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도 함께
존 아이언멍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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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러미 멜런이 보기에 세인트피란 주민들은 그런 식으로 조 학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평생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아마겟돈의 수학을 연구하던 진지한 괴짜의 모습은 원치 않았다. 실크 넥타이를 매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월급이 그들의 1년 수입보다 많았던 번드르르하고 제멋대로인 도시 청년은 원치 않았다. 불안해하고 심란해하던 조, 악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조, 어둠 속에 숨어서 자기만의 두려움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던 조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원치도 않았다. 그들이 고래 축제 때 추억하는 남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찬양하는 남자는 영웅이었다. 선지자였다. 세상을 구한 자였다"(15).


<고래와 함께>는 영국의 지도에서 '작디작인 발가락의 저기 저 맨 끝에 난 조그만 뾰루지"나 다를 바 없는, 콘월 주의 외딴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아침의 작은 소동으로 시작됩니다. 마을이라기보다는 촌락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세인트피란에 알몸의 젊은 남자가 긴수염고래와 함께 떠밀려오면서 평온했던 마을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그 소동이 일어난 과거와 그 소동이 전설이 되어버린 현재, 알몸의 사나이가 기억하는 과거와 세인트피란에서의 현재가 거미줄 처럼 얽히면서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가 직조됩니다. 




"외로움이 이렇게 짧게 끝날 수도 있는 걸까? 이 부둣가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불길한 예감을 느꼈건만 낯선 이가 건넨 인사 하나로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는 걸까?"(52)


"그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 알몸으로 떠밀려온 '조 학'의 사연이 좀처럼 속시원이 풀어지지 않는 가운데, 그의 이야기가 한꺼풀 벗겨질 때마다 불길한 기운이 드리웁니다. 투자은행에서 투자결정을 위한 금융투자분석가로 일하던 조 학은 자신이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이 '독감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 종말을 예견하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은행을 뛰쳐나와 그에게는 "땅 끝"이나 다름없는 세인트피란까지 떠밀려왔습니다. 조 학은 파도에 떠밀려왔다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고래구하기 대작전을 진두지휘하며 하루아침에 세인트피란의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마음을 안정을 찾아던 조 학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예견한 대로 독감 바이러스가 번질 조짐을 보이자, 이번엔 인구 300명인 세인트피란 마을 구하기 대작전에 돌입합니다.  




"혼자 있는 건 절대 좋지 않다. 하지만 혼자 있어야 한다면 친구와 함께 혼자 있어라"(321).


<고래와 함께>는 "개미 떼처럼 확실하게 힘을 합치면 인간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유한한 자원으로 문명을 건설했고 그것을 써서 없애기 바쁜 인류는 자원의 소멸과 함께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맞서야 하는, 너무 끔찍해서 저항할 생각조차 나지 않는 거대 괴물은 핵무기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이기심을 <고래와 함께>는 폭노합니다. 이기심 앞에 인간 사회의 복잡성은 최대의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한 곳만 무너져도 도미노처럼 전부 쓰러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감 바이러스' 때문에 인류가 종말을 고할 수 있는 것도 복잡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래와 함께>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연합할 때 복잡성은 유기적은 연관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창고는 거의 비었다. 고래는 죽었다. 불은 다시 켜졌다. 하지만 어떤 미래가 조 학을 기다리고 있을까?"(464)


세인트피란을 구하며 그 마을의 전설로 남은 조 학은 자신 인생의 티핑 포인트가 절박한 고래를 구하기로 결심했던 순간이라고 회상합니다. 그때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값진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역사와 함께 쌓아올린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모릅니다. 아등바등, 죽을동살동 악착을 떨어보지만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퇴장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무한 경쟁에 내몰린 우리들은 어느 순간 인간 혐오자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며, 혐오하는 그것보다 혐오자로 변한 자신의 모습에 더 경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부르짖음이 여러 형태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우울증, 폭력, 무기력.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티핑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그냥 살아가지 말고, 신념과 다른 일상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티핑 포인트말입니다. 어쩌면 <고래와 함께> 안에서 그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초반엔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 새 푹 빠져 들어 읽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섬세하면서도 광대하고, 순박하면서도 날카로운 성찰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독감 바이러스 때문에 진짜로 인류에 종말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확인하고 싶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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