리스를, 로마를 확인해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9). 두 번째로 눈에 띄는 점은,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소설처럼 구성한 한 편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분위기, 그 시대의 삶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딱딱한 설명만으로는 미치 다 상상하지 못했던 한 시대가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한 토막 서론격으로 소개되는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읽는 재미를 더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저자는 "현재 우리가 유럽을 기반으로 한 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측면에서", "유럽에 대해 알아보는 일은 세계의 반쪽을 이래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9). 전에 이런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사고는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세상 지식과 무술을 겸비한, 역사상 대단히 위대한 인물입니다. 알렉산더의 군대가 바사 왕국(오늘날의 중동 지역 대부분)을 진멸하고 인도까지 진출하여 아시아를 제패함으로 역사가 세워진 이래 최초로 동서양이 만났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기도 한 알렉산더 대왕은 유명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 전쟁을 하며 동양에 있는 야만인들을 개화시키고 개몽시켜 합리적이고 냉철한 이성으로 바꿔 주려는 사명감으로 충만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로 인해 유럽과 아시아가 하나로 통일되면서 알렉산더 대왕의 유지를 받들어서 헬레니즘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땅만 정복한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을 전파하며 사상까지 정복해나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이 책을 읽으니 헬레니즘을 기둥으로 로마라는 지붕을 얹은 유럽사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럽의 시간을 걷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전달하지 않고 '유럽사'에 대해 사고하게 해줍니다.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반추하며 읽을 수 있습니다. 유럽의 역사와 건축, 미술에 대해 꽤 수준 높은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책입니다. 비판할 만한 지식이 없기도 하지만, 배우는 마음으로 재밌게 읽었습니다.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흐름'을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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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사랑에 빠지는 여행법 (북부) - 당신이 몰랐던 숨겨진 프랑스 이야기(멋과 문화의 북부) 프랑스와 사랑에 빠지는 여행법
마르시아 드상티스 지음, 노지양 옮김 / 홍익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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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쓰지 마요, 여긴 파리이니까"(332).



<프랑스와 사랑에 빠지는 여행법>은 <프랑스 남부>편과 <프랑스 북부>편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북부>를 보기 전에, <프랑스 남부>를 먼저 보았습니다. 매일 거대한 인파가 몰려드는 뻔한 프랑스, 틀에 박힌 프랑스가 아니라, 뭔가 특별한 프랑스, 내가 몰랐던 프랑스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북부>는 "너무 관광지 같을 것" 같은 뻔한 프랑스로 매일 거대한 인파가 몰려올 수밖에 없는 이유, 나도 그 행렬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프랑스 남부>가 프랑스의 숨겨진 매력, 아는 사람들만 아는 매력을 알려주었다면, <프랑스 북부>는 "너무 관광지 같은" 프랑스를 특별하게 즐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면, "어차피 에펠탑과 베르사유 궁전에 가야 하는 당신"에게 "가장 멋진 에펠탑을 볼 수 있는 8가지 방법", 어마어마한 베르사유 궁전을 "똑똑하게 관람하는 비법"(속전속결 베르사유 관람법), 일생에 한 번은 가봐야 할 루브르 박물관에서 "꼭 만나야 할 여인들 Best 13"을 꼽아주는 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저자의 유명세가 바로 그 함정입니다. 뉴욕타임스 여행 부분 베스트셀러, 파리 북 페스티벌 여행서 대상 수상, 미국도서관협회 여행 부분 은상 수상, 최고 권위의 '로웰 토머스 여행저널 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이니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었겠습니까. 그러니 이 책이 전수한 '속전속결 베르사유 관람법'은 더이상 나만 아는 비밀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저자가 그저 우연히 발견하게 된 파라의 진짜 매력이 살아 있는 "뜻밖의 멋진 산책로" 생마르탱 운하도 이미 여행객들이 몰리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프랑스 남부>를 먼저 읽었을 때에는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프랑스의 역사를 만든 여인의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기대했던 것만큼 충족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감은 <프랑스 북부>에서 채워졌습니다. 프랑스의 문화 지형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여인들 예를 들면, 그녀의 장례식이 있던 날 파리 전체가 숨을 멈추었다는 에디프 피아프, 편견과 고정관념의 장벽에 도전했던 위대한 여인 퀴리 부인,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페미니스트로 인정받는 올랭프 드 구즈, 나폴레옹의 연인 조제핀 등 프랑스의 역사를 만든 여인들의 이야기가 맛깔나게 풀어져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가 풍요로운 여백이 있는 곳, 영혼의 밑바닦까지 밝게 씻어내는 아름다운 지상낙원이었다면, <프랑스 북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몸을 싣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입니다. "넘쳐나는 역사와 유물, 셀 수 없이 많은 문화 레퍼토리의 융단폭격"이 가해집니다. <프랑스 남부> 여행이 여유롭고 느린 여행이었다면, <북부>는 숨가쁜 환희와 활기로 가득찬 여행입니다. <프랑스 남부>가 비우는 여행이었다면, <프랑스 북부>는 배우고 채우는 여행이었습니다. <프랑스 남부>가 그러했듯이, 이 책 <프랑스 북부> 역시 독자를 프랑스로 이끄는 강력한 나침반입니다!


"그해에 나는 프랑스는 그저 나만의 이상향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삶을 위로받기 위해 들러야 하는 곳이며, 나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곳이면서도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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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품격 -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종인 글.사진 / 상상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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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차 여행기자 박종인의 고품격 인문 기행



김재준 박사는 누군가 한자리에서 10년을 일했다면 그분 앞에서 모자를 벗고, 20년을 일했다면 허리를 굽히고, 30년을 일했다면 무릎을 꿇어라 했다 한다.  25년 차 여행기자가 말하는 여행의 품격은 무엇일까? 이 책은 '박종인의 땅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5년차 여행기자에게 여행은 땅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고,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죽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이 책은 여행에 목마른 자들을 땅의 역사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우리는 땅에서 산다. 그 땅에서 우리는 여행을 한다. 모든 사람이 사학자일 필요는 없지만, 여행길을 떠난 사람이라면 그 땅에 얽힌 이야기를 눈곱만 치라고 알고 떠났으면 좋겠다"(서문 中에서).








봄이 오면 농부는 씨를 뿌린다. 

나는 여행을 한다.


여름이 오면 농부는 비를 맞는다. 

나는 여행을 한다.


가을이 오면 농부는 들판을 거닌다. 

나는 여행을 한다.


겨울이 오면 농부는 숲으로 간다. 

나는 여행을 한다.



첫인상이 참 좋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인트로(intro)에서부터 이 책에 반하고 말았다. 봄이 오면 농부가 씨를 뿌리듯, 여름이 오면 농부가 비를 맞듯, 가을이 오면 농부가 들판을 거닐듯, 겨울이 오면 농부가 숲으로 가듯, 그렇게 여행을 한다는 것은, 여행이라는 것이 뭐 그리 거창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가게 되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매혹이라는 뜻일까. 








"이 책이 바로 그 기록이다. 이 땅에 흔적을 남긴 모든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모든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서문 中에서)



여행은 '경청'하는 일이었다. <여행의 품격>은 우리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문화유산 이야기, 여행에서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 인문 기행이야' 하고 뽐내지 않으면서도 알차고, 과거와 현재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이 여행하는 재미를 더한다. 


"왕실에 아들이 태어나면, 조선 왕조는 전국 길지를 골라 그 태를 묻었다. 왕실 뿌리를 굳건히 하고 대대손손 발복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길지를 선점해 다른 가문의 발복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도 다분했다. 자식 복이 많은 성군 세종대왕은 18남 4녀를 두었다. 세종은 그 아들들 태를 모아 한곳에 묻었으니 그곳이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이다. 송림 한가운데 있는 이 터는 본래 성주 이씨 중시조인 이장경이 묻힌 명당이었으나 왕명으로 묘를 이장시키고 태실을 썼다. 이장을 반대한 후손 이정녕은 관직을 박탈당했다. 사적 제444호다. 고려 때부터 성주 이씨와 전주 이씨는 불원지간이었다"(80).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이면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가볼 생각도 못한 땅이었던 우리 땅 중 하나가 '성주'였다. <여행의 품격>을 읽고 있다 보면, 도대체 이 여행기자는 이런 이야기들은 다 어디서 들었을까 싶은 '역사'를 들려준다. 


"성주는 큰 고장이었다. 김천, 고령, 칠곡, 무주, 구미에 이르는 거대한 땅이 성주였다. 40개 고을마다 성씨가 생겨났다. 이씨 가운데 성주에 본을 둔 성씨가 여섯 개다. 임진왜란 때 왕조실록 성주사고가 불타면서 성주는 세가 약화됐다. 급기야 숙종 대에 와서 왕이 짜증스런 명을 내렸다. "이 좁은 땅에 무슨 이씨가 그리 많은가. 성주 이씨로 통합하라." 이후 여섯 개 이씨들이 성주 이씨를 성씨로 삼고 살았다"(83).


<여행의 품격>은 경청이 필요한 느린 여행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역사는 피처럼 끈적하면서도 진하다. '티'나게 부각시키지는 않았지만, <여행의 품격>은 역사의 일면을 돌아보며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 잘못된 역사를 조용히 꾸짖은 힘이 있다. 


"많은 건축가가 그를 무명 집장사로 깍아내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한옥 마을로 사람들을 북촌으로 끌어들이는 서울과 종로구는 아예 정세권이라는, 건양사라는 이름을 그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금도 조선 시대라는 환상 속 향기를 맡으며 북촌을 걷고 있다. 반드시 수정돼야 할 역사다"(197).








"이 땅을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금은 더 풍부한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서문 中에서).



단순히 가볼만한 곳을 찾고 있는 독자에게 <여행의 품격>은 너무 수다스러운 책일지도 모르겠다. 듣는 일보다 보는 여행에 익숙한 우리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급히 발도장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여행을 몇 번 하고보니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함이 있다. 여행에 지쳐간다고 할까. 아니 의미없는 여행에 지쳐간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여행의 품격>은 여행 정보도 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보통'의 여행하고는 좀 거리가 있다.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듣지 않으면 보아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담았다. 책으로만 만나도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인문 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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